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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 | ▼a 897.35 ▼b 심훈 상r | |
| 100 | 1 | ▼a 심훈 ▼g 沈熏, ▼d 1901-1936 ▼0 AUTH(211009)116966 |
| 245 | 2 0 | ▼a (애장판) 상록수 : ▼b 최은희·신영균 주연 우리 명화와 함께 / ▼d 심훈 지음 ; ▼e 민병덕 엮음 |
| 246 | 1 1 | ▼a Evergreen tree |
| 260 | ▼a 고양 : ▼b 정산미디어, ▼c 2012 | |
| 300 | ▼a 310 p. : ▼b 삽화 ; ▼c 23 ,cm | |
| 440 | 0 0 | ▼a 삽화본 특선 시리즈 ; ▼v 13 |
| 500 | ▼a 영화: 신상옥 | |
| 700 | 1 | ▼a 민병덕, ▼e 편 ▼0 AUTH(211009)140170 |
| 700 | 1 | ▼a 신상옥 ▼g 申相玉, ▼d 1926-2006, ▼e 영화 ▼0 AUTH(211009)102128 |
| 945 | ▼a KLPA |
소장정보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7.35 심훈 상r | 등록번호 111730958 (2회 대출)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삽화본 특선 시리즈 <애장판 상록수>. <상록수>는 심훈의 장편소설로, 농촌계몽운동을 다룬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의 시대적 풍조였던 브나로드운동을 남녀 주인공의 숭고한 애정을 통해 묘사한 작품으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애장판 상록수>에는 1961년 신필림 제작, 신상옥 감독 영화 [상록수]의 여러 장면을 내용에 알맞게 삽화로 수록하였다.
<일러두기>
① 이 책은 1952년(단기 4285년)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 ‘상록수’를 저본으로 삼았으며, 1935년 9월 10일~1936년 2월 15일(1935년 6월 26일 탈고) 127회 동아일보 연재 ‘상록수’, 1959년 민중서관 발행 ‘한국문학전집’ 17-‘상록수’, 1976년 을유문화사 발행 ‘정본-상록수’를 참조하였다.
② 이 책에 표현된 어구 자체는 원문의 분위기를 살리도록 가급적 원문대로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표기는 현용 ‘한글맞춤법’에 준하였다.
③ 주는 ( ) 안에 ??으로 표시하여 달았다. ?? 표시가 없는 ( ) 안의 주는 원문에 있는 주이다. 한자도 동일하다. ??는 표준어, ??은 일본어다.
④ 대화 중의 사투리는 가급적 원문대로 두었다.
⑤ 삽화는 1961년 신필림 제작, 신상옥 감독 명편 영화 ‘상록수’의 여러 장면을 내용에 알맞게 수록하여 독자들의 감상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해설>
‘상록수’의 공감구조
민 병 덕
1. ‘상록수’의 작자 심훈의 문학관
‘상록수(常綠樹)’의 작자 심훈(沈熏)은 19십 년 9월 12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36년 9월 16일에 작고한 소설가, 영화인으로서,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본명은 대섭(大燮)이며, 호를 해풍(海風)이라 하였다.
경성제일고보 재학시 3·1운동에 참가, 4개월간 복역하고, 상해로 가서 지강대학(之江大學)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1923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계에 투신, 이듬해에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각색, 감독하였다.
1930년에는 ‘동방의 애인’, 1931년에는 ‘불사조(不死鳥)’를 각각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1933년에는 ‘영원의 미소’, 1934년에는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1935년에는 농촌계몽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로 당선되면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이러한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35세라는 짧은 생애 때문이기도 하나 이론보다는 실행하는 작가였기에 문학론이라는 것을 별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글 여러 곳에서 그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다.
