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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 1 | ▼a 노창희 ▼g 盧昌憙, ▼d 1938- ▼0 AUTH(211009)123279 |
| 245 | 1 0 | ▼a 어느 외교관의 이야기 : ▼b 盧昌熹 回顧錄 / ▼d 노창희 지음 |
| 260 | ▼a 서울 : ▼b 기파랑, ▼c 2007 | |
| 300 | ▼a 365 p. : ▼b 천연색삽화 ; ▼c 24 cm | |
| 600 | 1 4 | ▼a 노창희 ▼g 盧昌憙, ▼d 1938- |
| 945 | ▼a KINS |
소장정보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2자료실(3층)/ | 청구기호 352.113 2007c2 | 등록번호 111510776 (6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2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2자료실(3층)/ | 청구기호 352.113 2007c2 | 등록번호 111510777 (6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1991년 9월 17일 에 있던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 이에 앞서 있던 1990년의 소련과의 수교, 1992년에 있던 중국과의 수교등의 외교 현장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던 노창희 전 외무부차관의 회고록. 38년 동안 직업외교관으로 한 길을 걸어온 저자의 경험과 그에 대한 소회를 솔직하게 적어 놓았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소련?중국과의 수교 등 역사의 현장에서 활약한 한 외교관의 이야기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의제번호 제20호로 총회에 상정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규 회원국 가입 건은 만장일치로 의결되었다. 1949년 1월 19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가입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 43년 만에 숙원을 푼 것이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는 1990년 9월 적대국이었던 소련과 수교를 했고, 이후 1992년 8월 중국과도 수교를 맺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 책은 바로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노창희 전 외무부차관의 회고록이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외무부에 들어가 38년 동안 직업외교관으로서 한 길을 걸어온 저자의 솔직한 글들을 읽다보면 외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화들이 주는 긴박감, 재미, 감동과 더불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타국에서 국가를 대표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외교관들의 애환을 가슴 가득 느낄 수 있다. 올해 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취임에 힘입어 외교관이 되기를 꿈꾸는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역사의 현장과 그 이면 이 책의 매력은 우리 현대 외교 역사의 현장에서 저자가 직접 겪은 사실들을 꾸밈없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소 수교: 고르바초프와의 숨바꼭질 1990년 9월 소련과의 수교를 앞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났던 때를 저자는 이렇게 회상한다. 몇 년에 걸친 우리의 끈기 있고 성의에 찬 접촉이 결국은 크렘린을 움직여서 소련으로부터 한?소 정상회담에 동의한다는 통보가 온 것은 5월 22일이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다음 달 워싱턴 방문 후 귀국하는 길에 6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노 대통령과 만나서 양국관계 발전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자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온 것이다. 외교관계가 없는 국가 간의 정상회담인데다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확정되지 않았고 의제나 순서 등 의전 절차도 미정인 상태에서 노 대통령은 관계 참모들만을 대동하고 6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고르바초프가 묵게 되어 있는 페어먼트 호텔에 투숙했다. "전화가 왔습니다. 곧 만나자고 합니다." 우리는 본관 7층에 있었는데 신관 23층으로 오라고 한다기에 부리나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미?소 양측 경호원, 행사 요원, 취재 기자들, 구경나온 호텔 투숙객들로 시장판같이 북적대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 측 경호원의 안내로 신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련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수행하는 우리들의 머릿수를 하나씩 세더니 "다섯 명만!" 하면서 막아섰는데 그들의 태도가 어찌나 투박하고 거친지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회의에는 참석치 않기로 되어 있는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이 밀려나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긴 복도를 지나 맨 끝 쪽에 있는 큰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에 들어가니 소련 경호원 몇 명만 서성거릴 뿐 우리를 영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심 불쾌해서 아무도 말이 없고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옆에 가만히 서 있는 대통령이 보기에 민망해서 "좀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했더니 "어.... 괜찮아" 하며 간단히 대꾸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 상태로 한 5분쯤 지나니까, 도브리닌이 헐레벌떡 나타나서 너스레를 떨었다. "누가 여기로 안내했나! 회담장은 바로 위층인데....." 어찌 되었던 양국 정상은 역사적인 회담을 가졌다. 약 40분간 진행된 회담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개최되었고 조속한 시일 내의 한?소 수교를 기정사실화하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 후 한?소 수교는 급진전되었다. 