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0 | 00684camcc2200229 c 4500 | |
| 001 | 000045679267 | |
| 005 | 20120109105831 | |
| 007 | ta | |
| 008 | 110511s2011 ulk b 000c kor | |
| 020 | ▼a 9788964471432 ▼g 93200 | |
| 035 | ▼a (KERIS)BIB000012408625 | |
| 040 | ▼a 242014 ▼c 242014 ▼d 244002 | |
| 082 | 0 4 | ▼a 230 ▼2 22 |
| 085 | ▼a 230 ▼2 DDCK | |
| 090 | ▼a 230 ▼b 2011z8 | |
| 100 | 1 | ▼a 차정식 |
| 245 | 1 0 | ▼a 신학의 스캔들, 스캔들의 신학 / ▼d 차정식 |
| 260 | ▼a 서울 : ▼b 동연, ▼c 2011 | |
| 300 | ▼a 392 p. ; ▼c 23 cm | |
| 504 | ▼a 참고문헌 : p. 381-392 | |
| 536 | ▼a 이 저서는 2008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
소장정보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1(2층)/ | 청구기호 230 2011z8 | 등록번호 151299979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성경 속 사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재해석하여 신학이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 아닌,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는 사건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저자는 이 세상의 통념화된 고상한 가치들을 ‘회칠한 무덤’으로 까발려 부정적 스캔들로 만들고, 권력의 그늘에 가려 매장된 삶의 생기를 복원·갱생하는 긍정적 스캔들의 계발을 겨냥한다. 그 이론적 방법으로 르네 지라르뿐 아니라, 가라타니 고진, 알랭 바디우, 엠마누엘 레비나스, 조르주 바타이유 등을 불러온다. 이들의 인문학적 핵심 개념을 통해 나는 신학적 메타포로서 스캔들의 차원을 그동안 신학의 대상에서 소외된,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는 중요한 주제들로 확산시킨다.
‘스캔들’의 원형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자리매김하며, 신이 있는 성전인 교회에서조차 추문이 들끓는 이 시대에, 신학의 새로운 부활을 꿈꾸며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였던 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참 뜻을 되살려낸다.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그 시대의 흉악범들을 제거하는 폭력에 걸려 넘어졌지만, 그 스캔들을 딛고 부활함으로써 역전의 스캔들의 원형이 되었다는 스캔들의 신학을 날카롭게 조형해낸다.
인류 최대의 스캔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성경을 종횡하며 이 시대에 지니는 성경 속 사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재해석하여 신학이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 아닌,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는 사건임을 드러내주는 연구서가 출간되었다.
이 시대에 유행처럼 번지는 각종 ‘스캔들’은 대개 연예계나 정계가 그 진원지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초적 욕망의 언저리를 가볍게 맴돌다가 사라지는 ‘성적 추문’의 통상적인 표현으로 운위되기 일쑤이다. 그러나 스캔들의 본래적 의미는 그렇게 가볍지도 않았고, 말초신경의 욕망에 그렇게 쉽사리 휘둘리지도 않았다. 이 어휘의 뿌리를 캐어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스칸달론’(skadalon)이라는 중요한 희랍어와 마주친다. 보통 ‘걸림돌’ ‘장애물’ 등의 의미로 풀이되는 이 어휘는 신약성서에 명사로 15회, 동사로 29회 사용되고 있다. 그 어휘가 사용되는 맥락은 다양하다. 가령, 걸려 넘어지는 대상은 대개 사람이고 고착된 세상의 체제이며, 그 동인이나 매개는 몸의 지체와 그 욕망, 언어, 음식을 비롯한 생활 관습 등이다. 그 의미 역시 부정적이며 동시에 긍정적인 역설의 구도를 보여준다. 앞서 열거한 사람과 체제에 연루된 스칸달론이 대체로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될 때 이 말은 유일하게 긍정적이다. 이 말의 동사적 의미는 본래 ‘(다리를) 절룩거리다’라는 함의를 지녔는데, 이후 ‘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으로 정착되었다. 이것이 바로 ‘스칸달론’이라는 명사가 ‘넘어지게 하는 것’, ‘걸림돌’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게 된 의미론적 배경이다.