이기적인 고독한 생활을 영위하려는 것도 아니요, 또한 중세기적인 농촌에 아취(雅趣)가 생겨서 현실을 도피하려고 필경사(筆耕舍) 속에다가 청춘을 감금시킨 것도 아니다. 다만 수도원의 수녀와 같이, 무슨 계획을 꾸미다가 잡혀가서 한 십 년 독방 생활을 하는 셈만 치고, 도회의 유혹과 소위 문화지대를 벗어나 다시금 일개의 문학청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심훈은 이렇게 한창 작품 활동을 하는 중에도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자처하며 문학 수업에 열중하는 동시에 작품 활동을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내가 겨우 약관(弱冠)을 지내서 처음으로 봉직하였던 것이 동아일보요, 또한 처음으로 신문소설에 붓을 대어 다른 분이 번역하다가 버리고 간 ‘미인의 한(恨)‘과 조선서 처음으로 ‘탈춤‘이란 영화소설을 실리기도 역시 동아일보였읍니다. <중략>
소설의 내용에 들어서는 발표되는 대로 작품이 대변할 터이니까 미리 말씀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마는 겉으로 지나치게 뒤떠드는 일은 매양 명실이 상부치 못하는 법이라 졸작이 애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과히 어그러지기나 말기를 스스로 빌 뿐입니다. 그리고 창작에만 몰두하는 작가는 오직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여러분의 엄정한 비평에 귀를 기울여야 할 줄 압니다. <중략> ‘소생은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늙겠소이다. <연재 예고, 작자로부터, 동아일보, 1935.8.27.>
심훈은 이 글에서도 자신을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자처하고 있다. 심훈의 작품은 이렇게 철저한 자기 반성과 겸허한 자기 성찰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쓰기를 위해서 시(詩)를 써 본적이 없읍니다. 더구나 시인이 되려는 생각도 해 보지 아니하였읍니다. 다만 닫다가 미칠 듯이 파도치는 정열에 마음이 부다끼면 죄수가 손톱 끝으로 감방의 벽을 긁어 낙서하듯이 한 것이 그럭저럭 근 백 수나 되기에 한 곳에 묶어 보다가 이 보잘것없는 시가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심훈, 머리말씀, 신경림 편, 심훈―문학과 생애, 지문사, 1982.>
심훈은 철두철미 예술을 실천하는 정열적인 인간이었다.
심훈은 의도적으로 문학을 하기 위해서 문학을 한 것이 아니고 사물을 대하여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문학을 하였다.
·
물 위의 기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예술가의 무리는, 실사회에 있어서 한군데도 쓸모가 없는 부유층(??層)에 속한다. 너무나 고답적이요 비생산적이어서 몹시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중략> 예술가라고 결코 특수 부락의 백성도 아니요 태평성대의 일민(逸民)도 아닌 것이다. <沈熏, 朝鮮의 英雄>
심훈은 정열적인 예술가인 동시에 현실적인 실사회에 바탕을 둔, 실질을 숭상하는 문인이었으며, 독자와 같이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자기 자신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 생활을 성찰하는<윤규섭, 독자론>, 그리고 그런 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실천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문학을 이론적으로 논의하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문인이 있음을 지적하고 철저하게 현실적인 민족의 처지를 생각하고 현실에 입각하여 실제적인 문학 활동을 하는 것이 타당함을 강조한 민족주의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2. ‘상록수’의 공감구조
‘상록수’는 심훈의 장편소설로서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소설현상모집에 당선된 작품인데,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127회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농촌계몽운동을 다룬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고 작자의 문명(文名)을 일세에 떨치게 한 작품이다.<윤병로, 한국현대소설의 탐구>
이 소설은 당시의 시대적 풍조였던 브나로드운동을 남녀 주인공의 숭고한 애정을 통해 묘사한 작품으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1981년에는 일본에서도 이 책이 번역 간행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중략, 소제목만 수록>
(1) 첫째, ‘상록수’의 공감요소는 소재의 실화성이다.
(2) 둘째, ‘상록수’의 공감요소는 독자에게 관심도 높은 문제를 다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3) 셋째로 ‘상록수’의 가장 두드러진 공감요소는 기독교적 박애정신과 신앙적 호소라고 할 수 있다.
(4) 넷째로, ‘상록수’의 공감요소는 남녀간의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5) 다섯째로 ‘상록수’의 공감요소는 자기개량적이고 자기향상적인 인물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6) 여섯째로 ‘상록수’의 공감요소는 흐뭇한 정감이라고 할 수 있다.
(7) 일곱째 ‘상록수’의 공감요소는 장면의 해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8) 여덟째로, ‘상록수’의 공감요소는 현실의 환상적 표현이다.
(9) 아홉째로 ‘상록수’의 공감 요소는 구성의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10) 열째 ‘상록수’는 발표의 적시성 면에서 공감요소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3. 동아일보의 편집 태도와 현상소설모집의 성격
(1) 동아일보의 편집 태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우리 나라에는 10년 동안 매일신보(每日申報)를 제외하고는 국문신문이 없다가 1919년 3·1운동 후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3개의 한국인 발행 민간신문을 허가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동아일보로서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창간사에서 조선 민중의 표현 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를 사시(社是)로 내세웠다.
일제 치하에서는 4차례에 걸친 무기 정간을 당하기도 했고, 1920년 11월 만주의 훈춘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한국동포학살사건을 취재하러 갔던 장덕준(張德俊)이 일본군에게 피살당하여 우리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자를 내기도 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마라톤 우승을 보도하면서 손 선수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日章旗)를 말소시킨 사진을 실었다가 정간당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었다.
