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상세정보

상세정보

白凡 金九先生의 편지

白凡 金九先生의 편지 (6회 대출)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김구, 金九, 1876-1949
단체저자명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백범학술원, 편
서명 / 저자사항
白凡 金九先生의 편지 / [김구] ; [백범 학술원 편].
발행사항
파주 :   나남,   2005.  
형태사항
281 p. : 삽도 ; 23 cm.
총서사항
백범학술원 총서 ;5
ISBN
8930081193 8930038778(세트)
주제명(개인명)
김구   金九,   1876-1949.  
000 00000cam c2200205 k 4500
001 000045235013
005 20251231093946
007 ta
008 060102s2005 ggka 000c kor
020 ▼a 8930081193 ▼g 94040
020 1 ▼a 8930038778(세트)
035 ▼a (KERIS)BIB000010237108
040 ▼a 211019 ▼d 211048 ▼d 211009 ▼c 211009
085 ▼a 953.06092 ▼2 DDCK
090 ▼a 953.06092 ▼b 2005m
100 1 ▼a 김구, ▼g 金九, ▼d 1876-1949 ▼0 AUTH(211009)22088
245 1 0 ▼a 白凡 金九先生의 편지 / ▼d [김구] ; ▼e [백범 학술원 편].
260 ▼a 파주 : ▼b 나남, ▼c 2005.
300 ▼a 281 p. : ▼b 삽도 ; ▼c 23 cm.
440 0 0 ▼a 백범학술원 총서 ; ▼v 5
600 1 4 ▼a 김구 ▼g 金九, ▼d 1876-1949.
710 ▼a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b 백범학술원, ▼e
945 ▼a KINS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과학도서관/Sci-Info(1층서고)/ 청구기호 953.06092 2005m 등록번호 121123255 (2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2 소장처 과학도서관/Sci-Info(1층서고)/ 청구기호 953.06092 2005m 등록번호 121123256 (4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3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2층)/ 청구기호 953.06092 2005m 등록번호 151200699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과학도서관/Sci-Info(1층서고)/ 청구기호 953.06092 2005m 등록번호 121123255 (2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2 소장처 과학도서관/Sci-Info(1층서고)/ 청구기호 953.06092 2005m 등록번호 121123256 (4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2층)/ 청구기호 953.06092 2005m 등록번호 151200699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

컨텐츠정보

책소개

백범학술원총서의 다섯 번째 책. 김구 선생이 국민, 동지, 친우들과 주고받은 다수의 편지들 가운데 한글 및 국한문 혼용 편지 23건, 중문 편지 124건, 영문 편지 11건 등 총 158건을 뽑아 모아서 편집했다.

한글과 국한문 혼용 편지는 사료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옛 문투와 맞춤법 등을 원문 그대로 두었으며, 중문과 영문 편지는 원래 백범 김구가 쓴 것을 임시정부 번역 담당자들이 번역해 보냈던 것이므로, 다시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정보제공 : Aladin

저자소개

김구(지은이)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나남출판 편집부(엮은이)

