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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 | ▼a 897.35 ▼b 이광수 이순e | |
| 100 | 1 | ▼a 이광수 ▼g 李光洙, ▼d 1892-1950 ▼0 AUTH(211009)113350 |
| 245 | 1 0 | ▼a 이순신 : ▼b 다시 사는 호국 화신 / ▼d 이광수 지음 ; ▼e 민병덕 엮음 |
| 246 | 1 1 | ▼a Lee Sun-sin, the great general |
| 246 | 1 8 | ▼a 삽화본 이순신 |
| 260 | ▼a 고양 : ▼b 정산미디어, ▼c 2014 | |
| 300 | ▼a 369 p. : ▼b 삽화, 초상화 ; ▼c 23 cm | |
| 440 | 1 0 | ▼a (정산) 삽화본 특선 ; ▼v 22 |
| 500 | ▼a 영화: 이규웅 | |
| 500 | ▼a 이 책은 이광수 저, 영창서관 발행(1953) '이순신'을 저본으로 삼았음 | |
| 600 | 1 4 | ▼a 이순신 ▼g 李舜臣, ▼d 1545-1598 |
| 700 | 1 | ▼a 민병덕, ▼e 편 ▼0 AUTH(211009)140170 |
| 700 | 1 | ▼a 이규웅 ▼g 李圭雄, ▼d 1927-?, ▼e 영화 |
| 945 | ▼a KLPA |
소장정보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7.35 이광수 이순e | 등록번호 111730942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삽화본 특선 시리즈 22권. 이광수 저, 영창서관 발행(1953) <이순신>을 저본으로 하고, 동아일보 연재(1931. 6. 26~1932. 4. 3.) <이순신>을 참조하였다. 표기는 현용 한글맞춤법에 준하였다. 삽화는 1971년 연방영화 제작, 이규웅 감독 명편 영화 [성웅 이순신]의 여러 장면, 기타를 내용에 알맞게 수록하였다.
<일러두기>
① 이 책은 이광수(李光洙) 저, 영창서관 발행(1953) ‘이순신(李舜臣)’을 저본으로 하고, ‘동아일보’ 연재(1931. 6. 26~1932. 4. 3.) ‘이순신(李舜臣)’을 참조하였다.
② 표기는 현용 ‘한글맞춤법’에 준하였다. 다음 옛 투의 말은 현용으로 고쳤다.
예) -지 아니하였다→-지 않았다, -아니 되어서→ 안 되어서
③ 주는 편주, 은 원말, 표는 표준어, 일은 일어, 은 독음이며 의는 말뜻이다.
④ 삽화는 1971년 연방영화 제작, 이규웅 감독 명편 영화 ‘성웅 이순신’의 여러 장면, 기타를 내용에 알맞게 수록하여 독자들의 감상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춘원 이광수 선생 약력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시인, 소설가, 평론가. 언론인. 호는 고주, 외배, 올보리, 춘원, 장백산인 등이다. 평북 정주 태생. 11세가 되던 1902년 부모가 사망하여 고아가 되었다. 이듬해 동학에서 문서를 배포하는 전령 일을 맡아 보았다.
1905년 일진회 장학생으로, 도쿄 메이지학원에서 수학, 이 시기에 최남선 주재의 잡지 ‘소년’을 중심으로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0년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마치고 정주오산학교의 교원으로 1913년까지 근무하였다.
1915년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도일하여 1919년까지 와세다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1월 ‘조선독립선언서’(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했으며, 안창호의 이념에 공감, 흥사단에 참여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후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취임, 1934년 사임할 때까지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방인근의 출자로 ‘조선문단’을 창간 주재하였고, 1926년에는 기관지 ‘동광’을 창간하여 주요한과 함께 잡지를 주재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안창호와 함께 병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반민법에 의해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1950년 7월 납북되었다.
작품으로 ‘무정’, ‘유정’, ‘사랑’, ‘재생’, ‘흙’, ‘이순신’, ‘단종애사’, ‘마의태자’,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등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약력
이순신(李舜臣) : 1545~1598.
