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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들에 대해서에세이스트로서의 명성에 가려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어령은 50년대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소설을 써오고 있다. 중편소설집 <장군의 수염>에 이어 이번에 출간된 <환각의 다리>에는
가장 최근에 발표한 <홍동백서>를 비롯하여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엮이는 초기작품들까지 모두 7편의 중단편소설들을 실었다.
표제작 <환각의 다리>는 1969년 <세대>지에 발표된 것으로 4·19 혁명을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 정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대담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탕달의
단편소설 <바니나 바니니>를 공부하는 여대생 사미가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정치적인 시위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남학생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공부하는 <바니나 바니니>의 내용과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현실이 미묘하게 섞여들고 대부분 주인공 사미의 내적 독백 형식으로 기술되어, 읽기에 쉽지는 않지만 상당히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 요즘 유행하는 포스트모던
소설기법, 인터텍스추얼리, 인용, 페스티시 등 최신식 소설기법이 이미 이때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는 이런 기법들의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때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해외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함께 실려 있는 작품 중 <암살자>는 1966년 <사상계>에 발표되었던 것인데 해방 직후의 정치 테러를 그린 것으로 이만희 감독이 영화화했으며, 6·25 전쟁의 상흔을 보여주는
<무익조>는 실험극장에서 각색되어 명동극장 무대에서 공연된 바 있다. 초기 작품 세 편 중 <여름 풍경 2점>과 <어느 소년을 위한 서사시>(원제 <우리들 소년의
우수>)는 50년대 저자가 대학시절 서울대 문리대 교내지에 발표한 작품인데 이번 이어령 라이브러리로 묶이면서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공개되었다. 일찍부터 실험소설의 길을 택한 저자의 파릇파릇한 모습을 이 초기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소돔의 성>은 원래 산문으로서 <지성의 오솔길>에 묶였던 것인데 그 독특한 성격 때문에 이번에 소설집으로 엮게 되었다.
수록된 작품들 중에 읽기에도 이해하기에도 가장 쉬운 소설은 제일 앞에 수록되어 있는 <홍동백서>다. 이 작품은 저자가 "나도 소설의 모범답안을 쓸 수 있다는 오기 - 못 쓰는 것이 아니라 안
쓰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은 객기에서" 일부러 기존양식에 맞춰 썼다고 한다. 가장 평범하다고 할 만한 작품이지만 저자의 모든 저작을 아우르는, 전쟁과 산업화로 잃어버린 옛 모습에 대한 향수가 한층 짙게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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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한 줄거리홍동백서유학중에 만난 미국인 제니와 결혼을 한 주인공은 아버지의 반대로 계속 해외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귀국한다. 주인공이 얘기해 준 한국의 초가지붕과 여러 가지 풍습에 반한 제니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고향은 산업화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무익조왕따를 당하던 주인공을 도와주던 어른스런 아이 박준은 언제까지나 당당하고 긍지 있게 살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공군 조종사로 6·25 전쟁을 겪고 몸을 다친 채 사지에서 돌아온 박준은 뭔가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암살자종전 직후, 두 사내가 정치적 테러를 하기 위해 잠복하고 있다. 배신 또 배신당하면서 스러져가는 사람들의 미소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환각의 다리불문학과 학생인 사미는 <바니나 바니니>를 공부하면서 작품의 주인공 바니나의 운명처럼 , 4·19 혁명이 시작되는 날 시위를 하다가 부상을 입은 현수라는 대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현수는 사미와 결혼해 안주하는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치열한 현장으로 다시 뛰어든다....
소돔의 성 속에서도시를 헤매며 시선에 걸리는 인간 군상 - 새 옷을 산 여인, 상이군인, 좀도둑질을 하다 잡힌 소년 등의 모습, 그것을 보고 있는 화자의 예민한 감성과 저절로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독백체로
펼쳐진다.
여름 풍경 2점도시에 살다 휴가를 맞아 시골로 내려온 N씨 부부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서로가 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순서: 운명하신 아버님을 매장하기 위해 걷고 있다. 언젠가 자신의 아들도 같은 길을 걷고 또 손자도
같은 일을 하겠지. 그렇게 끝없이 이어져갈 것이다.
어느 소년을 위한 서사시점쟁이 아버지를 둔 소년이 몸이 아픈 소녀에게 흉괘를 말하기 싫어서 점괘를 반대로 가르쳐주고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소년의 내면을 주위 자연물에 대입하여 시적으로 표현했다.
본문 소개홍동백서! 어머니에게 절을 하면서 속으로 새삼스럽게 동쪽과 서쪽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죄송해요. 이 사람이 당신의 며느리, 제니예요."
"얘야, 말이 통해야 잘 왔다는 말이라도 하지."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 섞어놓는 게 아녀. 붉은 과일은 동쪽에다 놓고 흰 과일은 이렇게 서쪽에다 놓아야지.....
아버지는 당신이 세상을 떠난 뒤 제상조차 차릴 줄 모르는 제니 일을 생각하여 하신 말씀이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또 다른 뜻으로 들렸다. 동쪽과 서쪽, 하얀 과일과 빨간 사과, 밤과 대추, 미국과 한국
그리고 제니와 나.
아버지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시어머니 산소에 절을 하고 있는 이 이방의 며느리를 묵묵히 쳐다보고 계셨다. 아버지의 그 눈에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이상한 빛이 숨어 있었고, 이따금 골짜기에서
몰아닥치는 꽃샘바람이 아버지의 해표 털모자를 따뜻하게 했다. 갑자기 "쏴-"하는 산사태 같은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P. 33~34 <홍동백서>)
<환각의 다리>는 최근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서 말하는 '자기반영성self-reflexivity'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작가 이어령은 존 바스John Bath나
보르헤스Borgas처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외부 자연을 모방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소설 양식이 고갈되었기 ??문에 소설의 '인공성'과 '텍스트성' 같은 것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
바니나 바니니》의 장면들을 인용한 것이 실제 이 작품의 작중인물들이 자연적인 현실을 모방한 것 못지않게 리얼하게 느껴지는 것은 보르헤스의 '도서관 이론' 때문이 아닌가 한다.
(P.253 <대덜러스의 욕망>, 이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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