1930년대에는 문맹 타파와 한글 보급을 목표로 한 브나로드 운동, 이 충무공 유적 보존 운동 등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와 함께 일제의 강요로 폐간되었다가 광복 후 1945년 12월 1일 중간되었다.
창간 이후 일제 기간 동안 줄기차게 민족주의를 고양하였다.
브나로드 운동이란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의 계몽운동으로 지식계층이 민중계몽을 위해 농촌으로 파고들었을 때 내세운 슬로건 ‘브나로드’란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0년대 한국 사회는 일제의 탄압과 착취로 국민 모두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문맹자가 대다수인 농민들은 방임해 두면 가혹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식을 상실한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동아일보사에서는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여, 전국 남녀 학생들을 농촌으로 파견하여 농촌계몽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지식과 교양은 상실해 가는 민족의식 회복에 가장 큰 기초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현상소설모집의 성격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농촌계몽소설을 현상 모집하였다.
‘응모 작품의 제재와 구상은 작자에게 일임할 성질의 것’이지만 신문사의 의도가 있었던만큼 어떤 기준의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기준이 바로 응모 소설에 관한 한 신문사의 편집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응모 작품의 제재와 구상은 작자에게 일임할 성질의 것이지마는 본사의 의도가 조선농어산촌문화에의 기여에 있는지라 다음의 몇 가지에 유의해 주면 더욱 좋을까 한다.
1. 조선의 농어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채와 정조를 가미할 것.
2. 인물 중에는 한 사람쯤은 조선 청년으로서의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3. 신문소설이니만큼 사건은 흥미 있게 전개시켜 도회인, 농어산촌인을 물론하고 다 숙독(熱讀)하도록 할 것.
위와 같은 내용적 조건이 제시되었던만큼 당선 작품은 자연히 이런 원칙이 절대적으로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 신문사측은 다음과 같이 만족해하였다.
이 소설은 본사가 소설 공모를 발표할 때에 제시한 희망 조건에 모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여러 가지 점으로 근래에 보기 어려운 좋은 작품이니, 한편 농어산촌문화에 기여하고 한편 독자 여러분의 애독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문단적으로 큰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상록수’는 이리하여 신문사의 편집 의도에 의하여 태어났던 소설로서의 좋은 예가 되었다. 또 신문연재소설이 반드시 감상물(感傷物)만은 아니며 신문사 또한 그런 오락적 소설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한 보기가 되었다.
‘상록수’는 신문연재소설로서의 오락기능과 함께 지도가능도 수행하였던 것이다.
4. ‘상록수’에 대한 독자의 반응과 출판의 기능
‘상록수’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소개의 말이 게재되었다.
심훈(沈熏) 씨의 소설의 채택이 한번 발표되자 사회 각층의 독자로부터 매일같이 어서 게재하라는 주문이 답지함을 보아 이 소설이 미리부터 얼마나 일반에게 커다란 기대를 받고 있는가 알겠읍니다. 이 소설은 본사가 이를 공모할 때에 제출한 모든 요구와 신문소설로서의 여러 가지 조건에 충분히 부합할 뿐만 아니라 문단적으로 보아도 근래의 큰 수확이니 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을 것을 굳게 믿는 바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은 일종의 독자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독자의 공감 양상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입증된다.
본보 창간 15주년 기념의 공모 채택 소설 심훈 씨의 ‘상록수(常綠樹)’는 만천하 독자의 파기록적 감격과 찬탄을 받고 최후의 한 사람 박동혁의 금후의 활동에 만흔 기대를 남긴 채 어제로써 끝낫습니다.
독자들의 ‘파기록적 감격과 찬탄’을 받았다고 하였다. 아무리 신문사의 광고문이라도 전혀 근거 없이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또, 동아일보는 ‘상록수’의 인기에 힘입어 계속적으로 연재소설 모집을 시도하였다.
‘상록수(常綠樹)’는 1936년 6월 영화화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1936년 8월 28일 한성도서주식회사 단행본으로 첫 출간되었다(서문 벽초, 제자 손재형, 표지화 이상범, 속표지 이여성, 한글 교열 이윤재).
