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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 | ▼a 895.2409 ▼b 2014 | |
| 100 | 1 | ▼a 王國維, ▼d 1877-1927 ▼0 AUTH(211009)143990 |
| 245 | 1 0 | ▼a 송원희곡고 역주 / ▼d 왕국유 지음 ; ▼e 오수경 옮김 |
| 246 | 1 1 | ▼a (A) study of drama of Song and Yuan dynasty |
| 246 | 1 9 | ▼a 宋元戱曲考 |
| 246 | 3 | ▼a Song Yuan xi qu kao |
| 260 | ▼a 서울 : ▼b 소명출판, ▼c 2014 ▼g (2015) | |
| 300 | ▼a 597 p. : ▼b 삽화(일부천연색), 초상화 ; ▼c 24 cm | |
| 440 | 0 0 | ▼a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p 동양편 ; ▼v 267 |
| 500 | ▼a 부록: 원대 희곡작가 소전 | |
| 504 | ▼a 참고문헌(p. 38-39)과 색인수록 | |
| 536 | ▼a 이 책은 2001년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
| 650 | 0 | ▼a Chinese drama ▼x Song dynasty, 960-1279 ▼y History and criticism |
| 650 | 0 | ▼a Chinese drama ▼x Yuan dynasty, 1260-1368 ▼y History and criticism |
| 700 | 1 | ▼a 오수경 ▼g 吳秀卿, ▼d 1957-, ▼e 역 ▼0 AUTH(211009)92685 |
| 900 | 1 0 | ▼a Wang, Guowei, ▼e 저 |
| 945 | ▼a KLPA |
소장정보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5.2409 2014 | 등록번호 111723884 (4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2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5.2409 2014 | 등록번호 511027435 (2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3 | 소장처 과학도서관/Sci-Info(1층서고)/ | 청구기호 895.2409 2014 | 등록번호 521003551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4 |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2층)/ | 청구기호 895.2409 2014 | 등록번호 151326669 (1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5.2409 2014 | 등록번호 111723884 (4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2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5.2409 2014 | 등록번호 511027435 (2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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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1 | 소장처 과학도서관/Sci-Info(1층서고)/ | 청구기호 895.2409 2014 | 등록번호 521003551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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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1 |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2층)/ | 청구기호 895.2409 2014 | 등록번호 151326669 (1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소명출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267권. 왕국유는 중국 희곡분야에서 서구 근대학문의 방법과 시각을 도입하여 근대적 희곡 연구의 길을 열고, 역사적 안목으로 희곡사라는 학문 영역을 확립한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중국의 석학이다. 왕국유의 학문적 성과는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역작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송원까지의 희곡사인 <송원희곡고>인데 이 책은 그의 새로운 연극사 관점과 학문 방법론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술이다.
송원희곡의 흐름에 대해 단순한 사료 정리와 기술을 넘어 왕국유가 고적더미에서 직접 찾아낸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독자적이고도 엄정한 고증을 거쳐 객관적이고 독창적인 연구 결과를 선보인 <송원희곡고>가 어느새 탄생한 지 한 세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국내 중국희곡 연구의 권위자인 오수경의 꼼꼼한 역주를 단 <송원희곡고 역주>가 출간되었다.
중국희곡 연구의 정점
왕국유는 중국 희곡분야에서 서구 근대학문의 방법과 시각을 도입하여 근대적 희곡 연구의 길을 열고, 역사적 안목으로 희곡사라는 학문 영역을 확립한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중국의 석학이다. 왕국유의 학문적 성과는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역작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송원까지의 희곡사인 <송원희곡고>인데 이 책은 그의 새로운 연극사 관점과 학문 방법론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술이다. 송원희곡의 흐름에 대해 단순한 사료 정리와 기술을 넘어 왕국유가 고적더미에서 직접 찾아낸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독자적이고도 엄정한 고증을 거쳐 객관적이고 독창적인 연구 결과를 선보인 <송원희곡고>가 어느새 탄생한 지 한 세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국내 중국희곡 연구의 권위자인 오수경의 꼼꼼한 역주를 단 <송원희곡고 역주>(소명출판, 2014)가 출간되었다.