물론 이 책에서 ‘스칸달론’을 사전적 개념과 어원론적 함의에 머물러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이 책에서는 ‘스칸달론’을 하나의 신학적 메타포로 취함으로써 성서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인문학적 관심사들을 통찰하고 그 심층의 구조를 해석하는 새로운 학문적 지평을 개척하고자 한다. ‘약’이면서 동시에 ‘독’인 플라톤의 ‘파르마콘’(pharmakon) 비유처럼, ‘스칸달론’도 양날의 검처럼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개념이다. 그 역설의 힘으로 이 개념은 신학의 제반 관심사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해석학의 미래를 개척할 만한 창조적 메타포로서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대전제이다. 요컨대, 그것은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신학의 에너지이며,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자율적 생명의 신진대사이다. 나아가 신학적 메타포로서의 ‘스칸달론’은 생활세계와 사유의 지형을 헤치면서 보듬고 억제하면서 가로지르는 정중동의 생성 원리이며, 체계의 원칙과 그 바깥의 에누리를 두루 포괄하는 담론 생산의 요체이다.
신앙의 모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아무것도 모방하지 않는 것을 온전한 신앙의 철칙으로 삼았다. 모방이 없는 욕망의 모방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위대한 스캔들이 될 수 있었던 전복적 역설의 배경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자리에 엉뚱한 짝퉁들을 잔뜩 채워놓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닮으라고 채근한다. 또 그 하나님을 닮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재촉한다. 여기에 퇴락한 21세기 스캔들의 교회사적 비극이 있다. 또한 맘몬의 자본제적 체계에 저당 잡힌 채 부흥, 성공, 축복 등 각종 간편한 구호들을 내걸고 가짜 욕망을 양산하며 그것을 모방하라고 부추기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병통도 바로 그 언저리에 걸려 있다. 문안과 소통이 없는 곳에 아무리 자기동일성의 신앙으로 충만하여 똘똘 뭉친들, 거기에 자잘한 모래 같은 스캔들의 희롱은 있을망정 추문을 전복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스캔들의 바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 세상의 통념화된 고상한 가치들을 ‘회칠한 무덤’으로 까발려 부정적 스캔들로 만들고, 권력의 그늘에 가려 매장된 삶의 생기를 복원·갱생하는 긍정적 스캔들의 계발을 겨냥한다. 그 이론적 방법으로 르네 지라르뿐 아니라, 가라타니 고진, 알랭 바디우, 엠마누엘 레비나스, 조르주 바타이유 등을 불러온다. 이들의 인문학적 핵심 개념을 통해 나는 신학적 메타포로서 스캔들의 차원을 그동안 신학의 대상에서 소외된,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는 중요한 주제들로 확산시킨다.
저자는 ‘스캔들’의 원형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자리매김하며, 신이 있는 성전인 교회에서조차 추문이 들끓는 이 시대에, 신학의 새로운 부활을 꿈꾸며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였던 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참 뜻을 되살려낸다.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그 시대의 흉악범들을 제거하는 폭력에 걸려 넘어졌지만, 그 스캔들을 딛고 부활함으로써 역전의 스캔들의 원형이 되었다는 스캔들의 신학을 날카롭게 조형해낸다.