1545년(인종 1년) 1세 : 3월 8일 자시에 서울 건천동에서 탄생.
1566년(명종 21년) 22세 : 10월 이 무렵 비로소 무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1567년(명종 22년) 23세 : 맏아들 회(薈) 출생.
1571년(선조 4년) 27세 : 둘째아들 열(䓲) 출생.
1572년(선조 5년) 28세 : 훈련원 별과 시험에서 말을 달리다가 말이 넘어지자 공도 떨어져 왼쪽 다리가 골절이 되어 낙방하였다.
1576년(선조 9년) 32세 : 2월 식년 무과 병과에 합격하고, 12월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 권관이 되었다.
1577년(선조 10년) 33세 : 1월 셋째아들 면(葂) 출생.
1579년(선조 12년) 35세 : 2월 함경도에서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훈련원 봉사가 되고, 10월 충청도 병마절도사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1580년(선조 13년) 36세 : 7월 흥양(興陽) 발포(鉢浦지금 고흥군)의 수군 만호가 되었다.
1582년(선조 15년) 38세 : 1월 군기(軍器) 경차관(조사관) 서익(徐益)의 중상 보고 때문에 파직되고, 5월에 서명(敍命)이 있어 다시 훈련원 봉사로 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6년) 39세 : 7월 함경남도 병사 이전(李戩)의 주천(奏薦)으로 그의 막하의 군관이 되고,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이 되어 호적(胡賊) 울지내(蔚只乃) 일당을 토벌하여 변경의 우환을 일소하였다. 11월 훈련원 정례 승진으로 참군(參軍)이 되었다. 11월 15일 향리 아산(牙山)에서 부친이 별세하였다.
1584년(선조 17년) 40세 : 1월 천리(千里)를 달려 향리의 집에 이르러 성복(成服)하고 상이 끝날 때까지 휴직하였다.
1586년(선조 19년) 42세 : 1월 사복시 주부가 되었다가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병마 만호에 임명되었다.
1587년(선조 20년) 43세 : 함경도 녹둔도(鹿屯島) 둔전관을 겸임하였다. 야적(野賊) 사송아(沙送阿) 일당의 습격을 받았으나 곧 섬멸하였다. 당시의 병사 이일(李鎰)이 자기의 죄를 면하려고 공을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옥한 후 조정에 무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의종군의 하명이 있었으나 다시 공을 세워서 사면을 받았다.
1588년(선조 21년) 44세 : 윤 6월 고향에 돌아와 휴양하였다. 무신(武臣) 발탁령에 의하여 공이 제2위에 천거되었으나 서명이 내리지 않아서 임관에 이르지 못하였다.
1589년(선조 22년) 45세 : 2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은 군관으로 있던 공의 장재(將材)를 칭탄(稱歎)하고 조정에 주청하여 본도의 조방장을 겸임하게 하였다. 11월 무신 겸 선전관을 배(拜)하여 상경하였다. 12월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때 태인현감도 겸관하여 민원 사무를 신속히 공정하게 처리하여 두 현민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선조 23년) 46세 : 7월에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었으나 당쟁에 끌리는 대간들의 말썽으로 취소되어 유임되었다. 8월에 당상관으로 승진되어 만포진(萬浦鎭) 수군첨절제사로 발령되었으나 역시 대간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591년(선조 24년) 47세 : 2월 진도 군수에 임명되고, 진도로 부임하기 전에 다시 가리포진(加里浦鎭완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2월 13일 가리포진으로 부임하기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정읍으로부터 이날 부임하였다. 왜구의 내침을 미리 짐작한 공은 본영, 속진영들의 전비를 급속히 정제 강화하고, ‘거북선(龜船)’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48세 : 4월 거북선 2척을 완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으며, 5월 옥포해전에서 승리하고, 6월 당포해전에서 승리하였으며, 7월 한산도해전에서 승리하고, 9월 부산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49세 : 한산도에서 군비 확충, 둔전 정비, 군사 조련 등 전쟁에 대비하였다.
