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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 | ▼a 897.83 ▼b 홍만종 우 | |
| 100 | 1 | ▼a 홍만종 ▼g 洪萬宗 , ▼d 1643-1725. ▼0 AUTH(211009)64477 |
| 245 | 1 0 | ▼a 우리 신선을 찾아서 : ▼b 홍만종 선집 / ▼d 홍만종 ; ▼e 정유진 편역. |
| 260 | ▼a 파주 : ▼b 돌베개 , ▼c 2010. | |
| 300 | ▼a 283 p. : ▼b 연보 ; ▼c 22 c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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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0 | 1 | ▼a 정유진 , ▼e 편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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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정보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7.83 홍만종 우 | 등록번호 111581392 (6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2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7.83 홍만종 우 | 등록번호 111581393 (6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중 | 반납예정일 2026-06-11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홍만종이 20대에서 30대에 걸쳐 지은 세 권의 저서인 <해동이적>, <순오지>, <명엽지해> 가운데 각각 일부를 골라 번역한 것이다. 83세로 장수를 누린 홍만종은 70대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저술 활동을 펼쳤지만, 그 사상의 전체적 틀은 청년기에 완성한 이 세 권을 통해 이미 그 대강이 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 한 권만으로도 홍만종의 사상과 저술의 전체적 면모 및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홍만종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의 지식인으로 살다 간 현묵자로 해동도가 관련 서적인 『해동이적』을 편찬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사 및 사학사(史學史)와 관련된 중요한 저술을 여럿 남겼다.
우리 것을 지독히도 사랑했던 조선의 지식인 홍만종
주지하듯 조선 후기 3대 가집(歌集)은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이며, 각 책의 편자는 김천택(金天澤), 김수장(金壽長),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으로 배워왔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2008년에 발표된 영산대학교 김영호 교수의 諸 논문), 『청구영언』의 편자는 홍만종이다. 그 근거는 새롭게 발굴된 홍만종의 저서 『부부고』(覆?藁)에 실린 「『청구영언』 서문」과 「『이원신보』(梨園新譜) 서문」을 통해서이다. 이 서문에 따르면 『청구영언』은 홍만종이 편찬한 것이고 김천택은 이 책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거나 표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원신보』는 『청구영언』의 속편이다. 사실 『청구영언』의 편자에 대한 의문은 조동일, 강전섭, 조규익 선생 등에 의해 이전부터 이미 논의된 바 있으므로, 이 발견을 통해 학계에서는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청구영언』의 편자가 홍만종이라는 사실은, 기존의 홍만종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바뀜을 의미한다. 한시비평가(漢詩批評家)로서 평가되어 오던 홍만종이 한시뿐 아니라 우리나라 시가에도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은 도가적(道家的) 성향을 지녔던 조선 후기의 역사가이자 문학가로, 자는 우해(于海) 호는 현묵자(玄默子)이다. 평생에 걸쳐 우리 역사와 문학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에 몰두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홍만종의 글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어질병(폐결핵으로 추측됨)을 앓았는데, 이것이 지병이 되어 벼슬길에도 나가지 않고 평생을 야인(野人)으로 지내며 독서와 저술에만 힘을 쏟았다. 그가 젊은 나이에 병을 얻은 것은 미루어 짐작컨대 부친 홍주세(洪柱世, 1612~1661)의 정치적 실각과 사망에 따른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1660년 부친 홍주세는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벼슬이 감등되고 이듬해 사망한다. 풍산(豊山) 홍씨 경화거족(京華巨族)의 후예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홍만종의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한때 사마시에 합격해 이름뿐인 벼슬을 얻기도 했지만 이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의 유배생활까지 겪게 되니, 이후 홍만종은 벼슬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던 듯하다. 이러한 건강상의 이유와 정치적 불우로 인해 홍만종은 도가의 양생술에 관심을 가지는 한편, 체제 바깥에서 혹은 체제와 상관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다 간 도가의 삶과 사상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도가 사상은 홍만종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홍만종의 정신세계를 저류하며 그의 역사의식과 문학정신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해동도가(海東道家)다. 특히 17세기 조선의 도가사상은 존화적(尊華的)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우리 고유의 전통 및 정신문화를 앙양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사상 중 하나였으니, 그가 단군신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우리나라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에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던 것도 이런 도가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홍만종은 일찍부터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특히 단군(檀君)을 ‘우리 민족의 비조(鼻祖)’로 여겨 여러 문헌 기록을 참조해 그 사적을 고증하고 정리하였다. 20대의 저술인 『해동이적』에서부터 시작된 시조(始祖) 단군에 대한 관심은 30대의 저작 『순오지』를 거쳐 만년의 역작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摠目)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지속된다. 그리하여 『동국역대총목』에서는 단군을 우리 역사의 정통(正統)으로 내세우기에 이른다. 이는 소위 ‘기자 정통론’(箕子正統論)에서 기자를 단군으로 대치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또한 한말(韓末)의 ‘민족주의 사학’에 중요한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서 의미가 크다.