가을에 유엔 총회에 참석한 최호중 외무부장관은 9월 30일에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과 만나 그를 설득해서 그 날짜로 양국 간 수교를 천명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서울과 모스크바에는 양국의 대사관이 개설되고 한국과 러시아는 한말 을사년乙巳年 이후 외교관계가 단절된 지 85년 만에 정식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소련과의 수교는 우리나라와 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의 밑바탕이 되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맺은 고르바초프와의 인연은 우리나라의 노태우 대통령이 레닌그라드를 방문하는 절차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통역을 맡은 신연자 박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양국 정상이 모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를 내며 나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저자에게는 "대통령은 레닌 흉상 앞에서 공산주의자를 찬양고무하고 경호실장은 KGB 두목하고 밤새워 술자리를 같이 해도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는 겁니까?"하는 농이 나올 정도로 행복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역사적 방문은 우리 민족에게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 열린 지금, 평양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희망을 품게 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43년의 숙원을 풀다 "연내에 유엔에 태극기를 꽂고 내가 가서 가입기념 연설을 할 수 있게 하시오!" 노태우 대통령의 부담스러운 신임장을 받고 주 유엔 대사로 부임한 저자는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을 위해 각국 대사들 특히 거부권 행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국대사를 만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쓴 채 자신을 맞이한 리다오유 주 유엔 중국대사의 인간미 없는 푸대접에 실망한다. 그러나 사흘 후 박길연朴吉淵 북한대사와의 만남으로 상황은 급반전한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서 외출을 준비하고 있는데 대표부의 윤병세 참사관이 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북한 대표부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본국 지시라고 하면서 북한대사가 꼭 오늘 오전 중으로 대사님을 만나서 확인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접촉 시도를 번번이 거부하던 북한 측이 급하게 만나자고 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좋으니 그쪽에서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알려 달라고 하시오." 북한 대표부에서 오전 10시에 유엔 본부 맞은편에 있는 유엔 프라자호텔(U. N. Plaza Hotel) 로비에서 만나자고 해서 나는 혹시 '북한 측이 입장을 선회하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박길연 북한대사를 만났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평양의 지시에 따라 남측의 공식입장을 확인하려는 것이니 정확하게 답변해주기 바랍니다" 하면서 세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간단히 답했다. "첫째, 단일의석 공동가입이라는 합리적인 제의를 왜 거부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문제 해결을 위한 성의 있는 제안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둘째, 남측은 조국 분단을 영구화하는 북?남 유엔 동시 가입을 끝까지 고집할 생각입니까?" "이미 수없이 반복된 논쟁인데 이제 와서 재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시 가입이 안 되면 단독가입을 기어이 강행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미 공식 문서로 만천하에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북한은 착각하지 마세요. 대통령이 국민 앞에 연내 유엔 가입을 분명히 약속했는데 그것을 바꾸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는데 나는 매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본국 지시라고 하면서 질문요지도 미리 정해 가지고 왔고 그 이상은 더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황급하게 돌아갔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러나 나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골프를 끝내고 일본대사와 양 대표부 직원들과 함께 저녁을 하고 관저에 돌아오니 밤 9시경에 유종하 외무부차관이 전화를 해왔다. "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소!"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얼마 전에 국내에서 북한방송을 잘못 해석해서 '김일성 사망설'이 유포되어 물의가 야기되었던 것도 언뜻 상기되었다. "지금 무어라 했소? 혹시 북측 보도를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니요?" 유 차관은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조금 전에 평양방송에서 북한 외교부 공식성명을 보도했고 외무부에서는 지금 막 환영한다는 논평을 내보냈소. 북한 성명문을 곧 타전할 것이니 받아 보시오." 이렇게 1991년 9월 17일 북한은 160번, 우리는 161번째로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고, 저자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유엔옵서버이자 초대 유엔 대표가 되었다. 또한'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라는 당시 최고의 이슈를 다루려는 우리나라 취재진의 경쟁으로'세계 베스트 드레서 10인'으로 선정되는 해프닝도 겪는다.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엔을 포함한 국제기구 진출도 늘어났고, 드디어 올 1월 반기문 외무부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는 쾌거를 이룩하는 하였는데, 저자는 아직도 우리와 국력이 비슷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그 숫자나 지위가 약한 편이라며 우리 젊은이들의 국제기구 진출을 독려하고 있다. -한?중 수교 : 새 친구를 얻기 위해 옛 친구를 저버리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한?중 관계는 중국이 1978년 덩샤오핑의 지도하에서 개혁-개방을 표방한 이후 양국 간 무역 등 실리관계가 점증했고 그에 따라 1991년에는 서울과 북경에 각각 무역대표부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을 계기로 그 필요성이 더욱 증대하였다. 