한성도서주식회사는 우리나라 출판사로는 대규모의 주식회사로서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의 집결처였다. 이리하여 많은 신문연재소설을 단행본으로 묶어 발행하고 뒤에는 이를 전집으로 간행하였는데 1936년~38년에는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모란(牧丹)꽃 필 때’, ‘고향’, ‘제이의 운명’, ‘청년 김옥균(金玉均)’, ‘삼곡선(三曲線)’, ‘순정해협’, ‘직녀성(織女星)’ 등 전10권이 ‘현대장편소설전집‘으로, 1948~1949년에는 ‘상록수’, ‘운현궁의 봄’, ‘모란꽃 필 때’, ‘선풍시대’ 등 전10권이 ‘조선문학전집‘으로 간행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체로 대중성이 높은 것들이나 한성도서주식회사는 문학을 평가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대거 관여하고 있어, 신문연재소설을 재정리,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문화적 게이트키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상록수‘는 오늘날 단행본으로도 여러 차례 간행되고 영화화, TV극화로 비디오테이프로도 제작되어 많은 독자에게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문연재소설이 단행본화하는 것은 고급문화화로, 영화화, TV극화는 대중문화화하는 장르를 뛰어넘는 이본작용(異本作用)이다.
‘상록수’는 전문적 지식인 독자들, 즉 평론가들의 평론의 대상으로는, 다른 ‘무정(無情)’이나 ‘삼대(三代)’만큼은 활발히 논의되지 않아 유식자 독자층의 공감의 폭은 크지 않았으나 대중 독자층의 공감을 크게 획득하였다.
흔히 ‘상록수’에 통속성이 있어, 본격소설로서의 질을 의심하나, 이 작품에는 감상적, 가정소설적 통속성이 아닌, 대중과 같이 호흡하고 대중과 같이 울고 웃는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쓴다는 의식적 행위, 다시 말하면 작품의 객관세계에의 탄생 과정에 있어서는 작가로서의 주도한 반성과 배려가 독자와의 공감에까지 손을 뻗치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 <중략> 엄밀히 말하면 독자를 의식하고 쓴다는 것은 작가가 자기자신까지도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의식하고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규섭, 현대소설독자론>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문학관 속에도 작가가 독자와 같이 호흡하는 입장에서 써야 한다는 일맥 상통하는 문학관이 엿보인다.
따라서, ‘상록수’에 나타나는 대중성은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통속적인 대중성이 아니라, 당대의 수준급의 독자들에게도 공감을 줄 수 있는 건전한 대중성이라고 할 것이며 이러한 공감구조가 독자를 양적으로 질적으로 향상시켜 가는 요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상록수’의 신문연재소설적 특징
지금까지 ‘상록수’의 작자 심훈의 문학관과 ‘상록수’의 공감구조, 동아일보 현상소설모집의 성격, ‘상록수’에 대한 독자의 반응과 출판의 기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상록수’는 작자 심훈의 현실참여적인 문학관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따라서, 당시 농촌 현실을 바라보는 작자의 관점과 신문사의 요구 사항이 주제면에서 합치한 결과 이루어진 작품이다.
둘째, ‘상록수’의 공감요소는 여러 측면에서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상록수’의 공감요소의 하나는 소재의 실화성(實話性)이다.
다음으로 독자에게 관심도 높은 주제가 중요한 공감요소이다. 주제는 진정한 기독교적 박애주의의 사랑에 바탕을 둔 농촌계몽운동이다.
그리고, 또 가장 두러진 공감요소는 기독교적 박애정신과 신앙적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공감요소는 남녀간의 헌신적 사랑이다.
한편, 자기개량적이고 자기향상적인 인물의 성격도 중요한 공감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제시된 인물의 성격은 농촌 지도자로서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적 의지력을 가진 청년과 연약하나마 신념과 의지로 현실을 타개하려는 의지 굳은 젊은 여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물 제시는 당연히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 ‘상록수’에는 흐뭇한 정감이 넘치는 분위기가 넘쳐흘러 독자의 공감을 확대하고 있다.
‘상록수’는 그 표현이 인물 묘사나 장면 묘사에 있어 사실성, 현장성을 띠고 있고, 꿈과 로맨스가 있고 눈물과 해학이 있어 발랄하고 신선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상록수’는 현상모집 당선 소설이므로 그 구성에 있어 전작소설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일반 장편소설의 평가 기준으로 보아서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상록수’의 발표 시기는 사회의 분위기와 지식층의 분위기가 일치하여 농촌계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시기이며, 또 창립기념 공모 소설이라는 점에서 매스컴의 효과도 있어 적시성이 있었다.
‘상록수’의 독자는 유식자층 독자보다도 대중적 독자의 공감이 컸고 오늘날에도 지속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상록수’는 1930년대의 한국 농촌의 단면을 치밀하게 묘사한 사실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상록수’가 발표된 지도 반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상록수‘의 의의는 한 세대를 지난 오늘날도 살아 있다.