1594년(선조 27년) 50세 : 당항포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53세 : 2월 무고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3월 국문을 당하였으며, 4월 풀려나 백의종군하였다. 8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고, 9월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1월 왜군이 아산 본가를 습격, 셋째아들 면(葂)이 사망하였다.
1598년(선조 31년), 54세,11월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11월 19일 전사하였다.
이순신과 안도산
이광수
파인(巴人)형
요새 제는 ‘이순신’을 쓰기에 촌가(寸暇)가 없습니다. 약 2개월래로 밤낮 이순신과 임진란만 보고 생각했더니 눈에 어른거리는 것이 모두 300년 전 일입니다. 꿈에 가끔 임진란을 꾸고……참으로 고소(苦笑)할 일입니다.
나는 조선 사람 중에 두 사람을 숭배합니다. 하나는 옛 사람으로 이순신(李舜臣)이요 하나는 이제 사람으로 안도산(安島山)입니다. 나는 7,8년 전에 ‘선도자(先導者)’라는 소설을 쓰다가 말았거니와 그 주인공이 안도산인 것은 말할 것 없습니다. 이제 ‘이순신’을 쓰니 결국 나는 내 애인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순신에 관해서는 예전 소년 잡지에 ‘우리 영웅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신체시를 지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마 20년은 훨씬 전인가 합니다. 그러므로 이순신에 내가 흥미를 가진 것이 ‘혜성(彗星)’ 기자의 억측과 같이 이번 충무공 묘소 문제를 기회로 생긴 저널리스틱한 동기만은 아닙니다.
글이나 그림이나 저 생긴 이상은 못 쓸 법입니다. 내가 이순신을 그리거나 안창호(安昌浩)를 그리거나 결국 내 인격 정도 이상에 넘지 못할 것을 내가 압니다. 그러나 나는 나 이상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만 내 힘을 다하여서 내 애인을 그릴 뿐입니다.
그러하지마는 내게는 또 하나 숭배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한번도 입 밖에 내거나 붓끝에 올려 보지 못한 사람이니 내가 조선 민족을 위하여 이순신, 안창호를 그려 놓은 뒤에는 아마 나 자신을 위하여 혹 ‘사람’이란 것을 위하여 이 ‘사람’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인형
형의 ‘삼천리(三千里)’의 기념호에 무엇을 쓰마 하고는 쓰지 못하여 이순신 원고를 쓰던 붓으로 그 생각으로 이것을 씁니다.
<‘삼천리 성하호’, 1931. 7.>
단종애사와 이순신
이광수
- 대체 지금까지 쓴 소설을 대별한다면 이 인과관적 소설과 또 어떤 범주의 소설이 있어요?
- 차츰 이야기하겠습니다마는 조선 민족의 장점·단점을 표현하려 한 것이 있지요.
- 그 예로는?
- ‘단종애사’와 ‘이순신’이지요.
- 어째서요?
- ‘우리 민족의 단점’을 나타낸 점으로는 ‘이순신’을 들지요. ‘이순신’에 대하여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연희전문 원두우(元杜尤) 박사가 ‘배(船)의 연구’라 하는 영문 저술을 한 것이 있는데 그 권두에다가 이광수 지은 ‘이순신’에서 참고한 것이 많았노라 하였고, 또 임진란 ‘사기(史記)’로는 이 소설같이 완전한 것이 지금까지의 다른 저술에 없다 했었고, 또 이 소설을 그대로 영역(英譯)하여 영·미 각국에 내놓으려 하나, 너무도 조선 민족의 단점을 그려 낸 것이기 때문에 행여 구미 식자(歐美識者)에게 악인상을 줄까 두려워하여 그만두었노라 하고 말했어요. 내 뜻을 알아 주는 이 오직 이 원 박사뿐이예요, 아직은.
- 말하자면 ‘민족적 성격’의 묘사가 잘 되었다는 뜻입니까?
