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된 구조조정, 영속화된 삶의 불안 속에서 어떤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색하는 책이다. 우리의 불안한 삶은 ‘가난’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가난’ 하면 ‘경제적 결핍’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가난은 경제적 결핍과 관계적 결핍이 교차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저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관계적 결핍’에 주목하면서 진정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다양한 현실참여와 현장실험을 했다. 이 책은 그 길 위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사유한 흔적들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앎’과 ‘삶’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 탓에 우리는 알고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혜택(혹은 불행)을 누리고 있다.” 앎과 삶의 분리는 삶의 영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앎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다. 추방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저자는 “앎은 결코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살아온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추방과 탈주’는 일상화된 구조조정, 영속화된 삶의 불안 속에서 어떤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색하는 책이다. 우리의 불안한 삶은 ‘가난’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가난’ 하면 ‘경제적 결핍’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가난은 경제적 결핍과 관계적 결핍이 교차하는 곳에서 발생”한다(156쪽). 저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관계적 결핍’에 주목하면서 진정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다양한 현실참여와 현장실험을 했다. 이 책은 그 길 위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사유한 흔적들이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역 재개발 지구에서 생계를 꾸리던 자영업 상인들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했다. 그 ‘추방’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방, 죽음이었다. ‘생존’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내미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죽어야만 주목받는 사람들, 살아 있을 때에는 점점 고립되어 존재감마저 희미해지는 사람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궁지에 몰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들이 아닐까.
왜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묻혀 버리는 걸까. 그건 삶에서 앎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의 상품화’라는 말이 ‘지식기반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말이 된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앎’과 ‘삶’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 탓에 우리는 알고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혜택(혹은 불행)을 누리고 있다.”(168쪽) 앎과 삶의 분리는 삶의 영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앎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다. 추방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저자는 “앎은 결코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살아온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대중의 흐름─대중의 추방과 탈주하는 대중
“구조조정은 사회구조를 재편하기 위해 한 번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번의 구조조정이 이제 하나의 사회구조가 되었다. 위기는 전환의 순간에 한 번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대중들은 이제 영속적 위기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22쪽)
‘구조조정’은 1997년 IMF 위기 이후 거의 매일처럼 매스컴에 등장하는 말이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인구는 점점 늘어 전체 노동인구의 과반수를 넘어섰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수적으로 소수임에도 우리는 정규직 노동을 ‘정상’으로, 비정규직 노동을 ‘예외적이고 비정상인 것’으로 취급한다. 전체 노동인구의 30퍼센트를 넘어선 생계형 자영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그릇된 통념의 근저에는 ‘정상적 관계’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관계적 결핍감’에서 비롯된 극심한 ‘불안감’이 있다. 언제든 ‘추방’당할 수 있다는 이 불안감 때문에 그들은 내몰릴수록 더욱 필사적으로 국가와 자본에 매달리게 된다.
저자는 ‘주변’으로 내몰린 추방된 자들의 ‘불안’에서, 우리사회의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본다. “주변이야말로 어디까지 내부인지를 규정하는 척도가 가장 선명한 곳이다”(46쪽)
하지만 “주변은 또한 역설의 지대이다. 이곳은 분명 주권의 명령이 가장 선명한 곳, 주권의 정체가 가장 잘 드러난 곳이지만 또한 주권의 한계가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주권의 명령이 가장 선명한 곳은 주권의 명령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영역, 즉 외부를 이웃하고 있다.”(47쪽) 국가와 권력이 자신들의 다수적 척도를 휘두르지 못하는 곳에서 ‘추방된 자’들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주변의 안쪽이 ‘경쟁력이 우선’이라는 척도가 작동하는 곳이라면, 그 바깥은 ‘경쟁’의 관점에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욕망들이 작동하는 곳이다. 사회의 주류적, 다수적 척도에 영향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예외 중의 예외, ‘실질적 예외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2008년 여름에 일어난 촛불집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예외’에 속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추방의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공통의 언어를 갖고 있다. 추방된 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말들은 “조금씩 방전이 일어나고 있는 먹구름들”이고 “번개를 낳을 구름들”이다(74쪽). 이 말들은 일단 발설되면 네트워크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다. ‘안단테’라는 닉네임을 쓴 고등학생이 아고라에 올린 탄핵청원으로부터 100만이 한자리에 모이는 촛불집회가 시작된 것처럼 “말은 그들의 무기”이다. 저자는'혁명 앞에서의 머뭇거림 : 2008년 촛불시위의 발발과 전개'(73쪽)에서 ‘말들의 네트워크’들 속에서 출현한 거대한 소수자, 대중을 본다.
지식의 운명─앎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갑자기 출현한 거대한 소수자들, 대중을 보면서 저자는 ‘앎과 삶’의 문제, 나아가 지식인의 존재를 치열하게 고민한다. 대중들은 그들이 아는 만큼 이야기했고, 이야기한 만큼 거리를 누볐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말들을 배우고, 그 말을 다시 쏟아냈다. 지식인들이 오래 전에 버린 앎과 삶의 일치를 대중들이 보여준 것이다.