‘상록수’가 지금까지의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흔히 지적되는 대로 통속성이나 대중성이 배제될 수 없다는 데서였다. 그러나 실상 ‘상록수’처럼 많은 독자를 갖은 작품도 흔한 것은 아니다. <윤병로, 한국근대작가·작품연구>
‘상록수’는 주인공의 미래지향성으로 독자의 큰 공감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수준 높은 신문연재소설로서 평가되어야 한다. 또, 신문사의 요구나 이에 응하는 작가가 반드시 통속적으로 쓰지는 않는다는 좋은 예를 보여 줌과 동시에 이상주의적인 로맨티시즘과 사실주의의 융합이 신문연재소설의 한 특징임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상록수’는 동아일보에 연재된 뒤 곧이어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되어 호평을 받는 등 독자의 지속적인 공감을 얻었고, 그 이래 계속적으로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하고, 영화화, TV극화 등으로 재현되어 오늘날에도 학생이나 성인을 막론하고 필독서로서 공감을 확보하고 있다.
작자로부터
심 훈
내가 겨우 약관을 지나서 처음으로 봉직하였던 곳이 동아일보요 또한 처음으로 신문소설에 뜻을 대어 다른 분이 번역하다가 버리고 간 ‘미인의 한’과 조선서 처음으로 ‘탈춤’이란 영화소설을 실리기도 역시 동아일보였습니다. 이러한 얕지 않은 인연이 있는 동아일보에 그 창간 15주년 기념으로 나의 작품이 실리게 된 것은 기쁜 일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영원의 미소’를 끝낼 때에 그 후편을 쓰겠노라고 독자와 약속을 하였었는데 이번 소설에 (인물적 사건은 같지 아니하나 귀농한 인물들의 그 후의 움직임을 보인 점에 있어서……) 사에서 주문한 모든 조건이 작자가 생각하여 오던 바와 우연히 부합됨에 용기를 얻어 그 공약을 이행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빈약하나마 머리를 짜내기에는 가장 괴약한 늦은 봄철에 한 50일 동안을 주야 겸행으로 펜을 달려 기한과 회수와 또는 그 밖의 모든 구속을 받으면서 써 낸 것입니다.
소설의 내용에 들어서는 발표되는 대로 작품이 대변할 터이니까 미리 말씀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겉으로 지나치게 뒤떠드는 일은 매양 명실이 상부치 못하는 법이라 졸작이 애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과히 어그러지지나 말기를 스스로 빌 뿐입니다. 그리고 창작에만 몰두하는 작가는 오직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여러분의 엄정한 비평에 귀를 기울여야 할 줄 압니다.
끝으로 한 말씀 하는 것은 지난날에 직업 관계로 외람히도 신문에 공모(公募)되는 작품을 고선(考選)하는 데 간여해 오던 사람으로서, 비록 신인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였으나, 이번에 응모한 것을 비웃는 친구도 있을 듯하나, 나는 이 기회에 감히 선언합니다.
“소생은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늙겠소이다!”라고……. ―<당진 필경사(筆耕舍)에서>
숙부 심훈
심 재 영
‘상록수(常綠樹)’가 발표된 지 40년이 지난 오늘, 생존시의 숙부를 추모하며 남기고 가신 작품을 다시 읽어 보니 자못 깊은 감회에 잠기게 된다.
숙부는 1901년 10월 23일생으로, 175센티 정도의 키, 70킬로그램 정도의 체중, 위엄이 있으면서도 미남인 건장한 그 풍모, 항상 유머러스한 말씀과 동작, 막내동이로서 늘 어리광으로 노래(老來)의 부모님을 즐겁게 하여 드리던 일들이 눈앞에 생생히 되살아난다.
열한 해 아래의 장질(長姪)인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실은 내가 농업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숙부의 권고에 말미암은 것이었고, 학교를 마치고 농촌에 와서 이른바 농촌운동을 하게 된 것도 그 인연이요, 그 후 숙부가 이 시골에서 ‘상록수’를 쓰게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1933년 숙부는 서울에서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忠南唐津郡松嶽面富谷里), 내가 조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집으로 오셨다. 시골 한적한 곳에서 창작에 전념하시라고 권한 것이 동기가 되어, 작품을 쓰시기에 골몰하셨다.
1년 동안은 나와 한집에 사시며 작품 ‘영원의 미소’를 쓰셨고, 그 다음해 아담한 집을 짓고 새살림을 차렸는데, 그 집을 ‘필경사(筆耕舍)’라 하였다.