홍만종은 한문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일찌감치 우리말과 국문문학의 가치를 긍정했던, 선구자적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순오지』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83) 등 우리나라 역대 문인들이 지은 가사(歌辭)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노래는 모두 우리말을 사용하는데 간혹 한자가 섞여 있을 뿐 대개 우리글로서 세상에 전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과 달리 우리말을 사용하니 당연한 이치다. 이런 노래는 중국의 노래와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대로 보고 들을 만한 것이 많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노래가」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우리말을 사용하니 그 노래도 우리말로 지어진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한글을 ‘언서’(諺書), ‘언문’(諺文) 등으로 낮춰 부르며 한자로 된 문학만을 인정하던 시대에 이처럼 국문문학의 가치에 주목한 것은 매우 선구자적인 혜안이 아닐 수 없다.
홍만종의 우리 문학에 대한 관심은 상층의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순오지』에는 우리 농민이 부른 노래가 명나라 장수를 감탄케 하는 일화가 등장하는데, 이는 홍만종이 민중들이 향유했던 민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홍만종은 민간의 설화 및 전설, 야담 등 민중들에 의해 구술된 이야기를 채록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달력에 적은 우스운 이야기’라는 뜻의 『명엽지해』(蓂葉志諧)는 마을 노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채록해 놓은 소화집(笑話集)으로, 조선 시대 구비문학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홍만종은 민중의 생활 언어에도 주목해 140가지가 넘는 민간의 속담을 채집하여 한문으로 옮겼다. 항간의 아낙이나 아이들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속담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뜻이 깊어 사대부들도 종종 글에 인용하고는 했다며 속담의 가치를 높이 샀다(「우리 속담의 가치」). 이처럼 홍만종은 사대부 지배계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피지배 계층인 민중의 생활 언어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다.
홍만종의 사상적 유연성은 17세기 사상 구도의 한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충격 뒤 지식인 사회에는 일련의 사상적 지형 변화가 나타나는데, 한편에서는 정통 성리학 이념이 더욱 강화되었던 반면,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는 도교나 불교, 양명학 등 소위 이단(異端)에 대한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며 주류 성리학의 이념적 편협함을 비판하고 나섰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천하에는 유·불·도 세 가지가 있는데, 도가와 불가는 견성(見性)을 근본으로 하고, 유가는 인륜을 중시하니, 옷과 음식이 살아가는 데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것과 같다.” 홍만종은 17, 8세기의 새로운 사상적 흐름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지식인이었다.
홍만종은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에 균열이 가고 이른바 이단적 풍조가 풍미하던 17, 8세기에 도가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와 문학의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간 지식인이었다. 그는 비록 적극적인 개혁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보편적 중화 질서가 무너지고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지던 때에 그 시대적 요구를 민감하게 받아들여 주체적 역사의식과 문학정신으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고 우리말과 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했던 역사가요 선구적 문학가였다.
홍만종의 사상과 저술의 제 면모를 오롯이 담아내다
이 책은 홍만종의 대표 저서인 『해동이적』, 『순오지』, 『명엽지해』 가운데 홍만종 사상의 특징적 면모를 보여주는 글들을 뽑아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 번역한 것이다.
◎ 우리 것을 담아낸 『순오지』
홍만종 사상의 총체적 보고라 할 수 있는 『순오지』는 ‘우리 땅 우리 역사’, ‘우리말 우리 노래’, ‘신선술, 건강과 불사의 비결’ 세 장에 나누어 실었다. 이를 통해 단학(丹學)에 유의했던 도가적 인물로서의 홍만종의 모습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체성에 주목한 주체적 역사가이자 우리말과 우리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했던 선구적 문학가로서의 홍만종의 면모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항간에서 매일매일 쓰는 속담은 셀 수 없이 많아 아낙네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그 말이 비록 비천하다 할지라도 상황에 적절한 표현이 많아 앞선 문인들은 상소문이나 편지글에 종종 속담을 사용하고는 했다. 가령 ‘죽은 정승보다 살아 있는 개가 낫다’는 말은 노수신이 늙어 사직을 청하는 상소에 이용했고, ‘외손바닥이 소리 나랴’는 말은 양경우가 편지글에 이용했다. 또 ‘급히 먹는 밥이 목이 멘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말은 허균이 편지글에 써 그 문집에 실려 있으니, 대개 속담은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이면 저절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 대개 ‘급히 먹는 밥이 목이 멘다’, ‘고삐가 길면 밟힌다’, ‘적게 먹고 가는 똥 눈다’, ‘삼정승 사귀지 말고 내 한 몸을 조심하라’와 같은 말들은 그 뜻이 깊어 속담이라고 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속담도 보는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는 바가 있다면 그 유익함이 적지 않은 것이다.
