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독법으로 추사의 삶에서부터 예술을 읽은 '추사의 재발견'이다. 중간 중간에 얹힌 추사고택과 제주 대정리 답사기도 추사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현학적인 미사여구에 질려 추사를 멀리했던 독자들에게 추사와 가까워질 수 있게 한다.
추사를 향한 맨가슴이 낳은‘빈섬’식 추사 독파기
―추사에 미친 사내의 추사 오디세이
우리 시대 추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추사 김정희를 말하려면 한문학을 제법 하는 사람이거나, 묵향을 오래 맡아온 사람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추사를 좇는 사람들의 인상은 그래서 점잖은 어르신으로 그려진다.
추사는 이른바 “성역”이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추사체’지만 막상 붙잡고 묻는다면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의 ‘추사’지만 그들만의 ‘추사’가 된 이유도 성역화된 그들만의 접근과 해석 때문이다. 누구 하나 인간 추사를 말해 준 이 없었고, 추사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에게 추사는 알아야 접근할 수 있는 존재이자 넘어야 할 산이고, 그저 ‘추사체’로 남은 역사적 인물일 뿐이다.
그런 추사를 정말로 즐기는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서예가도 한문학자도 미학자도 아니며 하다못해 손에 붓을 쥔 적도 없다. 그저 추사가 좋아 자신만의 독법으로 추사의 삶에서부터 예술까지 탐한 사람이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즐거운 추사 읽기를 시도한 빈섬 이상국이《추사에 미치다》를 내놓았다.
사실 추사를 읽다보면 지적 갈증이 광범위해진다. 우선《주역》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금강경》과《화엄경》, 그리고《안반수의경》등의 불경도 읽고 싶어지고《유마경》도 생각날 것이며,《논어》와《맹자》또한 궁금해질 것이다. 소동파와 황산곡, 구양수 등 송시宋詩가 읽고 싶어지고 시불詩佛이라 불렸던 당나라 왕유와도 친해지고 싶을 것이다. 추사의 제자들의 작품들도 궁금해지고, 한석봉과 이광사의 글씨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질 것이다. ……하고 싶은 것들이 마치 입덧처럼 불쑥불쑥 생겨날 것이다. 조선 중후기의 정치사를 들여다보고 싶다가, 국화와 난초와 수선화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할 것이고, 제주도 대정현의 바람을 맞으며 향교를 향해 걷고 싶은 기분도 생길지 모른다. 경주 남산 구석에 박혀 추사체를 베끼고 있는 서양화가나, 왕릉 옆에 불편당不便堂이란 당호를 걸고 팔뚝 없는 혜가선사禪師 같은 모습으로 우뚝 앉아, 추사의 가르침을 따라 수천 장의 난을 치고 있는 서예가를 닮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쯤 되면, 추사가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길을 내주지 않을까 한다. 물론 나도 지금, 오리무중이다.
― “추사를 맨가슴으로 읽는 방법” 중에서
“세한도를 만나고 내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입덧처럼 시작된 추사와의 열애
시오노 나나미에게 다가왔던 마키아벨리같이 내게는 추사가 다가왔다. 내가 그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었다. 나는〈세한도〉에게 붙들렸다.
빈섬을 추사에게로 이끈 건〈세한도〉였다. 처음 한 전시회를 통해〈세한도〉를 접한 저자는, 그 무렵 신문들에서 쏟아진〈세한도〉예찬을 훑고 갔던지라 ‘뭐가 그렇게 좋기에?’라는 삐딱한 맘을 품고 작품 앞에 섰다. 그런데 일견 단조로운 그림 아래서 30여 분을 서 있던 그의 인생은〈세한도〉를 보기 전과 후로 나뉘게 된다. 이후 8년 동안 줄곧 이 그림을 의심하고 다시 매혹되다가 슬며시 의심이 도지며 마음의 얼다 녹다를 반복하는, 한마디로〈세한도〉와 “열애”를 했다.
그 세심하고도 몸서리치는 열애기가 책의 앞부분을 수놓는다.
잣나무 이상적이 신바람 난 듯 달려오고 소나무 추사가 짐짓 뒷짐을 지면서도 몹시 반가워 고개를 쑥 내미는 ‘나무동화’로〈세한도〉를 이해하지 않으려고 나는 결심하고 있다. 잣나무는 잣나무고 소나무는 소나무다. 그 독야청청의 기운을 담아 붓끝을 툭툭 쳐올리는 추사의 마음을 떠올릴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날 그 그림이 왜, 내 눈에 들어왔을까” 중에서
나는 저 장면을 떠올리고는 늘 몸서리친다. 한증막 같은 배소를 삼엄하게 감싸는 절대고독의 추위.〈세한도〉는 설한雪寒에 둘러싸인 진경眞境의 겨울이 아니라, 빈섬에 갇힌 한 정신의 유폐에 관한 엄혹한 리포트다.