지금 주인 없는 필경사는 변모도 되고 퇴락도 된 채 보존되어 있다.
숙부는 아주 평민적이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많은 존경과 환대를 받았고, 술을 좋아하셨음으로 하여 술에 얽힌 일화(逸話)도 많다. 어느 집에서건 제주(祭酒)에 쓰려고 비장(秘藏)한 술이라도 있는 줄만 알면 재미있는 방법으로 기어이 그 술을 가져다가 주인과 함께 쾌음(快飮)하는 정도였다.
항시 두툼한 수첩과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구상하는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면 그때그때 반드시 기록하는 것은, 이희승(李熙昇) 선생의 ‘심훈 회고담’에서의 말씀과 같이 그분의 소년 시절부터의 누구나 본받아야 할 습관이었다.
숙부가 낙향하기 전부터 이 부락에는 동네 중견 청년들의 조직체가 있어서 계몽운동·농촌운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는데, 숙부는 이 운동이야말로 우리 청년들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우선 ‘영원의 미소’에서 광주학생사건 때 주동이 되어 활약하던 남녀 두 주인공을 농촌으로 내려다 놓음으로써, 앞으로 구상중인 농민소설의 전주곡 겸 복선(伏線)을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934년에는 ‘직녀성(織女星)’을 탈고하였는데, 그 무렵 신문과 잡지에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水原郡半月面泉谷里)에서 최용신(崔容信)이라는 한 젊은 여성이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과로 끝에 병을 얻어 아깝게도 요절(夭折)하였다는 기사를 보고 부곡리와 천곡리를 ‘한곡리’와 ‘청석골’로 연결시켜 작품 ‘상록수’는 이루어졌다. 수년 후, 나는 천곡리를 수차 방문한 일이 있지만 숙부는 작품 집필중에나 구상중에 한번도 가 본 일이 없다.
‘상록수’에 나오는 애향가(愛鄕歌)는 1933년 가을에 숙부가 마을 청년들에게 지어 준 것으로, 이 노래는 애국가 곡조(그때는 아일랜드의 민요 이별곡)에 맞추어 부르게 되어서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가사만 외면 부를 수 있었다. 가사의 구절구절이 뼈에 사무치는 것이어서 혼자도 부르고, 둘이도 부르고, 기뻐도 부르고 슬퍼도 불렀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지어 부른 것 이 화근이 되었다. 부곡리에서는 모모(某某)가 주동이 되어 단체를 조직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며,조선독립을 표방하는 애국가(愛國歌)를 부른다고 일경(日警)에 정보가 들어가 그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상록수’가 지상(紙上)에 발표되자 동네 청년들은 자기네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들이 작품화되어 세상에 알려짐에 용기 백배하여 더욱 열심히 일하던 중, 그 다음 해인 1936년 9월 16일 숙부의 돌연한 별세는 청년회원들과 전 동민들에게 큰 비애와 충격을 주었다.
‘불사조(不死鳥)’의 ‘흥룡’과 ‘덕순’에게서 ‘영원의 미소’의 ‘수영’과 ‘계숙’에게로 이어져 우선 농촌에 정착을 시켜 놓고, ‘상록수’의 ‘동혁’과 ‘영신’에게 농촌운동을 시켰으나 영신은 죽어야 했고, 홀로 남은 동혁이 다시 일어서서 이 겨레의 젊은 역군(役軍)들을 끌고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하는 ‘상록수’의 속편(續編)이 숙부의 생존시에 구상중에 있었을 것이요, 또한 꼭 있었어야 할 일이 중단되고 만 것은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그날이 오기를 그다지도 염원하시던 님은 가셨다.
겨레는 해방이 되고 나라는 다시 이룩되어 그렇게도 못살던 농민들도 무지(無知)와 빈곤을 물리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다시 오지 못할 그날의 그 모습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니 ‘상록수’로 비취신 횃불 영원히 겨레를 이끌어 주소서.
1974년 12월 일 당진(唐津) 향제(鄕第)에서 청석 심재영(靑昔沈載英) 분향 근서(焚香 謹書)
심훈 선생 약력
심훈(沈熏) : 1901∼1936. 소설가, 시인, 영화인.
본관은 청송(靑松), 본명은 대섭(大燮),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1901년 9월 12일 서울(당시 경기도 시흥군 노량진)에서 아버지 상정(相珽) 씨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조선 말기의 중류 가정 출생으로, 관후한 성품을 지닌 뛰어난 재질을 가졌으며, 아버지는 조상 숭배의 관념이 철저하였다.