21세기 신학의 새로운 가능성, 스캔들의 신학
이 시대에도 신학이 있는가? 있다면 자본과 결탁한 종교의 언저리를 공고히 해주는 신학은 스캔들(추문)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다시 신학이 신학으로 자리 잡으려면 무엇보다 신학은 스캔들로서 역전의 제 존재 의미를 재구축해야 할 것이다. 감각할 수 없는 하나님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말과 글로 표현해야 하는 이 신학이라는 생물은 이제 제각각의 신비주의로 무장한 도착적 주체들의 난장 가운데 혼란의 아수라를 통과해왔다. 그 한 정점이 ‘도그마’라는 표상일 테지만, 도그마의 토대는 이제 많이 헐거워진 상태에 우리는 살고 있다. 도그마는 더 이상 긍정적 미덕의 기운을 풍기지 않는다. 그것이 긍정되는 영역은 오로지 자기동일성의 신념체계로 똘똘 뭉친 극단적 근본주의 신학의 동네에 국한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에누리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익명성을 재발견해야 할 시점에서 이 시대의 신학은 스스로 게토화된 다리 밑 걸인들의 장막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추한 거주처이고 그 추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거지의 거지 됨을 드러내는 치열한 생존의 기술이듯, 신학은 스스로 스캔들이 되어 난장으로 착종된 신의 스캔들부터 폭로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바깥의 체계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워도 자기 내부와의 창조적 불화를 감내하지 못하는 학문은 아직 타자성의 비밀에 무감각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의 미래적 운명은 오래 묵은 공룡의 화석과 같은 그 가건물을 얼마나 철저하게 해체하고 그 위에서 또다시 광야의 바람을 경험하느냐가 관건이다. 그것은 애당초 안과 밖의 구별 없이 이질적인 타자들이 대책 없이 만나 교섭하고 거래하며 번역하던 원초적 교통 공간, 즉 광야와 바다의 그 뫼비우스적 공간이 어떻게 신학의 마당에 형성되느냐 하는 점과 접맥된다.
실로 이 시대는 겸손한 수사학의 망토를 걸친 신들의 이미지가 현란하게 발호하는 풍조 가운데 떠내려가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교육과 종교 시장에서 인신의 권력은 세련된 문화적 코드를 덧입고 각종 미디어에 출현한다. 그것은 매체 시대의 뚜렷한 체계로 군림하는 또 다른 계시적 변종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한결같이 근엄한 표정을 띠거나 예외 없이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성육한 말씀과 이미지를 후광으로 두른 채 곳곳에 출몰하는 유령으로 익명의 개인들과 교신하며 교감한다. 그러나 그것이 소통이 아닌 것은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을 말하고 말하지 않는 것을 제각각의 자폐된 문법 속에 듣고 또 읽어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떠다니는 이미지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신학은 이 시대에 진정한 믿음 없음을 폭로하는 번개나 화살이 되어야 한다. 그 어느 기관의 해체보다 독하고 악랄한 해체의 결기를 벼르고 세워 신을 잃은 시대에 신의 유산을 재생시키는 업무의 낯선 의미를 깨단해야 한다. 금기를 건드리는 자가 금기의 요주의 대상이 되는 항간의 이치를 뒤집어, 하나님의 낯익은 모습을 에누리의 시선으로 다시 낯설게 되돌리는 예언적 상징 행위가 신학의 이름으로 절실한 것이다.
이 시대의 신학이 게토화된 다리 밑의 장막인 것은 교회를 공동체를 떠받드는 조건 아래 챙기는 물질적 상징적 리베이트야말로 그 근본적 생존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고답적인 운신으로 옛적의 골동품을 보듬는 호사가처럼 성서를 필두로 옛적의 텍스트에 감추어진 주석적 의미를 찾는 노동에 골몰하면서 이 세상의 변화무쌍한 천태만상 가운데 스쳐 지나는 하나님의 동선은 자주 놓치고 만다. 파당적 진영의 감각에 매여 이합집산하는 무리들의 한구석에는 초라한 포즈로 이 세상의 첨단 담론과 점점 멀어져가는 신학자들이 있다. 그 사상적 속내의 한켠에는 여전한 중세적 체질로 순치된 상태에서 절대자와의 특수한 인연으로 챙기던 옛적 권위에의 향수가 곰팡내를 풍기고 있다. 교단과 교권의 위세에 눌려 신학의 얼굴은 수시로 생존의 변신술을 발휘하며 신학으로 정치하고, 정치로 신학의 위엄을 도모하는 버릇도 더욱 심화되어간다. 예수 시대에 율법을 의문(儀文)으로 삼아 그 손가락이 가리키던 대상을 놓친 채 그 손가락을 잘라 신줏단지처럼 섬기던 자들을 비판한 역사의 공력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교와 그 이론적 토대로서의 신학은 그 토대의 텍스트를 다시 의문, 곧 글자 나부랭이의 메마른 우상으로 퇴락시켰다. 