게다가 중국은 전 세계가 탐내는 거대한 '시장'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채널을 통해서 한?중 수교를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중국은북한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고려해서 이에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다. 그러나 이는 시대적 대세였고, 오랫동안 우방관계를 유지해온 대만과 절연을 한 채 중국과 수교를 맺기에 이른다.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따랐지만 오랜 우정을 저버린 심정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한?중 수교가 있은 지 한 열흘쯤 지나서 라이트David Wright 영국 대사가 방한 중인 대처 전 수상을 위한 조촐한 만찬을 그 관저에서 베푼 적이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자리를 옮겨 식후주를 들면서 담소하는 중에 대처 여사가 나에게 물었다. "왜 대만에 대해서 그렇게 섭섭하게 대했습니까?"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자유중국 초청으로 약 1주일간 대만을 방문했는데 그때 대만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서 비난하는 소리를 많이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유를 나름대로 설명했는데, 한참 내 말을 듣고 있던 대처 여사가 조용히 말했다. "차관님, 외교에도 의리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세요!"(Remember, Minister, even in diplomacy there is something called 'loyalty'!) 나는 뒤통수를 힘껏 쥐어 박힌 느낌이었다. 우리와 대만의 자유중국 사이에는 유별난 특수 관계가 있었다. 우리가 일제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장제스 정부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우리 임시정부를 음양으로 도와주었고 그 후 오랜 냉전 기간을 거치면서 반공전선을 함께 지켜온 '형제의 나라兄弟之邦'였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고 우리의 대외 관계가 발전하면서 한?중 수교는 불가피한 선택이 되었고 중국과의 수교는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만과의 단교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면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어도 당시 대만의 불만과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대만으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깊은 배신감을 느끼게 해서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서는 우리의 입장에서도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좀 더 일찍이 대만 측에 사전통보하고 좀 더 진지하게 장래문제에 대해서 협의하는 자세를 보이지 못한 데 있었다. 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은 이미 7월 중순에 첸치천 외교부장을 특사로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 "조선반도와 국제형세의 변화에 근거해 중국과 한국이 수교할 시기가 이미 성숙했습니다..... 중국은 예나 다름없이 중?조 친선관계에 힘을 들이고 조선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주평화통일을 지지할 것입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대만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이 북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는 같지 않아서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우리도 충분한 시일을 두고 미리 대만 지도층과 친분이 있는 유력인사를 조용히 특사로 파견해서 성의 있고 정중하게 설득했더라면 대만 측의 반발을 어느 정도나마 무마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인물이야기 책에는 저자가 만났던 세계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그 재미를 더한다. "고르바초프가 공립학교 장학생이라면 옐친은 시골학교 고학생이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제법 잘 비교한 말이다. 큰 체구에 부리부리한 용모로 행동거지가 스스럼이 없었고 한눈에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던 옐친과 번득이는 총명함과 명쾌한 결단력, 서슴없는 언행이 크게 돋보였던 고르바초프. 저자는'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로 조국과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우리 세대의 한 위인을 가까이 대할 수 있었던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30년간의 청렴하고 능률적인 통치로 싱가포르를 세계 일류 도시국가로 육성한 리콴유李光耀 수상은 강한 신념과 카리스마를 풍겼고 자긍심과 권위의식 또한 그에 못지않은 인물이며, 미국 아칸소 주지사로 청와대를 방문한 클린턴은 당시 마흔두 살의 젊은 나이에 훤칠하게 잘생긴 용모와 밝고 쾌활한 성격으로 주변을 매료시키는 호남이었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과 순발력을 지닌 인물로 인간관계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외교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한 번도 북한을 방문한 적이 없는 레이건 대통령이 정원식 총리와의 만남에서 느닷없이"나도 북한에 가 보았지만 그들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정 총리와 저자는'참 이상한 소리도 한다'면서 의아해 했는데 그런지 한 2년쯤 지나니까 그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발표가 나왔다고 한다. 강력한 노조의 반발을 분쇄해서 파업과 태만으로 만성이 된 '영국병'을 고치고 포클랜드전쟁에서 아르헨티나를 굴복시킨 '철의 여인'으로 알려진 대처 수상은 우아한 헤어스타일과 단정한 복장, 세련된 몸가짐은 여느 귀부인과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중국의 텐안문 사태와 북한의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그를 보고 이념문제에 관한 한 가부可否와 호불호好不好가 칼로 자르듯이 분명한'신념의 정치인'으로 평가한다. 1992년 11월 초에 공식 방한한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세자빈은 두 사람 간의 소문난 사랑싸움 때문에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3박 4일의 방문기간 중에 둘은 각기 별실을 썼고 공식행사에서도 서먹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로 외면하고 지냈다고 한다. 