앎과 삶의 일치에 관해 고민하지 않는 이상, 지식인은 자신의 앎으로부터, 또 삶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지식인의 죽음’이란 이 ‘소외’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지식에는 삶에 대한 ‘절실함’이 없다. 수십 년을 공부했지만, 그들의 앎이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다.
반대로 대중들은 “인문학을 하는 것이 절실한데 본인들은 정작 ‘인문학 따위’에 물질적·정신적 에너지를 쓰는 걸 아까워하는”(141쪽)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다. 한때 우리를 사로잡았던 복권광고의 카피를 떠올려보자. “인생역전.” 그렇다. 그들은 역전시킬 만큼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 변화의 욕망이 그들의 가진 ‘절실함’의 강도를 말해준다. 이 ‘절실함’의 강도가 인문학과 그들이 접속했을 때 일으키는 변화의 진폭을 결정한다.
작년 초 안양교도소에서 열린 《평화인문학》프로그램에 참여한 저자는 그 ‘변화의 폭’을 실제로 보았다. “왜 우리가 여기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합니까?”(140쪽)라고 묻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석방되면 어떻게 먹고살까만을 열심히 고민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고민이 되었다”(159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먹고살까’라는 질문이 이미 ‘생존’에 제약된 질문이라면,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 속에는 어떻게 다른 삶을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앎의 빈곤이 ‘관계의 고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앎의 채움은 ‘관계의 풍요’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앎’을 통한 ‘삶’의 구원이 아닐까?
더불어 “왜 우리가 여기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현장에 ‘참여’한 지식인을 배움의 장으로 이끈다. 여기서 지식인은 선생이 아니라 학생이 된다. 왜냐하면 그 질문을 통해 그는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삶의 장면[場]이 나타나는[現]” ‘현장’의 문제와 인문학의 구원적 기능에 대해 고민하면서 강의를 진행해 간다. 질문과 질문이 오가면서 선생도 학생도 다른 변화 속으로 진입한다. 《평화인문학》프로그램 속에서 저자와 재소자들은 강렬한 변화를 체험한다. 이 변화는 그들이 ‘사는 것’과 ‘아는 것’의 문제를 분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즉 앎을 통해 삶을 바꾸고 싶어 하는 ‘절실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변화의 절실함’이라는 문제는 개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변화하는 방식도 이와 똑같다. 사회를 이루는 개체들이 거대한 소수자로 등장할 때, 앎을 통해 삶을 바꾸고 싶어 하는 절실한 주체들이 될 때 사회는 변한다. 따라서 ‘앎의 해방’은 모든 해방의 조건이 된다.
운동의 선언─어떤 미래가 우리 안에 있는가
앎과 삶의 분리는 지식이 상품이 되는 순간 일어난다. 지식이 상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식을 파는 대신 지식을 ‘선물’하면 된다. 저자가 활동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슬로건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주십시오!”이다.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관계구성방식이 ‘무엇이든 화폐로 계산하고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관성과 법칙 밖으로 나올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꾸고,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시민들 사이의 지적인 공감이 중요합니다. 아니 공감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지적인 소통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면 족합니다.”(3부 운동의 선언 '시민지식네트워크를 위한 독서 프로젝트', 205쪽)
누구에게도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는 사람들끼리는 ‘공감’과 ‘소통’이 그 자체로 선물이 된다. 왜냐하면 그때서야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얻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앎’은 ‘삶’을 구원하는 무기가 된다.
우리 시대의 ‘앎’은 어디서 태어날까? 그것은 어떤 천재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도, 지배 엘리트에 의해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지식은 네트워크 속에서 태어난다. “선언컨대 이제는 대중이 지식의 신체이고 대중이 지식을 생산하는 지성이다.”(199쪽) 대중은 단순한 개개인의 집합체가 아니다. 대중은 거대한 ‘네트워크’이다. 광장에서, 인터넷에서 서로 연결된 사람들의 두뇌가 우리 시대의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 그곳에서 서로에게 앎을 선물하는 이들은 “회사원인 채로, 농부인 채로, 학생인 채로, 예술가인 채로, 교수인 채로 지식의 생산과 소통에 참여”한다. 정말이지 지금 시대엔 “아카데미도, 지식인도 없지만, 가르치고, 배우고, 묻고, 읽고, 쓰는 일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일어난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순간,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순간 대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다.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가 확대될수록 우리의 능력도 점점 커진다.
이 책의 3부는 “모두 함께, 다만 고병권의 이름을 빌려” 쓴 ‘선언들’로 채워져 있다. 이 선언들 속에서 우리는 삶의 온갖 목소리들이 소통가능한 ‘말’로 재생산되는 모습을 본다. 희망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삶에서 추방당하는 삶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연대하는 대중들 속에서 새로운 앎이 탄생하는 순간, 우리의 미래는 이 순간들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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