- 이해를 초월하여 영훼(榮毁)를 초월하여 일단 옳다고 생각한 일을 위하여는 제 목숨을 내바친다는 ‘의(義)’의 정신―이것이 ‘이순신’에 있었지요. 그러나 야심과 시기에 찬 조정 간신(諫臣)의 성격이 보다 더 다수한 조선인의 성격적 전형이었다고 나는 보아요. ‘단종애사’에 이르러서도 사육신 같은 분들이, 그야 혹은 군신의 정으로 혹은 국록을 타 먹는 이해 관계로 움직였다고 보는 이도 있을는지 모르나, 나는 거기에 그런 정이나 이(利)에 움직인 것이 아니고 나야말로 ‘옳다고’, 이리하는 일이 ‘하늘에 떳떳한 길’이라고 믿었으니까 이해나 정의(情誼)를 초월하여서 그 간난(艱難)을 받으면서, 심지어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의를 위하여 싸운 것이라고 보아요. 이 빛나는 민족적 성격을 그리노라 했지요. 내 붓이 졸(拙)하여 이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 드리지 못하였다면 그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 대체로 쓰신 소설에 ‘운명’ 그것을 믿으셔요? 운명으로부터 오는 비극을 그리려 하지 않았어요? 운명관(혹은 우연)을 어떻게 취급하였어요? ‘단종애사’나 ‘이순신’이나 ‘재생’이나 ‘그 여자의 일생’이나 모두 슬프나 슬픈 작품들이지요. 모두 제재가 비극적이지요. 이것들을 일괄하여 ‘운명의 비극’이라고 부를 것이 못 됩니까?
- 남들은 내 소설을 혹야(或也) 통속소설이니라 하고 평거(評去)합데다마는―대체로 통속소설이라 함은 쉽게 썼다거나 비속하게 이야기됐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알기에는 그 사건에 ‘우연’을 자꾸 취급함에 있어요. 사건을 만들어 가는데 도무지 뜻하지 않은 우연히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인물을 자꾸 집어넣지요. 그러면 그 소설은 얼마든지 재미있게 꾸며 나갈 수가 있지요. 가령 여주인공이 정조의 위기에 당하여 있을 적에 생전에 얼굴도 성도 모르는 어떤 사내가 나타나서 구해 주었다. 또는 돈이 없어 자살하려고 어떤 청년이 강변에 섰는데 우연히 보니 금광맥이 있어 부자 됐니라―하는 등등, 소설가로 앉아 만일 이 ‘우연’만 시인하고 그를 자꾸 활용한다면 그 소설은 얼마든지 제가 공상하는 대로 재미있는 것이 되지요. 이 ‘우연’이란 즉 운명이지요. 그러나 나는 이러한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려 온 ‘비극’이란?
- 말하자면 ‘인과관적 비극’이지요. 착하지 않은 행실과 마음을 가졌기에, 슬프고 비참한 결과를 거두고 만다는 그러한 비극들이지요. 생각건대 옛날 그리스 비극은 전혀 운명적 비극이었지요. 어떤 신(神)을 노엽게 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일생을 두고 아무리 좋게 되려 해도 간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벌과 재앙을 갖다 주어 망하고 만다는 그런 비극들이지요. 그러다가 셰익스피어에 와서 그는 성격 비극을 그렸지요. 그 사람의 성격이 야심 때문에 망친다든지, 남을 믿지 않는 그런 성격을 가진 때문에 망친다든지, ‘리처드 왕’ 같은 왕의 야심을 그린 작, 햄릿같이 의심을 자꾸 품는 성격들에서 일어나는 비극 등등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근대에 와서 입센이 나서면서 ‘사회비극’이란 말이 있게 되었지요. 사회제도가 나쁘니 모든 비극이 생긴다. 등등.
그러나 같은 사회적 조건 아래서도 어떤 사람은 악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선하게 되니까―그러니까 나 보기에는 마음이 착하면 그것이 ‘필연적’으로―결코 우연이 아니외다.―행복을 거두고 그렇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불행을 거둔다는 그런 비극―즉 인과적 비극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어요.