이렇듯, 신학이 그 자체로 추문이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은 수두룩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이다. 하나님의 어리석고 연약한 방식이 그 스캔들의 부정성을 알면서도 기꺼이 넘어짐으로써 치열한 패배의 사건을 통해 그 스캔들의 덫을 놓은 자들에게 그것을 되돌려주는 역전의 진리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스캔들은 하나님의 지혜로써 이 세상의 윤똑똑이들을 뒤엉켜 싸우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온갖 무성한 말의 지혜를 자기 몸으로써 돌파하는 능력으로 우뚝 선 것이다. 이 시대의 신학, 이 시대의 종교 또한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닮아, 추문이 된 종교, 곰팡내를 풍기는 신학을 온 몸으로 돌파하여 역전의 진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 내용
이 책은 모두 II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총론으로 “‘스칸달론’/‘스캔들’의 역설”이라는 주제하에 새로운 신학적 메타포로서 ‘스캔들’ 개념을 정의하고 그 대안적 가능성을 타진하고 점검한다. 여기서 저자는 이 저술의 연구 배경과 목적을 압축적으로 밝히고 이 시대의 왜곡된 스캔들 문화를 비판하면서 그 기반 작업으로 희랍어 ‘(스칸달론)’의 개념을 신약성서의 용례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우리 시대는, 철학자 김영민의 표현을 빌리면, 문화(文化)가 문화(文禍)가 되는 세태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곧 문화가 그 자체로 스캔들의 부박한 틀 위에서 공전하는 물질과 욕망의 교합적 산물이라는 진단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비판적 메스를 가하면서, 스캔들의 성서적 역설이 신학적 해석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왜 신학이 ‘스캔들’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지, 스캔들이 신학과 어떻게 접속되는지, 나아가 오늘날 신학이 어떻게 온갖 부정적 스캔들의 문화를 타파하는 창조적 스캔들로 작동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색한다.
I부에서는 “신학적 스캔들의 원형”이라는 제목으로 예수와 바울의 경우를 다룬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스캔들 관련 어휘들은 대부분 예수에 의해, 또는 예수에 관해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등장한다. 따라서 신학적 메타포로서 스캔들의 원형을 이 두 인물에게서 찾으려는 시도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이 대목에서 바울뿐 아니라 신학의 대상으로만 치부된 예수를 그 수동적 해석의 틀에서 해방시켜 신학의 주체로 부각시킨다.
I부의 전체 주제하에 다루어질 여섯 장의 논문은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제기된 스캔들의 개념을 일차적으로 조명하되, 그 신학적 함의를 ‘지금 여기’의 시공간으로 끌어당겨 신학과 윤리의 맥락에서 전유한다.
I부의 1장은 “예수의 여행과 ‘교통 공간’”이라는 제목으로 다룬다. ‘교통 공간’은 칼 마르크스가 사용한 ‘교통’이란 어휘를 가라타니 고진이 재구성하여 사용한 독특한 개념이다. 그것은 안과 밖이 따로 없이 활달하게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뭇 세계 종교들이 그 태초의 기원에서 추구했던 사회적 에토스(공동체의 파토스가 아니라)의 차원을 일컫는다. 거기에는 닫힌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교통 공간의 개념을 지리적·종족적·문화적·종교적 경계를 넘어 기동력 있게 운용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활약한 예수의 여행과 포개놓고 보면 매우 흥미로운 풍경이 산출된다. 예수야말로 당시 유대인의 선민주의와 유대교 체제에서 안과 밖, 정과 부정의 경계를 집요하게 집적거리며 그것을 혁파해나간 대표적인 이단자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 몸의 동선으로 개척한 팔레스타인 일대의 여행 공간은 움직이는 ‘교통’의 표상이었고, 그 공간은 전통적 공동체의 가치를 전복시키며 예기치 않은 종교적 변혁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를 따르거나 만난 제자들이 후대에 개척한 선교적 동선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 예수의 여행에 담긴 패러다임 전환의 신학사적 의의가 얼마나 지대한지 알 수 있다.