―“여름에 겨울 추위를 그린 까닭” 중에서
〈세한도〉는 식물성이다. 도도한 식물성이 여백 안에 자기를 가두며, 닥쳐온 추위를 달게 받아내고 있다. 설사 왼쪽 고목의 남은 가지가 마저 시들어 얼어 죽는다 해도 비명을 지르는 일은 없으리라. 식물은 그렇다. 그저 그 자리에서 꼿꼿이 죽는다.
―“세한도에 나비를 그려넣었다면” 중에서
〈세한도〉에 빠지자 빈섬은 추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입덧”처럼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가며 만난 인간 추사의 삶과 열정 그리고 예술은 결코 특정인들만이 즐기고 말 게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 책의 모든 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평양기생 죽향과의 스캔들과 그 무렵 부인 예안이씨에게 보낸 편지에선 “남자” 추사를, 세상에 둘도 없는 지기 초의 스님에게 보낸 투정어린 편지들을 통해서는 “옹졸한” 추사를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독특한 시선은 추사에게서 묵향이 아닌 인간 냄새를 맡게 해준다. 그동안의 추사 관련 책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추사”를 즐기는 감상자 “빈섬”의 목소리가 오롯하다는 것이다. 대개 “추사”를 다룬 글이나 책에서 글쓴이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언급하는 일은 조심스러워한다고 느낄 정도로 드물다. 그러나 이 책에선 추사에 빠져있는 한 사내의 이미지가 추사의 모습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추사의 문자향이 바람을 타고 당대 난초 같은 벗들의 제자 향기에 버무려졌다. 그 퓨전 향기가 시간의 바람을 타고 우리 시대의 코끝으로 은은히 전해져온다. 말하자면 저 그림의 오른쪽 여백 안 보이는 곳에, 당신과 내가 있다. 저 그림은 바로 시공을 넘나드는 향기의 행로를 그린 그래프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 내 책상 앞까지 향기가 다가와 있다. 당신 코끝에도 그 향기 느껴지는가.
―“우정의 향기, 지란병분” 중에서
“저들에겐 동파육이 있는데 우리에겐 왜 추사팽이 없는가?”
―추사를 향한 끝없는 열정과 매력적인 글쓰기
“나는 빈섬의 글을 읽노라면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시선이 되어버린다.”
“유홍준의 추사와 빈섬의 추사가 다른 점은 … 빈섬의 글에는 진실로 추사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돋는다는 점이다.”
―이윤기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 씨가 한 모임에서 한 말이다. “추사”와 더불어 저자 “빈섬”을 이 책의 한 축으로 꼽은 이유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추사도 추사지만 저자의 추사를 향한 열정과 그 열정이 빚어낸 글쓰기가 우리를 한걸음 더 추사에게 다가가도록 만든다.
저 동파육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서 나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추사팽’을 만들어내지 않는지 답답하다. 추사의 예서 대련 중에서 마지막 역작으로 꼽히는 ‘대팽고회大烹高會(위대한 음식, 훌륭한 모임)’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을 돌아온 천재 지식인이 죽음을 앞둔 그해에 마치 최후의 깨달음처럼 내놓은 글귀다.〈불이선란〉의 난초가 그랬듯, 이 글씨에는 잘 쓰겠다는 인간적인 현시顯示 욕망이 보이지 않는 담담한 졸박拙樸이 내려앉아 오히려 순정한 감동을 준다.
―“동파육과 추사팽” 중에서
저자는 이처럼 추사를 ‘발칙하게’ ‘새롭게’ 읽어낸다. 이는 작품을 음미하고 사색한 글을 남기며 자신만의 느낌으로 충실히 되새긴 흔적이다. 자신만의 색다른 감상법으로 추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책 중간 중간에 얹힌 추사고택과 제주 대정리 답사기도 추사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그래서 ‘추사의 재발견’이라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럴 정도로 저자의 감상과 사색, 글쓰기가 매력적이라는 의미다. 그동안 현학적인 미사여구에 질려 추사를 멀리했던 독자들이라면 이번 기회를 통해 한층 더 가까워진 추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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