_「우리 속담의 가치」 중에
◎ 중국과 다른 우리 신선의 흔적을 찾는 『해동이적』
우리나라 도가들의 열전(列傳)인 『해동이적』은 ‘우리나라의 신선들’에 실었다. 총 32편의 전(傳) 가운데 단군, 혁거세, 주몽, 옥보고, 김가기 등 흥미롭고 중요한 작품 중심으로 25편을 골라 실었다. 신화 속 인물을 제외하고 ‘선인’(仙人) 혹은 ‘신선’으로 불렸던 열전의 주인공들은 사실 당대의 지배체제를 벗어나 자유로운 삶과 정신을 추구했던 방외인(方外人)들이라 할 수 있다. 체제가 요구하는 틀에서 조용히 물러나 지배적 질서와 상관없이 사는 자유로운 삶은 때로 그 지배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나 저항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자유와 초탈, 거부와 저항 정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민중의 해학과 풍자를 담아낸 『명엽지해』
민간의 구전설화를 채록한 소화집(笑話集)인 『명엽지해』는 ‘마을 노인이 들려준 민중의 이야기’에 실었다. 「농짝에 갇힌 사또」와 같은 이야기는 사극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야기 요소다. 그리고 「거웃 한 오라기 나누어 갖기」, 「아가, 몸을 돌려라」, 「너무나 노련한 신랑」 등은 성(性)에 관한 농도 깊은 이야기를 재미나게 담아내어 웃음을 자아낸다. 야사씨(野史氏)를 등장시켜 전하는 저자의 말은 우스갯소리가 되고 말 이야기를 의미 있는 메시지로 바꾼다. 이야기의 각 편을 통해 옛 민중들의 해학과 지배계급의 위선에 대한 풍자, 인간 욕망에 대한 넉넉한 이해와 긍정 등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첫날밤, 신랑이 신부와 막 일을 치르려 할 때였다.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더듬는데 신부의 다리가 없었다. 깜짝 놀란 신랑은 생각했다.
‘내가 다리 없는 여자를 얻었구나. 이 일을 어이할꼬?’
그러고는 급히 장인을 찾아 어찌 된 일인지 따져 물었다.
이상히 여긴 장인이 딸을 불러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딸이 대답했다.
“일을 치르려 하기에 먼저 다리를 들었더니 그 야단이지 뭐예요?”
_「다리 없는 신부」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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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홍만종(지은이)
풍산 사람으로 자는 우해(于海), 호는 현묵자(玄默子), 몽헌(夢軒), 장주(長洲)라 했다. 부친 주세(柱世, 1612∼1661)는 자가 우문, 호가 정허당으로 생원과 문과를 거쳐 정랑에 이르고 영주군수를 지냈으며 뒤에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조부 보(?, 1585∼1643)는 진사와 문과 장원으로 소무훈에 책봉되어 풍령군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 및 부원군에 증직되었다. 증조 난상(鸞祥)은 형조좌랑을 역임했으며, 고조 수(修)는 부사직을 역임했다. 선조의 장녀 정명옹주에게 장가든 부마 주원(柱元)과는 재당질간이니 고조대에서 분가되었다. 외가는 중종대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의 후손으로 외조가 이조참판 광경이며 외숙이 좌의정 지화였다. 이 같은 좋은 배경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동명 정두경의 문하에서 시를 배우며 휴와 임유후, 백곡 김득신, 만주 홍석기 등과 더불어 나이를 잊은 만년지교를 맺고 시주를 즐겼으나 이는 나중의 일이다. 그의 생애에서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20세 때의 부친상과 연이은 득병, 10년 이상의 긴 요양 이후 출사했으나 곧 이은 파직이 아니었을까 한다. 명확하지 않은 부친의 죽음이나 당쟁에 휘말려 삭탈관직되는 개인적 불행은 남자 형제도 없는 단신인 그에게 저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촌로나 일반 서민들과 교유하는 장으로 만들며 시간적 여유를 누렸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교서관제조 신완(申玩, 1646∼1707)의 추천으로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叢目)》의 편찬 기회를 얻었지만, 이것마저 고지식한 신료들의 “포폄여탈”, “참람되다”는 비난을 받음으로써 그의 저작이 더 이상 유포·간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쟁의 여파가 평생 그에게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 새로 발굴된 그의 친필문고 《부부고(覆?藁)》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청구영언(靑丘永言)》이나 《고금소총(古今笑叢)》, 《속고금소총(續古今笑叢)》 외에도 그가 수많은 기록을 남겼음이 밝혀졌다. 그 저술의 범위도 그렇거니와 내용을 봐도 그가 얼마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하나하나 분류를 시도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앞으로 그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조사와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정유진(엮은이)
인하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논문으로 「한국·중국·베트남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여성형상 비교 연구」가 있다.