2장에는 “스캔들과 타자의 윤리 - 예수의 어록을 중심으로”라고 제목을 붙였다. 복음서의 예수는 ‘스캔들’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어록들을 남겼다. 그중에서 대표적이고 일관된 메시지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스캔들’이 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 속으로 자멸하는 것이 낫다(막 9:42)는 것이었다. 르네 지라르는 이 구절을 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한 영혼들에게 전염되는 ‘모방적 욕망’의 차단으로 해석했지만, 예수의 본래 의도는 자기가 구축한 공동체 성원들에 대한 환대를 추동하는 데 있었다. 이는 나아가 하나님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신이라는 전통적 이해와, 언어와 물질의 사용을 통한 타인의 욕구에 대한 배려라는 윤리적 목표에 연동되어 있었다. 이처럼 예수의 스캔들 관련 어록은 언어와 물질뿐 아니라 신체와 정신, 욕망과 환경 등을 아우르는 역동적인 의미의 층위를 내포한다. 이에 대한 신학적 의미 탐색은 이른바 ‘타자의 윤리’라는 견지에서 2장의 주요 내용을 채운다.
3장은 “침묵과 절규 - 수난사화에 얽힌 이중적 스캔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구성된다. 예수의 최후에는 스스로 결단한 자발적 ‘죽음’의 요소와 당시 정치적인 역학관계 속에 가해진 ‘죽임’의 동기가 두루 섞여 있다. 죽음에 임박하여 예수는 이상한 침묵으로 자신에 대한 변론을 포기한 인상을 주지만 겟세마네와 십자가상에서는 치열한 언어와 격렬한 감정으로, 마감되는 자신의 생명을 붙들고 절규한 바 있다. 저자는 이 대립적인 모티프를 분석하면서, 수난사화에서 예수가 침묵과 절규라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자신의 죽임에 얽힌 나쁜 스캔들을 폭로하고, 동시에 그것을 용인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극단적인 탐문의 형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운명에 저항하는 또 다른 스캔들의 풍경을 신학·윤리적 맥락에서 해석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침묵과 절규가 상반되는 몸짓으로 어떻게 동일한 목적을 성취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스캔들의 이중성이 드러나는지를 규명해낸다.
1, 2, 3장이 예수를 붙들고 연구한 내용이라면, 4, 5, 6장은 기독교의 실질적 개척자 사도 바울의 신학에 물꼬를 댄 것들이다. 먼저 4장의 제목은 “스캔들을 제거하는 스캔들 - 로마서와 외교적 그리스도론”이다. 로마서 역시 두 종류의 스캔들을 말한다. 바울이 “보라 내가 ‘스칸달론’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9:33)고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 그 해석적 맥락에서 이 스캔들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반면 그가 “우리가 다시는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스캔달론’을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롬 14:13)고 말할 때, 그 스캔들의 내용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다. 로마 교회의 당시 상황에 비추어 그것은 지식 있는 강한 교인들이 지식이 없는 약한 교인들에게 ‘자유’를 앞세워 음식 관습의 차이를 차별로 만들고 거기서 우월한 위상을 확보하려는 인정 욕구와 권력에의 의지였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 예수라는 스캔들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이교도), 유대인 그리스도교도와 이방인 그리스도교도, 나아가 로마 교회와 그 외부의 다른 교회들 사이에 가로놓인 잠재적 또는 현실적 스캔들을 제거하는 고도의 외교적 수사를 발휘한다. 그 수사가 그리스도론의 신학적 맥락에서 소통되고 있다는 점에서 ‘외교적 그리스도론’이라 불릴 만하다.
이 논의의 연속선상에서 이어지는 5장은 고린도 서신을 매개로 “스캔들을 내파하는 스캔들 - 고린도 서신과 십자가의 지혜”라는 주제를 다룬다. 고린도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를 향해 ‘스칸달론’이라 규정한다. 그것은 세상의 수사적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과 표적을 내세우는 자들 모두에게 두루 스캔들로서 역행하며 그들의 그러한 위대한 가치를 단박에 전복시키는 하나님의 어리석은 구원 방식이다(고전 1:23). 바울은 이 십자가의 스캔들로, 갈라디아서에서 ‘할례의 복음’을 대적했듯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는 갈등선상에 놓인 교회의 분파와 대립적 혼란을 겨냥한다. 그 혼란이 바울의 사도적 리더십과 신뢰까지 훼손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십자가의 스캔들은 교회 내부의 그 복합적인 스캔들을 과감하게 돌파해나가는 전위적 해결사로 기능했다. 그러한 화해와 일치의 사역은 일부 유화적인 외교적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서신을 통틀어 대체로 ‘투쟁적인’ 태도로 견지된다. 이와 같은 스캔들에 의한 스캔들의 투쟁 과정에서 바울은 정파적 갈등, 교리적 문제, 관습적 혼선, 생활 윤리적 관심사 등등 다양한 주제들을 붙들고 씨름하며 십자가의 스캔들이 발휘하는 파괴적 위력을 드러낸다.
