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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 | 1 0 | ▼a 누가 무화과나무 꽃을 보았나요 : ▼b 김저운 소설집 / ▼d 김저운 지음 |
| 260 | ▼a 서울 : ▼b 예옥, ▼c 2016 | |
| 300 | ▼a 342 p. ; ▼c 21 cm | |
| 505 | 0 0 | ▼t 개는 어떻게 꿈꾸는가 -- ▼t 청학동 가는 길 -- ▼t 로그아웃 -- ▼t 누가 무화과나무 꽃을 보았나요 -- ▼t 그들도 몰랐던 그들의 진실 -- ▼t 소도(蘇塗)의 경계 -- ▼t 연(緣) -- ▼t 거꾸로 흐르는 강 -- ▼t 회문(回文) |
소장정보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2층)/ | 청구기호 897.37 김저운 누 | 등록번호 151332116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1985년 「한국수필」에 수필, 1989년 「우리문학」에서 소설로 등단한 작가 김저운 소설집. 김저운의 소설이 사유하는 것은 말없음 내부의 소리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없음'이라는 표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갈 때 소설가는 오히려 표지를 들어내고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곳에서 소설가가 만나는 것은 소리 없는 자들의 소리들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있지만 들리지 않는 자들의 소리가 그것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소설가는 현실의 표층위로 드러나지 않고 가라앉은 자들의 서사를 외부로 복원한다.
말없음의 내부에서 말하기
1.
그러나 이 세상엔 드러난 것보다 은폐된 것들이 더 많지 않은가? 은폐된 것들, 즉 말없음표의 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굳이 판단이라는 걸 해야만 할까? 「누가 무화과나무 꽃을 보았나요」부분
어떤 종류의 말은 반어의 형태를 가짐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말없음’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다. ‘말없음’이란 표기는 그곳에 원시적으로 ‘말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말이 부재하는 자리에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표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안전지대는 언제나 위험지대에서 생성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므로 ‘말없음’이란 기호는 그 안에 본디 누군가의 발화가 자리하거나 자리하려 했지만 모종의 사유로 그것이 외부로 은폐되고 있다는 신호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말없음’이란, 억지로 만들어진 침묵, 무언가를 말하려다 제지된 것들, 본디 ‘있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강제로 자리 잡은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없음’은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 사유할 필요가 없다는 은밀한 억압의 기제로 작동한다. ‘말없음’의 내부에 자리한 또 다른 ‘말’들은 담론의 장을 구성하는 주도적인 원리에 의해 이미 무가치한 것 또는 공표되지 말아야 할 것으로 평가받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말 사이의 투쟁에서 패배한 그들의 서사는 ‘말없음’의 영역에서 아무도 알지 못한 채 무화되어 간다.
김저운의 소설이 사유하는 것은 이 말없음 내부의 소리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없음’이라는 표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갈 때 소설가는 오히려 표지를 들어내고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곳에서 소설가가 만나는 것은 소리 없는 자들의 소리들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있지만 들리지 않는 자들의 소리가 그것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소설가는 현실의 표층위로 드러나지 않고 가라앉은 자들의 서사를 외부로 복원한다.
2.
「로그아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화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매일 저녁 인터넷을 헤맨다. 일상의 관계에서 상처 입은 그들은 현실의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다른 인격과 배경을 구비한다. 상대에게 자신이 꾸민 사실이 드러날 우려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혜는 ‘고니’라는 인격으로 ‘권태’라는 가명을 쓴 남자를 만난다. ‘고니’는 결코 자신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권태 또한 마찬가지다. 그 또한 자신의 인격을 고니에게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고니와 권태의 대화는 언제나 현재형이다. 그들의 만남은 연속된 분광의 형태가 아니라 선후가 없는 점과 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발화는 누적되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에 지나간 과거와 도래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누군가가 그 말을 들어주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관계의 종료와 함께 그들은 깨닫게 된다. 지금껏 그들이 나눈 것은 대화가 아니라 무의미한 혼잣말이었다는 것을.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인격이 나눈 그들의 소리는 네트워크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사라지며 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고니와 권태의 대화는 고니가 로그아웃한 순간 소멸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명멸하는 관계들 사이에서 재방송을 보며 키들거리는 인혜는 여전히 자신의 공간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들도 몰랐던 그들의 진실」에 등장하는 사내의 고립 또한 인혜의 고립과 유사하다. 한때 이름을 날렸지만 이제는 한물간 음악가인 사내는 “내 음악은 팔십 년대에서 끝났어. 내 인생은 구십 년대에서 차압당했고……”라는 말을 던지며 자신의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과거의 연인이었던 그녀를 찾는다. 사내는 그녀에게 그간의 사정을 시시콜콜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녀는 건성으로 듣기만 할 뿐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녀는 대화를 통해 이제는 후회로 남은 그와의 관계가 복원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의 대화는 고니와 권태의 대화처럼 서로의 내면에 다가가지 못하며 허공으로 비산한다.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그다음이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그녀 앞에서 사내는 정신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사내는 “나 좀 재워 줘요.”라는 아기의 흉내를 내며 그녀 앞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어떤 수를 써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결과 앞에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곁을 떠난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 무렵이다. 그녀는 왜 그런지 모르게 사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소설은 이렇게 무너지는 자들을 구원하는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결말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그토록 애타게 그녀를 찾던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부여안고 그녀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전화기를 남기고 떠나 버린 것이다. 소설은 이 지점에서 어떤 휴머니즘을 완성한다. 김저운 식의 휴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 진정한 휴머니즘이란 무너진 사람의 육신을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그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이라는 것을.