목차
목차 간행사 = 4 책머리에 = 6 우리 땅 우리 역사 _『순오지』 동방의 시조, 단군왕검 = 19 국사 도선 = 23 이성계가 꾼 꿈 = 27 귀화인 퉁두란 = 29 아아! 고구려 = 31 안시성주 양만춘 = 34 진시황을 저격했다는 우리나라 장사 = 37 일본인이 두려워한 승려 유정 = 40 우리나라의 이름 = 43 황제 한번 못 해 본 나라 = 45 우리말 우리 노래 _『순오지』 중국 노래의 음률을 따지는 건 쓸데없는 일 = 51 우리에게는 우리의 노래가 = 54 중국인이 탄복한 이색의 시 솜씨 = 59 우리 속담의 가치 = 62 우리가 처음 만든 글자 = 65 우리나라의 신선들 _『해동이적』 산신이 된 단군 = 69 알에서 나온 혁거세 = 73 천제의 아들 주몽 = 76 삼일포의 네 신선 = 80 학을 춤추게 한 옥보고 = 83 대세와 구칠 = 85 담시 선인 = 87 욱일승천한 김가기 = 89 간곳없이 사라진 최치원 = 92 별의 화신, 강감찬 = 95 오백 년을 산 권 도사 = 98 세상 밖에서 노닌 김시습 = 117 화를 피한 정희량 = 122 날 때부터 글을 안 남추 = 129 서경덕과 벗한 지리산 선인 = 132 도술을 감춘 서경덕 = 135 외국어 천재 정렴 = 141 술수에 능했던 전우치 = 146 전우치를 잡은 윤군평 = 150 임진왜란을 예언한 남사고 = 152 서경덕의 제자 박지화 = 156 물의 신선 이지함 = 160 의술에 밝았던 장한웅 = 166 검선(劍仙) 장생 = 170 곡기를 끊은 곽재우 = 175 신선술, 건강과 불사의 비결 _『순오지』 신선 수련술과 단학 = 181 신선을 만난 정우복 = 186 불사의 사람들 1 - 맷돼지 노인과 목객 = 192 불사의 사람들 2 - 새인간과 털여인 = 194 마음으로 병을 고치는 태백 진인의 비결 = 196 택당 선생 수련법 = 197 조식법 = 199 탄진법 = 200 도인법 = 201 대추씨와 호두 알맹이 = 202 마을 노인이 들려준 민중의 이야기 _『명엽지해』 농짝에 갇힌 사또 = 205 거울 때문에 = 209 떡은 다섯 개 = 212 수양 매월은 먹 이름 = 241 거웃 한 오라기 나누어 갖기 = 216 스님이 먹어 봐야 먹은 거지요 = 219 약속을 저버린 두 선비 = 221 그렇지, 나는 누이가 없지! = 223 이마를 만지면 상객 = 225 골동 좋아하다 거지가 된 사람 = 226 첫날밤 신부의 내숭 = 228 방귀 뀐 사람은 나 = 229 다리 없는 신부 = 231 너무나 노련한 신랑 = 232 며느리보다 더한 시어머니 = 233 아가, 몸을 돌려라 = 236 생니가 한 자루 = 238 서답이 아니라 모자 = 241 바둑에 미치면 = 244 엉터리 과거 시험 = 246 치마끈 푸는 소리 = 249 너무 짜요 너무 짜 = 250 다리 아래의 방 = 251 미련한 종놈 = 252 연중행사 = 253 해설 = 255 홍만종 연보 = 274 작품 원제 = 276 찾아보기 = 2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