<‘무정’ 등 전작품을 어(語)하다, ‘삼천리’ 제81호, 1937. 1.>
여의 작가적 태도
이광수
6
그렇다면 내가 소설을 쓰는 구경(究竟)의 동기, 즉 근본 동기는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애써 시대상을 묘사하여 동포의 안전(眼前)에 전개하고자 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자연히 제출될 의문이요, 또 내가 해야 할 구경의 답변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구경의 동기는 내가 신문기자가 되는 구경의 동기, 교사가 되는 구경의 동기, 내가 하는 모든 작위의 구경의 동기와 일치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조선과 조선 민족을 위하는 봉사(奉仕)―의무의 이행’이다. 이것뿐이요, 또 이 밖에 아무것도 없다. 내가 일생에 하는 일이 조선과 조선 민족의 지위의 향상과 행복의 증진에 호말(毫末)만큼이라도 기여함이 되어지다 하는 것이 내 모든 행위의 근본 동기다.
‘세계와 인류을 위하여’는 내게 아직 너무나 크다. ‘조선과 조선 민족을 위하여’ 하는 것도 나 같은 못난이에게는 엄두도 못 낼 큰일이지만 이것만은 아니하지 못할 일이다. 이 말에는 반드시 “그러면 네가 위한다는 조선 민족이란 것은 어떤 제급을 가리키는 것이냐?―착취하고 있는 계급을 가리키는 것이냐, 착취받고 있는 계급을 가리키는 것이냐?” 하는 질문이 올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대답하려 한다. 누가 조선인의 혈통을 가지고 조선어를 말하고, 조선인이로라는 성언(聲言)을 한다면 그는 조선 민족이라고 또 나는 명언(明言)하리라. 누구든지 조선 민족을 배반하지 않는 한에서 그가 어떠한 주의, 어떠한 계급에 속한 것을 물론하고 그는 조선 민족에 포용된다고. <중략> 그러므로 새로운 세대가 와서 국경과 민족적 모든 차이―언어, 생활상태, 습속 등―가 소멸되기까지는 민족적 결뉴(結紐)는 절대적이다. 더구나 금일의 조선 민족과 같이 민족 향상 운동이 필요한 지역에서는 모두 조선 민족의 민족적 단일체 사상을 파괴한 사상이나 행동은 조선 민족의 적이니 그러한 사상 행동을 하는 자는 민족적 모반자로 볼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근본 동기도 여기 있다. 민족의식, 민족애의 고조(高潮), 민족운동의 기록, 검열관이 허(許)하는 한도의 민족운동의 찬미,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선동, 이것은 과거에만 나의 주의(主義)가 되었을 뿐이 아니라 아마도 나의 일생을을 통할 것이라고 믿는다.
8
최후에 민족주의의 내용에 관하여 일언하고 본론을 막자. 세간에서는 흔히 만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립적으로 말하는 모양이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착오다. 민족주의란 세계주의에 대립할 것이요, 결코 사회주의에 대립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란 정치·경제의 단위를 일 민족에 국한하자는, 이를테면 범위 문제요 양적 문제다. 그러므로 조선의 민족주의라 하면 조선 내 조선인의 정치 조직 경제―문화 조직을 전세계나 전아세아의 또 제2나 제3 인터내셔널의 또는 누구나의 이해타산에서 하지 말고 유독조선 민족의 이해타산에서 하자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그 정치 조직, 그 경제 조직, 그 문화 조직의 내용 여하에 관하여서는 민족주의라는 말에는 아무 명시(明示)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민족주의란 결코 공소(空疎)한 말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운동의 목표를 조선 민족에 두고 또 운동자를 조선 민족에 국한한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더구나 감정에 있어서, 주의와 역(力)의 집중에 있어서, 여간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조선 민족적으로 노력함으로만 세계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 것이요, 따라서 조선인은 조선 민족을 위한 노력을 통하여서만 정상하게 인류의 노력에 연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 일개인의 능력의 막다른 골목은 있을지언정, 민족주의의 또는 민족주의 문학의 막다른 골목은 금후 1·2세기 내에는 없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궤상에서 매일 1차 혹은 2차씩 민족주의와 민족주의 문학을 청산하게 할지아다. 그것은 마치 궤상에서와 2천 3백만의 민중을 매일 한번씩 청산하고 과거 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은 관념 유희요 자가 도취다.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의 문학은 이로부터다. <‘동광’, 1931. 4.>
우리 영웅
이광수
월명포(月明浦)에 밤이 깊었도다.
