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한국학연구총서' 94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이진한 교수의 고려시대 송상왕래 연구. 고려시대에 해마다 수백 명의 송상이 고려에 와서 무역하였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책머리에]
이 책은 고려시대에 해마다 수백 명의 송상이 고려에 와서 무역하였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것이다.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는 일은 지금도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도 바다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배는 위험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의식은 다음의 대중가요 가사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아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바다가 육지라면>의 1절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믄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가슴 아프게>의 1절
두 곡의 소재는 모두 남녀의 이별인데, 바다와 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임과 함께 배를 타고 가도 되고, 다음에 오는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면 될텐데, 굳이 따라가지 않고 애꿎은 바다와 배 탓을 하고 있다. 헤어진 사람은 임을 따라 갈 수 없게 했다고 바다를 원망하지만, 정작 원망의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난 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잘 맞지 않는 가사는 육상교통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바다와 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작사가의 애절한 노랫말은 바다는 걸어서 갈 수 없는 단절된 곳이라는 대중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고, 교통망이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시대 사람들의 바다와 배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송에 가는 사신이 되어 1081년 4월에 方物을 바치고 송의 황제가 醫藥을 내려준 것을 謝禮하러 가던 崔思齊가 배 위에서 지은 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늘과 땅에 어찌 경계를 그으리오만, 天地何疆界
산과 강물에는 스스로 같고 다름이 있도다. 山河自異同
그대는 송나라가 멀다고 말하지 말라, 君毋謂宋遠
고개를 돌리면 한 돛 바람에 가네 回首一帆風
??補閑集?? 권상
최사제는 서해 건너 편에 있는 송나라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돛 바람에 가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고려 사람들은 국내를 여행할 때도 배를 편리하게 이용하였다. 배를 타고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간 뒤, 배에서 내려서 말을 타거나 걸어서 원하는 곳까지 갔다. 당시에는 물길이나 바닷길은 다소 위험하지만 幹線이었고 뭍의 길은 그것을 연결하는 支線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교통수단이었던 배를 타는 최사제가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최사제가 송에 갈 때 탔던 배를 운항해준 사람은 고려 海商이 아니라 고려를 왕래하던 송상이었다. 송상은 고려와 무역을 위해 왕래하면서 양국을 오가는 사절이나 인물을 태워주고 대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최사제 일행은 송상의 배를 이용한 고객이었다. 이처럼 송상들의 활동이 활발해서 많은 송상이 자주 고려를 찾아왔다는 것은 선학의 연구에 의해 널리 알려졌고, 거의 모든 교과서나 개설서에 그러한 사실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성과를 기본적으로 계승하여 ‘더 많은’ 송상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매우 자주’ 고려에 왔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매해 송상이 고려에 와서 항상 송상이 고려에 있었다는 것을 규명하였다. 송상이 많이 왔다는 것과 송상이 더 많이 자주 왔다는 것은 송상왕래의 양적인 차이에 불과하지만, 고려에 언제나 송상이 있었다는 것은 송상왕래의 질적인 차이를 의미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무역사에 대한 기존의 견해는 상당히 수정되어야하며,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도 있다.
고려가 성종대 이후 고려인들의 해상 무역을 금지하면서도 송상의 고려 무역을 규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상이 자주 고려에 오게 되고 그들이 항상 고려의 禮成港과 唐商館이라고도 불리던 開京의 客館에서 활동하게 되자, 東女眞·西女眞·黑水靺鞨·日本·耽羅―고려에 복속되기 전―와 같은 주변 국가와 민족들이 고려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고려 국왕에게 官階나 武散階를 수여받고 回賜品을 얻는 것 뿐 아니라 자신들이 머물던 객관 바로 옆에 있던 송상의 객관에서 교역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려와의 외교를 통해 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아울러 송상과 무역하였다.
이에 고려를 비롯하여 송·흑수말갈·동서여진·일본·탐라가 연결되는 동북아 지역 交易網이 이루어졌다. 고려 상인들이 해외에 나가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고려의 정책으로 인해 송상에게 서해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지만, 송상이 고려에 자유롭게 와서 무역하는 것을 허용하므로써 고려는 동북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예성항은 租稅와 貢物을 실은 漕運船과 각 지방에서 생산하여 개경에서 소비되는 物品을 실은 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에 송상이 있었다면, 그 배의 선원들은 일을 마치고 지방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송상과 교역하여 되돌아갈 수 있었다. 송상은 굳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 않고 예성항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려 국내 상업망의 한 가운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송상이 고려 사람들에게 판매한 것은 화려한 비단, 높은 수준의 예술품, 불교와 유교의 典籍 등이었다. 이것들이 고려에 수입되는 것은 곧 당대의 최고 기술과 지식이 전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고려 사람들이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 청자와 대장경과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송상을 통해 상시로 세계 최고 수준의 송나라 인쇄술과 자기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설은 차후 사료를 통해 충분히 실증이 되어야할 과제인데,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송상이 고려에 항상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국내외 교역이 모두 필연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연적 교환이어서 교역이 활성화되기 어렵다.
이제 보잘 것 없는 책을 내면서 고마움을 전할 이들이 있다. 그 동안 高麗時代 對宋關係史의 연구는 宋나라 時期의 방대한 문헌 자료를 보기 어려워서 거의 대부분 송대사 전공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최근에 ??宋代麗史資料集錄??(張東翼, 서울대출판부, 2000)과 ??十至十四世紀中韓關係史料匯編??(楊渭生等編著, 學苑出版社, 2002) 등의 고려와 관련된 송대사 자료집이 발간되면서 한국사 전공자들도 사료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필자는 중국어 해독 능력이 부족해서 전자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이 사실을 밝혀두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도리일 것 같다.
아내 朴胤珍은 원고를 작성할 때마다 좋은 조언으로 완성도를 높여주었고, 미술과 역사를 좋아하는 딸 李東疇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려대 대학원 고려시대사 전공 학생들은 사료에 대한 꼼꼼한 교정으로 이 책에 실린 사료의 신뢰도를 높이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경인문화사의 문영주 씨는 책을 잘 꾸며주었을 뿐 아니라 복잡한 교정 지시 사항을 완벽하게 이행해주었다.
이 모든 이들과 더불어 무역사 연구의 계기를 마려해준 재단법인 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 연구를 지원해준 한국연구재단, 표지 사진을 제공해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등에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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