중국희곡이 눈을 뜨기까지
<송원희곡고>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은 상고시대부터 오대에 이르는 연극의 흐름이다. 즉 중국연극의 기원을 밝히고 후대 중국전통극 양식의 기초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드러내는 것으로 왕국유는 무격巫覡: 무당과 배우俳優:광대라는 중국연극의 양대 주체를 도출해냈다. 이는 이후 중국연극사 인식에서 무격의 가무와 배우의 소학이라는 양대 계통이 형성되는 획기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한 한대의 각저희角抵戱를 포함한 가무백희歌舞百戱로부터 '동해황공東海黃公', '답요랑踏謠娘' 등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무로써 이야기를 연출하는’ 중국 전통극의 정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원 잡극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송금 시기의 각종 연희 양식들에 대한 고찰을 수행한다. 왕국유는 송금 시기에 소희들로부터 각종 가무희, 골계희, 소설잡희가 발달하고 융합하여 본격적으로 성숙한 희곡 양식이 형성된 것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송 잡극이 소설과 잡희의 영향을 받아 스토리와 극적 구조 및 연극적 표현 양식을 보강하게 되고, 송의 악곡들을 수용하여 적절한 음악 형식을 갖추게 됨을 살폈고, 송금대의 실제 공연 극목 자료인 관본잡극단수와 원본 명목을 통해 이러한 양상을 증명해 내고 있다.
중국희곡 전성기, 원대의 희곡
그러나 왕국유는 진정한 희곡의 출현은 원대에 이루어졌으며 원 잡극이야말로 중국희곡의 정점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원 잡극의 연원, 시기, 지역, 작품, 전승, 구조, 문학성까지 다양한 영역의 고찰을 진행하였으며 4단락의 구성에 절마다 일정한 음악형식을 갖춘 안정된 구조를 확보하고 드디어 연극적 언어인 대언체를 사용한다는 점을 원 잡극을 성숙한 연극 양식으로 보는 근거로 거론한다. 더불어 원 잡극의 시기를 몽고시기蒙古時期, 일통시기一統時期, 지정시기至正時期로 구분하고, 문학비평의 관점에서 ‘자연스러움自然’과 ‘의경이 있음有意境’으로 원 잡극의 문학적 성취를 평하는 등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견해를 선보였다.
왕국유는 원 잡극의 가치를 인정한 만큼 원의 남희南戱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찰을 행했다. 원 잡극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움’과 ‘의경이 있음’이라는 평어를 통해 같은 원대 문학으로의 소박한 생동감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남곡의 곡명을 분석해보면 원 잡극보다 고곡에 연원을 둔 것이 더 많다는 고증으로부터 ‘남희의 연원이 원 잡극보다 더 이를 수도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여 견해의 균형을 잡는다.
철저한 고증을 통한 독창적 연구
왕국유는 <송원희곡고>를 통해 원대의 연극을 중국희곡의 정점으로 놓은 연구 결과를 선보이고, 더불어 중국희곡의 용어들에 대해 설명하며 원대 희곡 작가들의 간략한 전기를 서술했다. 또한 서구 학문의 영향을 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조씨고아' 등 중국희곡의 해외 전파에 관해서도 고찰했다. 왕국유는 이런 독창적이고도 확고한 관점을 엄청난 기초 자료 확보와 철저한 문헌 고증을 통해 세상에 내놓았다.