연일 고전(連日苦戰)에 피곤한 장사(將士)들은
깊이 잠들고 콧소리 높도다.
깊고 검은 하늘의 무수한 성신(星辰)은
잠잠하게 반뜻반뜻 빛나며,
부드러운 바람에 날아오는 풀내까지도
날랜 우리 애국사(愛國士)의 핏내를 머금은 듯.
포구에 밀려오는 물결 소리는
철썩철썩 무엇을 노래하는 듯.
군영(軍營)에 누워 자는 우리 영웅―
고금에 없고 세계에 다시 없는 우리 영웅!
얼굴에는 날램과 분개(憤慨)함과 근심이
구물구물하는 촉광(燭光)에 나며
서편(西便)을 향하여 통곡(慟哭)하던 눈물 자취―
철석 같고 진주 같은 간장(肝腸) 흘러나온
뜨겁고 귀한 그 눈물 자취!
이 누군가?
우리 영웅―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
평화로운 그 호흡에도
적심(赤心), 열정(熱情) 알배었고
똑똑 뛰는 그 심장의 고동에도
생명, 자유가 넘치는도다.
부모, 형제, 자매―한 피 나눈 동포가
도탄(塗炭), 어육(魚肉)에 고통하며,
생명, 자유 품은 이 땅―내 나라의 운명이
위기가 일발(一髮)이며,
신성 문무(神聖文武)하옵신 우리 황상(皇上)―우리의 큰 아바지가
연진(烟塵)을 무릅쓰시고 용의 눈물을 동선령(洞仙嶺) 저편에 뿌리시게 되니,
우리 영웅의 마음 어떠할까?
사랑하는 부모 처자 고향에 두고
떠날 때에 그도 단장(斷腸)의 눈물 흘렸고
향기로운 가정의 행복을
그도 모르는 것은 아니라.
그러나 나의 선조가 나고 자라고
죽어서도 그 몸을 묻은 이 땅―내 나라!
내가 나고 자라고 활동하고
죽어서도 이 몸을 묻을 이 땅―내 나라!
이 내 천부(天賦)의 생명, 자유,
부모, 형제, 자매―동포의 생명, 자유를
품으며 기르는 이 땅―내 나라에 비기면
어느 무엇이 이에서 더 중할쏘냐.
오척 단구(五尺短軀) 이 몸이 비록 작으나
생명 자유 품은 이 땅―이 나라의 수호자!
뼈짬마다 세포마다 전기(電氣)같이 잠긴 것은
산이라도 흔들고 바다라도 뒤집으며
천지간에 꽉 차서 영원히 불멸하는
귀하고 또 중한 그 정신―
우리 조상부터의 큰 포부를 담아 가진 이
나라를 완전하게 가지고 가는 뜨거운 정성!
생명, 자유 품은 이 땅―내 나라 위하여,
오척단구 이 몸, 가루를 만들고,
심장에 끓으며 전신에 돌아가는
맑고 밝고 뜨거운 이 내 피로,
삼천리 청구(靑邱)를 물들이리라!
부모, 형제, 자매―한피 나눈 우리 동포,
생명, 자유 품은 이 땅―내 나라의 운명이
위기일발한 이때 오늘날―
적심(赤心), 열성(熱誠)을 갑주(甲冑)로, 우뢰 같은 호령에
날래고도 굳센 애국(愛國)하는 장사(將士)를 몰아
“윽! 윽!” 고함(鼓喊)으로 지쳐 나갈 때
흉용(洶湧)하는 파랑(波浪)도 행진곡을 부르는 듯
적심(赤心), 열정(熱情)……날랜 배……살 향하는 곳에
정의를 어그러치는 적(賊)의 무리는
분탕(奔蕩)하는 물결 속에 꺼지는도다!
