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식 실험을 동반한 고현학적 글쓰기를 통해 시대와 함께 호흡하다
1977년에 출간된 최창학의 첫 작품집《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을 새로운 편집, 젊은 평론가의 새 해설과 함께《창》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이 펴냈다. 이번 선집은 첫 작품집에서'창', '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와 그 외 작품집에서'먼 소리 먼 땅','동물과 그들의 시간','하늘과 무덤','비둘기 똥'을 골라 묶어 새로운 문체와 형식을 다양하게 선보인다.
표제작 중편'창(槍)'은 1968년《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최창학의 데뷔작으로 당시 심사를 맡은 최인훈에게 “일상 의식의 흐름을 통해 비틀거리는 이 시대 젊은 정신의 궤적을 그린 보기 드문 문제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글쓰기에 대한 미적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 작품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기존 형식을 완전히 무시한 일종의 실험소설”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요즘 소설의 한 경향을 이미 40년 전에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의 문학사적 가치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에서 보듯 당대 군부 독재하의 급격한 근대화 과정의 모순을 포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평론가 장성규는 그의 이러한 글쓰기를 두고 ‘고현학적 글쓰기’라고 명명하며, 픽션에 관여하는 소설가가 동시에 논픽션에 관여하는 지식인일 수밖에 없는 ‘궁핍한 시대’에 이중의 정체성 그 길항 관계를 통해 글쓰기의 윤리적 기반을 확보하고 시대와 대면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2. 40년 전에 씌어진, 그러나 오늘 우리 현실에서 다시 읽어야 할 전위적인 작품'창'
중편'창'은 글 쓰는 행위 자체가 지니는 미적 자의식이 글쓰기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60년대 소설이라기에는 대단히 전위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이상(李常)’은 불문학 전공자로 출판사 교정원으로 살아가는데, 잘못 기록된 문자와의 대결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만큼이나 언어에 대한 인식이 첨예하다. 작품 첫머리는 번역어의 외래어 표기를 놓고 고민하는 ‘상’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 ‘상’의 언어 인식은 “외국의 알파벳과 우리의 한글 사이에서의 이러한 곤혹을 포함한, 일체의 언어라는 것에 대한 곤혹, 그러한 언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그것을 다룸으로써 그 존재 의의가 비로소 논의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다.
‘상’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구조화된 언어 시스템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당하는 인간 존재와 삶의 양태를 주시하는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결들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언어, 구조, 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즉 글쓰기란 무엇이며, 글 쓰는 주체인 ‘나’란 무엇인가를 물음으로써 우리네 삶의 허상과 이데올로기를 목격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른바 순수-참여 논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한국 문단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있어 주목을 요한다. 문학의 가치를 사회적 참여에 둘지 아니면 문학의 자율성을 지키는 데 둘지를 놓고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으로 나뉘던 당대 현실에서, 글쓰기에 대한 미적 자의식과 당대 현실과의 대면을 통합하려던 최창학의 방법론은 오히려 오늘 우리 현실에 더 적합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화자 또는 작가 자신의 서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자의식적 메타 서술,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고 보는 포스트모던적 사유가 60년대 한국에서 이미 출산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놀랍다.
3. 당대의 다층적인 현실을 기록하는 고현학적 또는 모자이크적 글쓰기
최창학은 1970년대에는'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등 일련의 모자이크적 기법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 작품들은 ‘……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단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모은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평론가 장성규에 따르면 일상의 관찰을 모자이크처럼 나열하는 방식은 작가의 특정한 세계관을 서술하기보다는 작가가 살아가는 당대의 다층적인 현실을 기록하는 데 유용하다. 바로 여기서 최창학의 고현학(考現學)적 글쓰기가 탄생한다.
그는 1970년대 군부 주도의 근대화를 이야기하는 순간 역사철학의 영역으로 사라지며,'창'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순간 추상적 무시간성의 영역으로 사라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이 둘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 감각이 작가로 하여금 고현학적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이것이 하나의 본질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삶의 구체성을 성실히 기록하여 모자이크 형식의 소설로 나타나게 한다. 최창학의 소설은 결국 쓰는 행위가 지니는 의미를 탐색하는 미적 주체로서의 행위와 당대 구체적인 삶들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탐색하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행위 간의 팽팽한 긴장의 결과인 셈이다. 이 긴장이야말로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글쓰기의 동인이며, 오늘날 그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가상에 가려진 진정한 자유란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묻는'먼 소리 먼 땅', 가상의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삶에 개입하면서 개체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확인하는'동물과 그들의 시간', 이데올로기 너머의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하늘과 무덤', ‘언어=담론=권력’의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하는 가상의 이데올로기가 현상 세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피는'비둘기 똥' 등도 고현학적 글쓰기를 통해 당대의 메커니즘 및 이데올로기를 탐색하고 전복하려 했던 최창학의 독자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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