한때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1981년 여름 성 바오로 대성당(St. Paul's Cathedral)에서 거행된 동화같이 아름다운 그들의 결혼식은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10년 만에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서 완전히 남남이 된 것이다. 찰스와 다이애나는 결국 귀국 직후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고 그 후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 방문이 그들이 함께 치른 마지막 공식행사가 된 셈이다. 이 같은 세계적 인물 외에도 우리나라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다음은 저자가 캐나다 1등 서기관으로 부임했을 때 주 캐나다 대사로 있었던 백선엽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도착한 해에 우리 교민이 집결 거주하기 시작하던 토론토에서 한인회 주최로 8?15경축행사가 있었는데, 백 대사는 축사에서 이민 초기의 어려운 한인사회를 위로하면서 자신의 어릴 때 고생하던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우리는 내가 일곱 살 때 평양으로 이사했는데 단칸방에서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이사 온 지 일 년쯤 되어 생활고가 극심해지자 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대동강 다리 위로 가서 '이제 그만 고생들하고 함께 빠져 죽자'고 했습니다. 이때 나보다 다섯 살 위인 누이가 '나무도 한 번 옮겨 심으면 3년이 되어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우리도 3년까지 견뎌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같이 죽자'고 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새로 이민 와서 어렵겠지만 한 3년만 잘 견뎌내면 모두 이곳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하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그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저자는 백 대사가 대사관 직원들이 편한 마음로 최선을 다하도록 유도한 자상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시대에 대한 평가 결론적으로 노창희 회고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외교적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은 노태우 대통령 시대에 대한 평가이다. 서울 올림픽, 한?소 수교,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한?중 수교, 엘리자베스 여왕의 한국 방문 등,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이뤄낸 일들에 대한 저자의 회고록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영국에 가거든 엘리자베스 여왕의 한국 방문을 꼭 성사시켜야 돼!" 하면서 "우리 그동안 여러 나라를 같이 돌아다녔는데 노 대사는 어디가 제일 인상에 남지?" 하고 물었다. "최근의 일이라서 그런지 모스크바에 갔던 것이 제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좋은 여행이었지!" 노태우 대통령의 부름으로 생각하지도 않던 청와대 수석비서관직을 3년간 거치게 된 것은 일반 직업외교관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특전이 아닐 수 없었다.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었고 권력세계의 실상도 체험할 수 있었다. 또한 대통령을 도와 정상외교에서 일익을 담당했다는 보람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나에게도 인자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었고 부족한 점이 있었을 텐데도 아무 내색 않고 신뢰를 보여주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79년 '12?12쿠데타'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원죄'는 있었지만, 1987년에 '6?29민주화 선언'을 감행하고 국민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그는 재임 중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인내와 성실로 어려운 과도기를 무난히 관리했다. 특히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국가의 안보와 외교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다만 재임 중 조성된 정치자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퇴임 후 부정축재로 물의가 야기된 것은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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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노창희(지은이)
1938년 경남 합천(慶南 陜川)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랐다. 경기 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59년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1960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외무부에 들어가서 직업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외교관으로서 제네바, 캐나다, 스웨덴에서 경력을 쌓았고 본국에서는 과장, 국장의 과정을 착실히 밟았다. 주미국 공사, 주나이지리아 대사를 거쳐 1988년 대통령 의전 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측근에서 정상외교를 도왔다. 1991년에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초대 주유엔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92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돌아와서 한·중 회담 수석대표로 수교 교섭을 마무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1993년에는 주영국 대사로 자리를 옮겨 한영 관계 증진에 헌신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한서대학교 초빙교수,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고문, 아시아―유럽재단 한국 대표 등을 역임했다.
목차
머리말 학창 시절 사무관 시절 주 캐나다 1등 서기관 과장 시절 주 스웨덴 참사관 국장 시절 주미공사 주 나이지리아 대사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주 유엔 대사 외무부차관 주영대사 퇴직과 그 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