크도다, 장하도다, 우리 영웅의 정신이여!
이 정신―충군(忠君), 열성(熱誠), 애국 열정―있기에
자유 독립의 표상(表象)되는 백두(白頭)의 뫼가
청구(靑邱)의 북천(北天)에 솟아 있을 때까지,
영원, 평화의 표상되는 한강(漢江)의 물이
청구(靑邱)의 중앙을 흐를 때까지
부모, 형제, 자매―한피를 나눈 우리 민족이
청구의 낙원으로부터 큰 사명을 다할 때까지
찬양하고 노래하리라―
우리 영웅―충무공―이순신! <완(完)>
<고주(孤舟), ‘우리 영웅’, ‘소년’ 제3년 제3권, 1910.>
‘이순신’ 관계 학술 논문
[학술논문]
-거북선이라는 외피와 ‘난중일기’라는 내면 : 1931년 여름, ‘동아일보’와 이광수를 중심으로 / 김성연, 일본학연구 제40집(2013년 9월),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2013. 9. 15.
-이광수의 ‘이순신’에 나타난 서술 전략과 ‘이순신’ 표상 / 정혜경, 이순신연구논총. 통권 제15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1. 6. 30.
-1930년대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의 전개와 그 성격 / 김도형, 이순신연구논총. 통권 제15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1. 6. 30.
-한국 역사소설 연구의 한 경향 : 이광수 역사소설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 황정현, 비평문학 제35호, 한국비평문학회, 2010. 3. 30.
-이광수와 김동인의 역사소설관 연구 / 탁광혁, 한국어문학연구. 제29집 (2009년 2월),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회, 2009. 3. 2.
-이순신의 문학적 형상화 연구 : 이광수의 ‘이순신’과 최인욱의 ‘성웅 이순신’을 중심으로 / 유은정, 이순신연구논총. 통권 제9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7. 12. 31.
-이순신의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통시적 연구 / 장경남, 민족문학사연구. 제35호(2007년 12월), 민족문학사학회 민족문학사연구소, 2007. 12. 31.
-역사와 역사소설 / 송백헌, 문학마당 통권 제16호, 문학마당, 2006. 9.
-이광수의 ‘이순신’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대비 연구 / 한승옥, 한중인문학연구. 제16집(2005. 12.), 한중인문학회, 2005. 12. 30.
-魯迅 ‘故事新編’和李光洙的‘歷史小說’比較 / 嚴英旭, 한중언어문화연구. 제8집 (2005. 3), 한국현대중국연구회, 2005. 3. 30.
-‘이순신’ 연구 / 탁광혁, 한국어문학연구. 제20집(2004. 9),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회, 2004. 9. 15.
-이광수 역사소설의 자전적 공간 / 최주한, 한국소설연구. 제4집(2002.4.), 한국소설학회, 2002, 4, 12.
-춘원과 동인의 역사소설의 비교연구 / 윤명구, 인문과학연구소논문집, 21(1994. 5), 인하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이광수 작 ‘이순신’의 인물형상화에 관한 고찰 / 신동욱, 예술논문집. 31
(1992. 12), 예술원.
-춘원의 역사소설 연구 : ‘이순신’을 중심으로, 1 / 유재엽, 논문집. 10(19
92. 2), 신구전문대학.
-춘원의 역사소설 연구 / 이명우, 목멱어문 제3집(1989. 3),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이광수의 역사소설 / 장백일, 한국문학연구 5(1982. 12),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한국근대역사소설의 연구 / 한영환, 연구논문집, 성신여사대 인문과학연구소, 1969. 11. 5.
-춘원의 역사소설 : ‘방법론적분석’ 서설 / 박용구, 현대문학 2-6, 현대문학, 1956.
