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에 관한 사료를 꼼꼼히 찾고, 그 잘려나가고 왜곡된 부분을 엄밀한 눈으로 조명한 책이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 무엇보다 ‘역사 그대로’의 천추태후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천추태후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그녀를 칭하던 여러 이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천자와 다름없는 권위로 뭇 남성들을 호령하며 고려를 통치한 여걸 천추태후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여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을 철저하게 계승하려 했다.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전통 문화의 회복, 외래문화의 폭넓은 수용, 평양 중시 정책 등은 고구려처럼 강대한 고려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특히 국풍을 강조하면서도 외국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았을뿐더러 그들을 활용하려는 실용적 사고방식을 견지했다. 과거시험의 체계화 역시 천추태후대에 이루어졌다. 이런 천추태후의 정책은 사후 현종과 덕종, 정종을 거치며 점차적으로 이루어져 가더니 마침내 문종 때 온전히 실현되었다. 여성이 통치하는 이상향을 만들려던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그 시도만으로도 후대 여성들에게 은밀한 꿈을 주었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마지막 여제 천추태후, 천년 잠에서 깨어나다
―역사 그대로의 천추태후를 말하다
지금껏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대개 여성은 흥미 위주로 다루어지거나 남성의 부산물쯤으로 여겨지는 게 관례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등 신라의 여왕들도 왕위를 계승할 남성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왕이 되었을 거라 추론하기도 하며, 시기와 암투의 대상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이것이 그간 역사가 다루는 여성의 현주소였다면, 최근에는 왜곡되고 생략된 여성의 역사를 조명하는 작업들이 심심찮게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의 절반을 담당해 온 여성에게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거기에다 유독 올해는 ‘여왕의 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각 방송사에서 드라마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천년이라는 긴 잠에서 깨어나 우리에게 다가온 여인이 있으니, 바로 ‘천추태후’다. 드라마 제목이 되고서야 그 존재를 알리게 된 천추태후는 남다른 삶의 자취를 남겼음에도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었다. 그녀는 지금 우리 앞에서 활과 검을 휘두르며 자신을 각인시키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실제 천추태후의 모습일까?
천추태후에 관한 사료를 꼼꼼히 찾고, 그 잘려나가고 왜곡된 부분을 엄밀한 눈으로 조명한 책《천추태후, 역사 그대로》(김창현 지음)가 출간되었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 무엇보다 ‘역사 그대로’의 천추태후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즘 천추태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드라마 방영과 더불어 관련 서적이 출판되고 있다. 그녀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반갑지만 지나친 허구는 문제다. 지도자는 표정과 머리와 가슴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면 되지, 꼭 무사처럼 무술의 달인일 필요는 없다. 여성 지도자는 더욱 그러하다. 천추태후 관련 자료가 많이 왜곡되어 있기에 반드시 재해석은 필요하지만 기록과 유물에 근거한 해석이라야 한다.
-들어가며 중에서
숭덕궁비, 응천태후, 헌애태후……천추태후는 누구인가
천추태후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그녀를 칭하던 여러 이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삶은 불리던 이름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건국 초기 호족과 공신의 권력투쟁으로 말미암아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러다 제6대 성종 때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성종의 뒤를 이어 조카인 목종(제7대)이 보위에 오른다. 목종의 부왕은 경종(광종의 아들)으로 오래 전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성종의 누이인 응천태후, 즉 천추태후였다.
사실 천추태후와 경종은 사촌지간이었다. 고려 황실은 근친혼이 많았고, 특히 왕족 여성은 왕실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경종은 사촌관계인 천추왕비,헌정왕비 자매와 혼인하게 된다.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자매에 대해 둘 중 누가 손위냐의 문제로 이견이 분분하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잃지 않는다.
헌정왕비는 과부가 된 후 숙부와 사통해 현종을 낳았다. 이는 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불륜이므로 이를 감추기 위해 헌화사비문 중 현종의 어머니, 즉 헌정왕비 관련 부분은 왜곡되었을 수도 잇다. 비문에는 부모의 생년과 사마 시 연도?나이가 언급되는 게 정상적인데 현화사비 비분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자姉’도 불륜을 감추기 위해 ‘매妹’를 왜곡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헌정왕비의 출생 서열이 형제들 사이에서 어디에 위치했는지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격랑의 자매〉중에서
경종과 결혼한 천추태후의 아들을 ‘숭덕궁의 적남(적자)’이라 칭했으므로, 태후가 되기 이전에는 숭덕궁비(숭덕궁왕비) 혹은 숭덕궁부인으로 불렸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목종이 즉위하면서 숭덕궁비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웅대한 존호를 받게 된다. “천명에 응해 신성함을 열어 고요하고 맑은 덕을 지닌 왕태후”라는 뜻이었다. 이 존호는 단순한 명예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드높은 위상을 담고 있다. 특히 천명에 부응했다는 의미인 ‘응천應天’은 천자 내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칭호였다. 그러니 목종의 모후 숭덕궁비는 천자(황제)와 다름없는 위상을 지니고 국왕 목종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응천태후’라 불리며 이미 장성한 아들 목종을 대신해 섭정했다. 바야흐로 응천태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시 그녀를 부르던 다른 이름이 ‘천추태후’다. 그녀가 천추궁(천추전)에 거처하며 섭정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녀를 천추태후라 불렀다. 즉 그녀의 공식 칭호는 ‘응천태후’, 애칭 내지 속칭은 ‘천추태후’였던 것이다. 목종 때 정책은 목종과 관부의 이름으로 행해졌더라도 대개 천추태후가 결정한 것이었다. 천추태후는 연인 김치양과 함께 고려를 통치했다.