정보제공 : Aladin

목차


목차
저자의 말 = 5
백범일지 상권 = 10
 인(仁) 신(信) 두 아들에게 = 19
 우리 집과 내 어린 시절
  선조와 고향 = 21
  어리신 어머니의 난산으로 태어난 나 = 23
  개구쟁이 어린 시절 = 24
  아버지의 가난과 불평 = 27
 글공부와 과거 본 이야기
  나의 글공부, 소년 시절 = 30
  과거 본 이야기 = 35
 동학 입도와 동학농민봉기활동
  동학 입도 = 40
  동학접주 시절 = 42
  동학 농민봉기와 해주성 전투 = 45
 청계동 생활과 유학(儒學) 훈도
  청계동 안 진사와 소년 안중근 = 53
  고능선(高能善) 선생 = 56
  유학(儒學)과 의(義)의 공부 = 60
 청국 시찰과 의병부대활동
  관북지방과 청국 시찰 = 65
  의병부대 참가활동 = 71
  고능선 선생의 손녀사위가 될 뻔한 인연 = 77
  명성황후 시해 복수와 치하포 의거 = 83
 첫 번째 투옥과 옥중생활
  첫 번째 투옥과 심문 = 93
  인천감옥과 심문 = 100
  사형수의 신사상 독서와 옥중생활 = 107
  광무황제의 사형정지 칙령 = 111
  일제의 석방 방해와 탈옥 = 115
 방랑, 유람과 견문
  서울로 가는 길 = 123
  삼남 지방 유람 견문 = 130
  견문 가운데 몇 가지 = 137
 승려 생활과 환속
  마곡사의 중 원종(圓宗) = 142
  부모님 상봉과 영천사(靈泉寺) 주지 = 146
  환속과 동지 탐방 = 155
  고능선 선생 문안 = 166
  아버님의 별세 = 171
  약혼녀와의 사별 = 173
  신교육 운동 = 177
  자유결혼 = 181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新民會) 활동
  을사조약 반대 투쟁 = 185
  교육구국운동과 애국계몽활동 = 188
  안중근 의거 때의 피체(被逮) = 200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 시절의 이재명(李在明) = 201
  신민회(新民會)의 활동과 무관학교 설립운동 = 207
 안악사건과 세 번째 투옥
  안악사건(안명근 사건) = 209
  세 번째 투옥 = 210
  일제의 고문과 신문 = 213
  15년 징역형 = 223
  일제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강탈 = 225
  가족의 수난과 고통 = 228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과 옥중생활
  서대문감옥으로의 이감 = 233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과 2년형 추가 = 241
  면회 오신 어머님 = 242
  옥중생활 이야기 = 243
  감옥에서 만난 기인(奇人)과 열사 = 252
  인천감옥으로의 이감 = 265
  출옥과 귀향 = 270
 중국으로의 망명
  동산평(東山坪) 농감 생활 = 278
  중국으로의 망명 출국 = 283
  임시정부 경무국장 = 287
  임시정부 내무총장 시절과 상처(喪妻) = 289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 = 290
  옛 친우들의 소식 = 292
백범일지 하권
 하권을 쓰면서 = 297
 상해임시정부 시절
  상해 도착과 임시정부 = 301
  임시정부 경무국장 시기 = 304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 = 311
  내무총장 취임과 국민대표회의 해산 = 314
  상해 한국독립당과 만주 독립군 = 315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과 국무위원 = 317
  하와이·미주·멕시코·쿠바 동포들의 성금 = 322
 이봉창의사의 의거
  이봉창 의사와의 면담 = 325
  이봉창의 동경 투탄 의거 = 328
  한인 이봉창 저격일황 불행부중(韓人 李峯昌 狙擊日皇 不幸不中) = 331
  동포들의 호응과 지원 = 332
 윤봉길 의사의 의거
  윤봉길 의사와의 만남 = 334
  홍구공원 투탄 의거의 준비 = 335
  윤봉길 홍구공원 의거의 성공 = 337
  윤봉길 의거의 대성과 = 344
 임시정부 이동의 대장정(大長征)
  가흥(嘉興) 피신과 60만 원 현상 = 347
  광동(廣東) 사람 장진구(張震球) = 349
  해염(海鹽) 피신 = 351
  중국 농촌의 견문 = 355
  여사공과의 만남 = 357
 임시정부의 개편과 독립군 장교 양성
  장개석(蔣介石)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 360
  임시정부 개편과 한국국민당 = 363
  임시정부의 이동 = 365
  어머님의 추억 = 368
  장사(長沙) 임시정부와 남목청(楠木廳) 사건 = 374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임시정부의 중경(重慶) 도착 = 379
  어머님의 별세 = 382
  3당 통합과 한국독립당 = 385
  광복군 창설 = 388
  한인 대가족과 조국에 바친 영혼 = 391
백범일지 계속편 = 399
 중경 임시정부의 활동과 일제의 항복
  통일문제 = 401
  광복군 조직공작의 성과 = 402
  일제의 항복 소식 = 407
  중경 7년 생활의 사정 개요 = 409
  폭격의 참상과 중경 임시정부 = 410
 그리던 조국에의 환국
  귀국하는 길에서 = 415
  조국에의 귀환 = 417
  지방 순회와 옛 추억 = 422
  3열사의 유해 봉환 = 423
  삼남 순회 = 424
  38선 이남 서부 일대 순회 = 429
 나의 소원
  민족국가 = 433
  정치 이념 = 437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 443
찾아보기 = 447


관련분야 신착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