-이충무공행록(상) / 이분(李芬), 이광수 역, 동광23(1931. 7), 동광사.
[학위논문]
-이광수와 김동인의 역사소설 연구 / 이재용, 인하대 대학원, 2013. 2. 박사.
-이광수 역사소설 연구 : 역사담론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 서은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0. 2. 석사.
-이광수의 역사소설에 나타난 민족관 / 이성희,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2008. 2. 석사.
-이광수 역사소설 연구 / 탁광혁,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2003.8. 박사.
-이광수 역사소설의 대중성 연구 / 김민정, 단국대 교육대학원, 2001. 8. 석사.
-이광수의 역사소설 연구 / 이계형, 경산대학교 대학원, 1999. 2. 석사.
-한국 근대 역사소설 연구 / 고정욱,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1993. 2. 박사.
-춘원과 동인의 역사소설 비교 연구 / 이종구,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1992. 2. 석사.
-한국근대역사소설연구 / 강영주, 서울대학교 대학원, 1987. 2. 박사.
-한국근대역사소설연구 / 송백헌, 단국대학교 대학원, 1983. 2. 25. 박사.
-춘원과 동인의 역사소설설고 / 이철훈,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춘원의 역사소설고 / 이영희, 서울대학교, 1982. 8. 30. 석사.
-춘원과 동인의 역사소설관 / 허정면,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1980. 8. 석사.
-춘원의 역사소설 연구 : 특히 현실 인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 서정주, 효성여자대학교 대학원, 1976. 2,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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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이광수(지은이)
1892. 3. 4. 평북 정주 출생. 호는 춘원(春園).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람. 1905. 일본 메이지 중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해 《소년》 지 발행. 1910. 귀국해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1915. 다시 일본에 가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 1919.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후 이를 전달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으며,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민족독립운동에 공감하고 여운형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 가담. 1921. 귀국. 1910년 중매로 결혼한 백혜순과 이혼하고 1918년 결핵 치료에 도움을 준 의사 허영숙과 결혼. 1928-1929. 〈동아일보〉에 『단종애사』 연재. 1937.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 1950.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자강도 만포시에서 병사. 『개척자』 『선도자』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 『군상』 『흙』 『무정』 『유정』 『이순신』 『그 여자의 일생』 『이차돈의 사』 『그의 자서전』 『사랑』 『원효대사』 등 60여 편의 소설과 시, 수필, 평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민병덕(엮은이)
이규웅()
1927~?. 영화감독. 서울 출생. 서울 경복고등학교 졸업. 1961년 ‘내 몸에 손 대지 마라’로 감독에 데뷔했다. 이후 1963년 ‘단종애사’, 1965년 ‘정경부인’, 1966년 ‘마지막 황후 윤비’, 1967년 ‘암행어사’, 1967년 ‘임금님의 첫사랑’ 등 1960년대에 역사적 인물과 야사를 바탕으로 한 전기 시대극을 주로 감독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1971년 ‘나를 버리시나이까’, 1971년 ‘성웅 이순신’, 1971년 ‘쌍둥이 꼬마신랑’, 1974년 ‘밤에 뜨는 태양’, 1974년 ‘잊지 못할 모정’, 1975년 ‘내시의 아내’, 1977년 ‘돌종’ 등 다수의 영화를 감독하였다.
목차
-작가의 말
거북선 / 경보 / 부산·동래의 싸움 / 달아나는 이들 / 상주와 충주의 싸움 / 몽진 / 29일 회의 / 출발 / 옥포 승전 / 당포 승전 / 쫓기는 길 / 한산도 큰싸움 / 안골포 싸움 / 부산 싸움 / 이 통제 / 칠천도 대패전 / 남원 함락 / 벽파정 / 죽기까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약력 / 358 -이순신과 안도산 : 이광수 / 360 -단종애사와 이순신 : 이광수 / 361
-여의 작가적 태도 : 이광수 / 363 -우리 영웅 : 이광수 / 365 -이규웅 감독 약력 / 367
-‘이순신’ 관계 학술 논문 /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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