<송원희곡고>는 오래 주목받지 못하던 중국희곡의 영역을 새로운 관점과 전통 고증방법을 접목하여 새로운 학문 영역으로 개척해 낸 공로가 크다. 역자는 선생의 전통적 고증 방법의 면면과 관점의 참신함을 드러내고자 단순한 지식 차원의 역주가 아니라 30여 년에 걸친 중국희곡 문본 연구와 중국 방방곡곡을 발로 누비며 행해 온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경험과 확신을 담은 역주를 글 사이사이 꼼꼼히 집어넣었다. 또한 매 장마다 원 잡극이 아닌 남희 연구자, 중국학자가 아닌 외국학자로서의 역자의 비판적 시각이 담긴 해설을 덧붙이고 송원희곡에 대한 생생한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도판들을 실었다.
가장 새롭고도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위대한 발견은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단단한 기초와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고리타분함 속에서 꽃핀다. 왕국유의 <송원희곡고>에는 중국희곡에 대한 연구 결과뿐만 아니라 이러한 연구를 탄생시킨 학문적 방법론이 곳곳에 배어있다. 역자가 그랬듯 독자들도 <송원희곡고>를 통해 중국희곡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는 것은 물론이고 그 연구를 넘어선 새로운 학문의 장을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정보제공 :
저자소개
왕궈웨이(지은이)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백우(伯隅) 등이고 호는 예당(禮堂)이며, 만년에는 영관당(永觀堂)이라고 했다가 관당(觀堂), 영관(永觀)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는 철학, 미학, 문학, 희곡사, 갑골문, 금문(金文), 고대 기물, 은주(殷周) 역사, 한대와 진대(晉代)의 목간(木簡), 한위(漢魏)의 비각(碑刻), 둔황(敦煌) 문헌, 서북지리(西北地理), 몽고사 등을 연구해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왕궈웨이는 1877년(청 광서 3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진시(辰時)에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지금의 하이닝시(海寧市) 옌관진(鹽官鎭)] 솽렌항(雙仁巷)에서 태어났다. 1892년(광서 18년, 만 15세) 7월에 주학(州學)에 들어가 하이닝주(海寧州)의 세시(歲試)에 참가해서 21등으로 합격해 수재(秀才)가 된다. 이때 왕궈웨이는 그 고을에서 이름을 떨쳐 천소우첸(陳守謙), 예이춘(葉宜春), 주자요우(褚嘉猷) 등과 함께 “하이닝의 네 재주꾼(海寧四才子)”으로 불렸다. 1898년 2월에 왕궈웨이는 상하이로 가서 일을 찾던 중 친구의 주선으로 시무보관(時務報館)에 취직한다. ≪시무보≫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왕캉녠(汪康年)이 주필을 맡고 있던 유명 시사 잡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기와 교정 일을 보았다. 3월 22일에 뤄전위(羅振玉)가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가 개학하자 왕궈웨이는 왕캉녠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서 매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영어와 일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습득했는데, 주로 화학, 물리, 수학, 지리 등의 자연과학이었다.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는 평생의 후원자인 뤄전위를 만난다. 1901년, 봄에 왕궈웨이는 친구 판빙칭(樊炳淸)과 함께 뤄전위의 요청으로 우창(武昌)의 후베이농무학당(湖北農務學堂)으로 가서 농업 관련 서적과 사건들을 번역하게 된다. 이해 5월에 뤄전위는 상하이에서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를 창간해 왕궈웨이에게 주필을 맡겼다. 왕궈웨이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글과 번역문을 많이 발표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모아 ≪정암 문집≫을 출간한다. 1902년 2월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왕궈웨이는 일본에서 스승 후지타의 권유로 이과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도쿄 물리학교에 가서 수학을 공부했다.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각기병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뤄전위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여름에 귀국하고 말았다. 1903년 3월 왕궈웨이는 퉁저우사범학당(通州師範學堂)에 부임했고 1904년 말에는 장쑤사범학당에서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후지타 선생 역시 이 학교에 있었으므로 왕궈웨이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6년(광서 32년, 만 29세) 봄에 청 정부는 학부(學部)를 신설한다. 이때 뤄전위는 돤팡의 추천으로 학부에서 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식으로 참사관(參事官)이 되었다. 이에 왕궈웨이 역시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교육 세계≫의 원고를 집필했다. 1907년 봄에는 뤄전위의 추천을 받아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었고, 학부 도서관에서 편집과 교과서 등을 편역하고 심의하는 일을 맡는다. 