그녀를 ‘천추태후’라 부르기보다 ‘응천계성정덕태후’, 줄여서 ‘응천태후’라 부르는 편이 그녀의 드높은 위상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그녀를 응천태후라 불러주기로 하자.
-〈응천태후의 시대〉중에서
목종 치세 12년간 천하를 호령하던 천추태후는 조카 대량원군 순(헌정왕후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는 정적들을 물리치지 못해 권좌에서 내려온다.
고려 초기인 목종 12년(1009) 정월, 개경의 대궐에서 연등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추궁 옆 기름 창고에서 불덩어리가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천추궁까지 태워버렸다. 응천태후 정권에 반대하는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 목종은 대궐 내전에 유폐되었다가 유배 길에 살해당하고, 12년 동안 목종을 대신해 천하를 호령하던 응천태후는 고향인 황주에 유배된다. 응천태후의 조카인 대량원군이 제8대 현종으로 즉위했다.
-〈프롤로그〉중에서
이후 현종 20년 정월 숭덕궁에서 66세의 나이로 붕어한다. 시호는 현종 정권에 의해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라 정해졌고 시신은 유릉幽陵에 묻혔다. 이렇게 해서 천추태후는 ‘헌애태후’로 역사에 남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애哀’, 즉 ‘슬픔’이 들어간 시호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때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며, ‘헌애태후’는 현종 정권의 일방적 시각을 담고 있으니 그녀를 부르는 칭호로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잃어버린 여제, 천추태후 시대를 복원하다
천추태후의 인재등용 정책의 최고 수혜자였던 최충은 “그녀가 음탕하게 행동하고 보위를 빼앗으려 했다.”고 비난했다. 이렇게 남성 중심의 ‘유교’는 연인 김치양을 빌미로 천추태후를 음탕한 여자로 덧칠해 간다. 당시 고려에서는 남녀간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웠으며, 이혼과 재혼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후 역사는 현종의 치세를 찬양하며 천추태후를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된다. 천추태후는 여성으로서 패자인 반면, 현종은 남성이자 승자였다. 최충과 이제현 등도 남성우월주의 사상인 유교를 신봉하는 유학자였으니, 그들의 기록에서 천추태후는 음탕하고 악랄한 여자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일대기를 ‘본기’라 하고, 제후의 일대기를 ‘세가’라 한다. 황제국 체제에서 살았던 고려의 김부식은《삼국사기》에서 삼국의 임금을 본기로 다루었다. 중국의 여태후는 황제에 오르지 않았지만 황제의 위에서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했고, 무측천은 황제의 위에서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다가 아예 자신이 새로운 황조를 열고 황제에 올랐다. 그래서 사마천의《사기》는 여후를 황제로 간주해 여후본기를 실었고,《구당서》와《신당서》는 무측천이 황제가 되기 이전과 이후를 망라해 측천본기를 실었다. 그러하니 임금 위에서 고려를 통치한 응천태후는 역사서에 목종 일대기 대신에 응천본기로 실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제후국 체제인 조선의 초기에 편찬된《고려사》는 고려 임금을 세가에 실었을 뿐만 아니라 목종세가를 마련한 반면 응천태후를 후비전에 경종의 배우자들 중의 한 명으로 조촐하게 실었다. 조선의 남성 유학자들은 중국의 남성 유학자들보다도 여성의 권력을 증오했던 것일까? 응천태후는 남성의 역사에서 버림받았다.
-〈천추태후의 유산〉중에서
이와 달리, 천자와 다름없는 권위로 뭇 남성들을 호령하며 고려를 통치한 여걸 천추태후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여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을 철저하게 계승하려 했다.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전통 문화의 회복, 외래문화의 폭넓은 수용, 평양 중시 정책 등은 고구려처럼 강대한 고려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특히 국풍을 강조하면서도 외국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았을뿐더러 그들을 활용하려는 실용적 사고방식을 견지했다. 과거시험의 체계화 역시 천추태후대에 이루어졌다.
이런 천추태후의 정책은 사후 현종과 덕종, 정종을 거치며 점차적으로 이루어져 가더니 마침내 문종 때 온전히 실현되었다. 여성이 통치하는 이상향을 만들려던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그 시도만으로도 후대 여성들에게 은밀한 꿈을 주었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 책의 저자 김창현은 앞선 저작《5백년의 리더십 광종의 제국》,《신돈과 그의 시대》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고려사에 천착해 온 학자다. 이런 학자의 손에서 나온 결과물답게 섬세한 시각과 균형 잡힌 통찰은 천추태후 시대를 가감 없이 펼쳐 보인다. 고려의 정치, 사회, 왕실 풍속, 대외 관계 등을 실감나게 되살릴 뿐만 아니라, 거란과의 전쟁을 비롯한 파란 많은 역사와 당대를 살아간 지식인들의 면모까지 재해석하여 독자들을 그 시대의 구중구궐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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