I부의 마지막 6장 “매인 몸의 나타남과 그 계시적 징후 - 빌립보서의 매트릭스”는 옥중서신 빌립보서를 중심으로 그의 수감된 몸이 감옥 밖으로 나타나 알려질 때, 특히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어떤 계시적인 징후를 드러내는지 연구한 글이다. 빌립보서를 통해 볼 때 바울의 매인 몸은 수감된 당사자의 심경에 실존적 고뇌의 파문을 야기했고, 역동적인 선교의 반응을 유발했으며, 훈계적 권위를 창출하는 동시에 호혜적 코이노니아의 강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다채로운 현상은 계시와 권위의 출처로서 특정한 상태의 몸이 지니는 매개적 기능에 대한 신학적 탐침을 유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몸의 신학이라 이를 만한 주제가 도출되거니와, 저자는 빌립보서에서 제시된 바울의 매인 몸에 대한 신학적 초상이야말로 이와 연계된 가장 적절한 사례라고 판단한다. 이 연구는 매인 몸의 나타남이 또 다른 신학적 스캔들의 공간을 확보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관점을 제공한다.
II부에는 “진화하는 스캔들의 신학: 성서와 함께, 성서를 넘어”라고 전체의 제목을 달았다. 이는 예수와 바울에 연원을 둔 신학적 스캔들의 원형을 좀더 넓은 논의의 지평으로 확산시키면서 스캔들을 견고한 신학적 메타포로 돋을새김하기 위한 테마들로 구성하였다. 이는 신구약성서에서 해당 주제와 관련된 사유의 핵심 모티프를 끌어내면서 동시에 성서 밖의 인문학적 맥락을 논의의 틀로 차용하기 위한 전략에 잇닿아 있다.
먼저 1장에서는 “금기와 향유 - 신학적 주체의 전회”라는 제목하에,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금기의 원칙과 그 욕망을 즐기며 누리고자 하는 향유의 원칙을 대립적으로 조명하며 그 신학적 근거를 탐색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구약성서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필두로 제시하는 다양한 음식의 금기, 인간관계의 금기, 인간과 특정 공간의 접촉에 관한 금기 등의 율법 조항들이 신학적 사유의 주체로 작동되어온 체제의 조직적 간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주체가 어떻게 인간의 욕망에 관대하고 그것의 향유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인문주의적 규례들로 전이되어왔는지 살펴본다. 아울러, 그동안의 역사 과정에서 금기와 향유 사이에 어떤 진보의 계기가 있었는지를 신학적 주체의 전회라는 관점에서 조명한다. 이는 자연스레 오늘날 제도권 종교에서 여전히 유통되는 금기와 향유 원리의 상호 긴장과 그 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심화된다.
II부의 2장에서는 “잠과 꿈, 그리고 불면의 신학적 의미”란 주제로 기독교 신학의 진리를 일상적 생활 감각의 차원에서 재조명한다. 일찍이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는 잠을 일상적 주체의 갱신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불면을 그 주체의 불안과 연계지어 설명한 바 있다. 고대 희랍과 유대교의 신학에서도 잠과 불면은 이러한 이중적 대립관계에서 안식과 죽음, 고통과 각성이라는 신학적 메타포로 통용되곤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가령 창세기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광야에서 노숙할 때의 그 잠과 시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하나님의 은총 어린 선물로서의 잠, 그리고 수난사화에서 겟세마네의 예수가 역설한 깨어 있음의 반제로서 제자들의 잠 사이의 신학적 거리를 조율하고, 마찬가지로 에스더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불면과 적들에게 쫓기며 불안 가운데 떨던 유랑자 다윗의 불면, 나아가 이른 새벽에 광야에서 기도하며 깨어 있던 예수의 불면 사이에 가로놓인 의미의 역동적인 측면들을 가로지르며 탐사한다. 이와 더불어,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꿈의 계시적 층위와 신학적 의미 또한 흥미로운 탐사의 요처가 될 터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해석을 통해 저자는 수면과 불면의 중첩된 리듬이 일상적 삶의 지렛대로서 그 주체를 해체·재구성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관념을 일상의 터 위에 생활인의 일리로 육화시키는 이치를 조명한다.