베이징에 온 이후 대략 이 시기부터 왕궈웨이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는데, 대략 2, 3년 전, 즉 1904년경부터 이미 철학에 대해 번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상학적 염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계가 자기 자신의 견식 있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가 지속된 결과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1907년은 왕궈웨이가 철학에 대한 사상적 번민을 거친 뒤 문학을 통해 ‘직접적 위로’를 얻기 위해 사와 희곡 연구로 학술 방향을 전환한 시기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해 12월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1911년 이후부터 뤄전위가 왕궈웨이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뤄전위는 회의주의와 서양 관념의 영향으로 청조가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줄곧 인정하고 지원했던 왕궈웨이와 같은 사람이 학자적 의무로서 국학을 하기를 희망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국학 연구에 최선을 다해 보자고 권유했고 왕궈웨이는 이때부터 “이전의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경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 1916년 1월 2일 왕궈웨이는 4년 동안 머물던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6년 초에 하둔이 새로 만든 잡지 ≪학술 총편(學術總編)≫의 편집인으로 고용되어 학술 잡지를 편집하면서 교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 후 1918년부터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 교수를 겸임했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서 약 7, 8년간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학술상의 업적은 풍요로웠으니 그의 유명한 논저는 모두 이 시기에 쓰였고, 명성도 점점 높아만 갔다. 1923년 음력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양종시(楊鍾羲), 징팡창(景方昶), 원쑤(溫肅), 왕궈웨이를 모두 남서방 행주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직무는 학문 강론, 서적 조사, 시 낭송, 그림 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초안 작성을 돕거나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서방 행주라는 직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새로운 내각을 만들고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황제가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한 뒤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을 받아들여 1925년부터 칭화대(淸華大) 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칭화대학에서 왕궈웨이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연구소에서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를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그 자신의 지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후에 그는 초기 몽골 시기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 서북 변경 지리(西北邊疆地理)와 요(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연구했다. 당시 그는 학계의 거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거의 쉰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와 고대 소수 민족 문자에 정통한 소장학자 뤄쥔추(羅君楚, 당시 20여 세)와 천인커(陳寅恪, 당시 30여 세)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청화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던 그는 1926년 말엽 일련의 심각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해졌다. 1926년에 그의 장남이 사망한 데다 장례 문제로 그의 아내와 며느리(뤄전위의 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오랜 후원자인 뤄전위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27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대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고 그는 나라의 미래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인 1927년 6월 1일에 삶의 허무와 체념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오전 이허위안(頤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왕궈웨이에게 “충각(忠悫)”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오수경(옮긴이)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한중연극교류협회 명예회장. 한국연극학회 회장, 한국중국어문학회 회장 역임. 중국연극사 연구와 동아시아연극비교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한중연극교류에 종사하며 중국희곡을 번역 소개해왔다.
목차
목차 해제 : 10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읽는『송원희곡고』 = 3 저자 서문 = 43 제1장 상고시대부터 오대에 이르는 연극 = 46 제2장 송의 골계희 = 102 제3장 송의 소설잡희 = 154 제4장 송의 악곡 = 182 제5장 송「관본잡극단수」 = 238 제6장 금「원본명목」 = 269 제7장 고극의 구조 = 289 제8장 원 잡극의 연원 = 307 제9장 원 잡극의 형성 시기와 지역 = 328 제10장 원 잡극 극본의 전승 = 353 제11장 원 잡극의 구조 = 387 제12장 원 잡극의 문장 = 408 제13장 원의 원본 = 436 제14장 남희의 연원과 형성 시기 = 449 제15장 원 남희의 문장 = 486 제16장 보론 = 509 부록 : 원대 희곡작가 소전 = 533 역자후기 = 554 찾아보기 = 5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