1915년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이 학교 3학년 때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결혼하였다.
1919년 이 학교 4학년 재학 때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7월에 집행유예로 출옥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유학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연구하고자 했으나 집안에서 일본 유학을 강경히 반대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남경, 상해를 거쳐 갔다.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서 수학하였다. 뒤에 발표된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은 당시의 생활을 소재로 한 것이다.
1923년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입사, 기자생활을 하였다.
1924년 가정 사정으로 말미암아 부인 이해영과 이혼하였다.
1925년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조일재(趙一齋)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후반부 대역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다.
1926년 근육염으로 대학병원에서 8개월 동안 병상 생활을 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집필, 각색, 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이 되자 개작한 작품으로 영화 제작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928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30년 중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조선일보에 연재, 완결되기 전에 일본 경찰에 의해 정지 처분을 받았다. 소설 ‘불사조(不死鳥)’도 정지 처분을 당하였다.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다.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였다. 자택을 ‘필경사(筆耕舍)’라 이름짓고 창작 생활에 정진하였다.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무산되었다(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곧 퇴사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농촌계몽소설인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전 부인에 대한 회고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35년 장편 ‘상록수(常綠樹)’가 동아일보 창간 제15주년기념 문예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연재되었다. 이 상금으로 상록학원(常綠學院)이 설립되었다. 이 학원은 상록국민학교(常綠國民學校)의 모체가 되었다.
1936년 9월 16일, ‘상록수’의 출판 관계로 상경하였다가, 장티푸스로 대학병원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향년 36세, 유족은 미망인 및 3남이다.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 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켰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그 후의 리얼리즘 농민문학의 발전에 크게 공한하였다.
신상옥 감독 약력
신상옥(申相玉) : 1926~2006. 영화 감독, 제작자.
1926년 10월 18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경성보통학교, 경성중학교와 일본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7년 고려영화사에서 최인규 감독 작품의 ‘희망의 마을’, ‘파시’ 등의 미술을 맡으면서 영화 전반에 관한 지식을 익혔다.
1952년 6·25 중 부산에서 ‘악야’를 첫 작품으로 감독에 데뷔하였다. 이후 이광수의 ‘꿈’(1955), 김동인의 ‘젊은 그들’(1955), 현진건의 ‘무영탑’(1957), 심훈의 ‘상록수’(1961) 등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작품들을 감독하거나 제작하였다.
1958년 ‘어느 여대생의 고백’을 만든 이후 상업적 흥행을 위한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성춘향’(1961) 등의 작품들을 감독하였다.
1961년 작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연산군’(1961), ‘열녀문’(1962), ‘빨간 마후라’(1964), ‘내시’(1968), ‘삼일천하’(1973) 등을 만들어 영화인으로서 성공을 이루었다.
1966년에 설립한 영화사 '신필름'이 1973년 영화법이 개정되어 문을 닫게 되었고, 1970년대에 영화산업이 위축되자 작품 활동도 위축되었다.
1978년, 부인인 배우 최은희의 납북에 이어, 홍콩을 여행하던 중 납북되었다. 그 후 8년 동안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가 설립되어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탈출기’(1984), ‘소금’(1985)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에서 미국대사관을 통해 최은희와 함께 탈출하여 미국에 체류하다가 귀국하여, 대한항공(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마유미’(1990)를 제작하였으며,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을 다룬 ‘증발’(1994) 등을 감독하였다.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었다.