이어지는 3장에서 저자는 “식사와 치유, 혹은 ‘마지막 욕망’에 대한 성찰”이란 주제로 인간의 가장 끈질긴 욕망의 정체를 탐구한다. 그것은 곧 건강한 생존을 희구하는 식욕과 건강의 갈망으로 대변되거니와, 이 또한 신학적 거대 담론을 집적이며 넘어가는 참신한 스캔들의 소재가 될 만하다. 성서에는 숱하게 많은 식사의 풍경과 치유의 현장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제의적 측면과 함께 일상적 삶의 내용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그런데 그동안 그것을 유발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대한 신앙적 인식은 필요 이상으로 풍성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미미했다. 바로 이런 허방을 짚으면서 이 주제를 다룬다.
4장의 제목으로 선택된 “광야 체험의 유형과 신학적 구조”는 말 그대로 성서의 개인과 집단이 겪어낸 다양한 광야 체험을 유형별로 분석하고 그로부터 신학적 의미를 체계화하고자 하는 의욕의 소산이다. 안정된 농경생활과 견고한 도시의 체제에 대하여 광야는 스캔들의 공간이다.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거기에 내포된 역사 체험과 그 신학적 함의가 특히 그렇다. 모세의 미디안 광야 생활, 출애굽 백성의 40년간 광야 체험, 다윗과 엘리야의 광야 유랑, 그리고 예수의 40일간 광야 시험과 바울의 아라비아 행로는 그 유형별 독특성과 상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신학적 특징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발적 ‘교통 공간’으로서의 광야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뿐 아니라, 영성의 갱생과 역사의 변혁을 두루 아우르는 섭동적 탈주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서 사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이 대목에서 저자는 서구 기독교의 역사를 통틀어 광야의 신학적 유산이 어떻게 작용해왔는지, 그에 따라 기독교와 신학의 풍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접근 가능한 자료들을 토대로 거시적인 광야 신학의 밑그림을 그린다.
“고난과 희생 담론의 신학적 스캔들”로 명명한 5장은 고난과 희생이라는 신학 원리와 그로써 조장된 체계 속에 억압받고 스러져간 부조리의 그늘을 해부하는 작업으로 채워진다. 고난과 희생의 신학이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한 역사의 무대는 국가 멸망과 민족 해체의 위태로운 정황 속에서 생존의 의미를 한 가닥 살려보려는 불가피한 외곬의 현실이었다. 그때 그 신학적 체계 속에 피어난 상처투성이의 고난과 희생의 삶은 강력한 국가 체제가 보장하는 자폐적 행복과 만족의 삶을 향해 거침없는 스캔들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맥락이 소거된 채 원리로서만 유통되어온 고난과 희생의 신학 담론은 종교적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학적 변신술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예수가 질타한 ‘회칠한 무덤’의 계보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부정적 스캔들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비합리적인 조직이나 단체일수록 즉흥적 열정을 매개로 이러한 고난과 희생의 신학 담론이 무성하게 번지며, 그 부조리의 현실도 심각한 편이다. 이에 대한 신학적 비판의 필요성이 더욱 절박해지는 교회 안팎의 세태 속에 이 연구는 적절한 성찰의 기제가 될 것이다.
II부의 마지막 6장에는 “폭력적 죽음의 내력과 대안적 희망”이라 이름 붙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폭력적으로 강제된 죽음의 사례들에 대한 유형학적 분석과 신학적 해석을 가한다. 가인의 아벨 살해와 이스라엘의 이방족속 살육, 사사 입다의 친자 살해, 이방 선지자들에 대한 야훼주의자 엘리야의 종교적 집단 살육, 헤롯에 의한 집단적 유아 살해 등등 모든 폭력적 죽음의 현장에는 종교와 권력이 교차하면서 폭력의 욕망이 교착되는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복음서 저자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성전(聖戰)’이나 ‘순교’ 등으로 미화되고 또 그 자체의 신앙적 의미도 탐지되지만, 많은 경우 그런 죽음이 폭력적으로 조장되고 권력 지향적 체계의 의지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사회심리학적 차원의 문제가 짐짓 심각하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는 역설적 경구는 종교적 진리가 폭력적 죽음의 이념형으로 변하여 몽매한 열정에 사로잡힌 자들을 선동하는 저간의 세태에 대한 일침이 될 만하다. 이 또한 심각한 종교적 신학적 스캔들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종교적 신앙을 빌미로 작동하는 이러한 부정적 스캔들의 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그 대안적 희망으로 계몽과 성숙과 구원이 함께 작동하는 건강한 공생의 길을 모색한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하나님의 에누리 또는 신학이라는 스캔들”이라는 제목하에, 선행하는 모든 논의를 압축적으로 응집하고 그 핵심 논지를 정리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체계에 하나님도 은근히 허용한 에누리의 요소들을 신학적 사유의 틈새로 뚫어보려 시도한다. 이는 곧 신학이 교회라는 체계를 에누리 없이 정당화해주는 주술적 담론의 장치가 아니라 그 허방을 짚어, 우리가 진리로 주워섬기며 받들어 모셔온 많은 주류의 가치들이 기실 거대한 스캔들의 미끼였음을 고발하고 그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는 학문으로 거듭나는 제3의 길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비견되는 신학이라는 스캔들이 역사 속에 자라온 자기 몸을 해부하여 그 병폐를 진단하고 도려내는 작업에 나서야 함을 암시하는바, 스스로 스캔들의 대상이자 주체임을 선포하는 데서 이 작업은 실질적으로 가능해진다. 이 결론을 통해 저자는 21세기 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차원에서 스캔들의 신학을 주창하면서 그 전제로서 신학이 스캔들로서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되짚는다.
정보제공 :
저자소개
차정식(지은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문학사), 미국 메코믹신학대학원(M.Div.), 시카고대학교 신학부(Ph.D.)에서 공부했다. 1997년부터 현재까지 한일장신대 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신약학회 회장과 한국기독교학회 편집위원장, 21세기기독교사회문화아카데미 회장 및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30년간 전공인 신약성서학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과 배경을 연구했고,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적 유산을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 문화적 맥락에 연계시켜 소통하는 성서인문학과 비평적 글쓰기 작업에 주력해 왔다. 아울러 인문지리에도 관심을 기울여 20여 년째 기독교 성지 탐방을 비롯해 각종 역사문화 탐방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투어 가이드와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본서 『성서의 인물들』을 비롯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등 50여 권의 저서(공저 포함)가 있다.
목차
목차 책머리에 = 5 총론: '스칸달론'/'스캔들'의 역설 = 11 Ⅰ부. 신학적 스캔들의 원형: 예수와 바울 01. 예수의 여행과 '교통 공간' = 27 02. 스캔들과 타자의 윤리 - 예수의 어록을 중심으로 = 54 03. 침묵과 절규 - 수난사화에 얽힌 이중적 스캔들 = 77 04. 스캔들을 제거하는 스캔들 - 로마서와 외교적 그리스도론 = 97 05. 스캔들을 내파하는 스캔들 - 고린도 서신과 십자가의 지혜 = 121 06. '매인 몸'의 나타남과 그 계시적 징후 - 빌립보서의 신학적 매트릭스 = 142 Ⅱ부. 진화하는 스캔들의 신학: 성서와 함께, 성서를 넘어 01. 금기와 향유, 혹은 신학적 주체의 전회 = 163 02. 잠과 꿈, 그리고 불면의 신학적 의미 = 188 03. 식사와 치유, 혹은 '마지막 욕망'에 대한 성찰 = 214 04. 광야 체험의 유형과 신학적 구조 = 241 05. 고난과 희생 담론의 신학적 스캔들 = 271 06. 폭력적 죽음의 내력과 대안적 희망 = 298 결론: 하나님의 에누리 또는 신학이라는 스캔들 = 333 주 = 345 참고문헌 = 3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