2003년, 말년에 안양신필름예술센터를 설립하고 동아방송대학 석좌교수로 재직하는 등 한국 영화 발전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2006년 4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부터 ‘공주 신상옥 청년 영화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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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심훈(지은이)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노량진리에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본명은 ‘대섭(大燮)’이다. 어렸을 때 ‘삼준(三俊)’, ‘삼보(三保)’로도 불렸으며, 필명으로 ‘금강샘’, ‘백랑생(白浪生)’, ‘해풍(海風)’ 등을 썼고, 1926년 이후부터 아호로 ‘훈(熏)’을 썼다. 1915년 심훈은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며, 2년 뒤인 1917년 3월에는 왕족의 누이동생 이해영과 결혼한다. 그리고 그해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재학 중 조선인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한 일본인 수학 선생에게 항의하며, 그 항의의 표시로 백지 답안을 제출해 수학 과목이 낙제되어 유급을 당한다. 1919년 3월 기미년 만세 사건 때 심훈은 남대문 앞에서 가담하며, 3월 5일 경성 헌병대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7월 형 집행을 마치고 풀려나지만 퇴학을 당한다. 심훈은 당시 졸업을 하지 못했지만 2005년 7월 경기고등학교는 심훈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1920년 심훈은 흑석동 본가와 가회동 큰형 집에 머물면서 문학 독서에 매진하며,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듬해 1921년 그는 중국 항저우의 즈장대학(之江大學) 문학원에 입학해 극문학 관련 공부를 하다가 1923년 국내에 들어와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이승만, 김영팔 등과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한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며,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창작 활동도 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송영, 이적효, 이호, 박세영, 김홍파 등이 주축이 된 사회주의 문화 단체인 ‘염군사’ 멤버로 동참하며, 1925년에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도 가담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무산 계급의 해방 문학보다는 전방위적인 해방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2월 심훈은 동아일보 학예부에서 사회부로 옮긴 후 ‘철필구락부’에 가입하며, ‘철필구락부 사건(급료 인상 투쟁 사건)’으로 해직된다. 그해 11월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 소설 <탈춤>부터 “심훈(沈熏)”이란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1927년 2월에는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도일(渡日)하며 일본의 닛카스(日活) 회사에 입사하지만 얼마 있지 않고 5월 귀국해 경성방송국 프로듀서로 입사한다. 그러나 일본 황태자를 전하로 호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3개월도 안 되어 퇴사를 당한다. 그리고 7월에는 나운규를 감독으로 <탈춤>을 영화화하며, 10월에는 원작·각색·감독한 영화 <먼동이 틀 때>(원제 <어둠에서 어둠까지>)를 완성해 상영하기도 한다. 1928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신문 기자직을 이어 가나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아 생계를 외상으로 허덕인다. 이 해 11월 ≪새벗≫에 소년 영화 소설 <기남(奇男)의 모험(冒險)>을 게재한다. 1929년에는 ≪조선일보≫에 소설 <오월비상(五月飛霜)>을 게재하며, <원단잡음(元旦雜吟)>, <거리의 봄>, <어린이날>, <야구(野球)> 등의 시도 여러 편 게재한다. 1930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하나 10월 29일 조선총독부 검열로 중단된다. 그리고 그 해 11월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한 안정옥(安貞玉)과 약혼하며, 12월 24일에는 결혼을 한다. 1931년 8월 16일부터는 ≪조선일보≫에 <불사조>를 연재하나 12월에 또다시 검열로 중단된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 기자직을 그만두고 양친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살게 되며, 그해 4월 아들 ‘재건’이 태어난다. 이해 9월 경성세광사에서 ≪심훈 시가집≫을 출판하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출간이 미뤄진다. 1933년 7월 심훈은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영원한 미소≫를 연재하며, 8월에는 기자 생활을 못 잊어 서울로 상경해 조선중앙일보사에 들어가 학예부장을 맡지만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당진으로 다시 내려간다. 그는 1934년 3월 이혼한 부인 이(李)씨를 모델로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며, 여기서 생긴 원고료로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그 집에서 ≪상록수≫를 완성한다. 1935년 2월 심훈의 장편소설 ≪영원한 미소≫가 한성도서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며, 8월에는 ≪동아일보≫ 창간 15돌 기념 현상공모에 ≪상록수≫가 당선된다. 심훈은 그때 받은 상금 500원 중 일부를 야학당에 후원하며, 이 후원으로 상록학원이 세워진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상록수≫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1936년 8월 10일 심훈은 서울로 상경했다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을 접하고는 신문 호외의 뒷면에 시 <절필-오오 조선의 남아(男兒)여!>를 써서 ≪중앙≫ 문예지 편집실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해 9월 16일 ≪상록수≫ 출판 문제를 의논하고 ≪심훈 시가집≫ 교정을 보던 중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대학병원에서 치료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17일에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사후 1949년 7월 생전에 출간하지 못한 그의 시가집이 중형(仲兄) 심설송(沈雪松)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으로 발간된다.
민병덕(엮은이)
목차
1.쌍두취행진곡 / 6, 2.일적 천금 / 36, 3.기상 나팔 / 51, 4.가슴속의 비밀 / 65,
5.해당화 필 때 / 81, 6.제3의 고향 / 96, 7.불개미와 같이 / 114,
8.그리운 명절 / 144, 9.반가운 손님 / 168, 10.새로운 출발 / 196, 11.이별 / 220,
12.이역의 하늘 / 246, 13.천사의 임종 / 261, 14.최후의 1인 / 273
해설―‘상록수’의 공감구조 : 민병덕 / 285, ‘상록수’ 관계 학술 논문 / 303,
숙부 심훈 : 심재영 / 306, 심훈 선생 약력 / 308, 신상옥 감독 약력 /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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