무수히 많은 관계를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무화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는 어떻게 꿈꾸는가」에서도 나타난다. 재산을 자신이 기르던 개, 모리에게 물려주려는 어머니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아들의 노력을 다룬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언술은 자신은 사람을 “식별한다기보다 감각한다”는 모리의 진술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모리는 예전의 화려함을 잃어버린 마미의 모습에도 현혹되지 않는다. 모리는 언제나 마미의 본질을 감각한다. 하지만 아들은 다르다. 자신에게 닥쳐온 상속위기를 알려주는 친구에게 “법률가는 무슨 사무장 주제에…….”라고 타박하는 이는 그가 감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식별하는 사람이며 사람의 본질을 주어가 아닌 수식어에 방점을 찍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관계 형성에 실패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이성이 개입된 식별은 모든 것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감각과 달리 필연적으로 관계 사이에 위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리를 제외한 등장인물은 모두 다른 층위에 서서 서로와 고립되어 있다. 오직 모리만이 모두를 평등하게 동일한 평면에서 감각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오늘날 위계로 인해 형해화된 인간관계에 대한 유쾌한 야유에 해당한다. 소설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은 개에게 부여되어 있으며 개가 가져야 할 것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꾸는 꿈이 곧 개의 꿈이고 개의 꿈이 곧 인간의 꿈이다. 우리 모두는 개와 인간의 시선이 전복된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3.
김저운의 소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인물 유형은 목격자들이다. 사건의 외부에서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목격자는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목격자들의 성격이 작품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 있다. 잔혹한 사건의 기억으로부터 도피하는 목격자가 있는가 하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목격자가 있으며 사건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방관하는 목격자도 있다.
그중 도피하는 자를 먼저 읽도록 한다. 「소도의 경계」에서 오랜만에 귀국한 진이는 고향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 겉으로 드러난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와 달리 여행에 참가한 고향 친구 모두는 한계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다. 화숙은 암 투병 중이며 진태의 회사는 어렵다. 민수는 시인도 농부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되지 못했다. 윤정은 자신의 가정을 신뢰하지만 진태의 추근거림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여행을 즐기는 과정에서 진이는 어린 시절 민수 엄마의 기억과 함께 그동안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던 민수와 잠지를 맞댄 야릇하면서도 즐거운 추억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이는 옥주에게 있었던 끔찍한 기억의 핵심은 떠올리지 않는다.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춘기를 강타했던 사건에 대해 풍문으로 알고 있는 그들은 옥주의 이야기를 “진이야. 너무 마음에 담지 마.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너도 편하잖아?” 라며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리려 한다. 단지 진태만이 호기심의 차원에서 그날의 사정에 대해 집요하게 물을 뿐이다. 더 이상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진이는 고해성사를 하듯 자신이 기억하는 그날의 사건을 이야기한다. 자신은 옥주가 강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목격했으며, 옥주의 아버지로부터 사건의 경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당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후의 사건 진행은 마을 주민 모두의 묵계에 의해 수면으로 가라앉고 어떠한 응보도 없이 마을은 다시 평온해진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과정에 사건의 피해자인 옥주의 의사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이에게 이제 그만 스스로를 용서하라는 친구들의 권유나. 사건이 잠잠해지도록 침묵을 권유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용서와 화해의 주체는 옥주가 아니다. 진이가 사건의 기억을 끝끝내 놓지 못하고 “단지 나만 그들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이럴 것이다.
반면 「청학동 가는 길」의 ‘나’는 진이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나’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들을 목격하는 동시에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나’는 학생들의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할 학교 신문에 자신의 글을 세 편이나 싣겠다는 교장의 ‘몰상식’을 반대하며, 멀쩡히 살아 있는 친일파 후손의 동상을 세워 사전 선거운동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매사에 부정적이시고 편견이 심”하다는 ‘나’에 대한 교장의 인물평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인물평이 자신의 의견이 거부당한 것에 악의를 품은 교장 개인의 독단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조리에 대한 ‘나’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침묵하는 다수가 기우는 쪽으로 일이 진행”된다. 그들은 “나약하면서 은밀했고, 은밀하면서 강했다. 침묵은, 스스로 그것을 아는 까닭에 언제나 요지부동”인 것이다.
거듭되는 ‘나’의 개입에도 부조리는 결코 개선되지 않는다. 성희롱의 희생자가 된 차 선생은 자신 하나가 입을 다물면 끝나는 일이었다며 자책한다. 옥주의 희생으로 마을이 평화를 찾은 것과 동일한 구조인 것이다. “후련함도 아니고 미련도 아닌, 어쩔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서글픔 같은” 체념은 이 지점에서 온다.
하지만 결정적인 파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나’의 아들이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일으킨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정한 사회 가설’을 재인식시킨다. 결국 “혼자 정직한 척, 올바른 척하고,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시비 걸며 법석을 떨”며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나’의 ‘부적절한’ 태도는 세상의 규칙을 알지 못해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목격자가 사건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개입하는 것이 결과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남은 것은 방관하는 일이다. 「누가 무화과나무 꽃을 보았나요」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방관자로 남은 사람의 이야기다.
어느 날 ‘나’의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맴돌기 시작한다. 한눈에 봐도 미인으로 보이는 그녀는 아무리 봐도 우연으로 가장해 엘리베이터, 주차장, 시장, 목욕탕에서 ‘나’와 마주친다. ‘나’를 궁금하게 했던 그녀의 정체는 곧 밝혀진다. 그녀는 자신이 고등학교 선생으로 있던 시절 가르쳤던 제자 명화다.
‘나’는 명화의 과거를 생각한다. 고교시절 명화는 선도부의 소지품 검사에서 피임약을 가지고 있다가 걸렸다. 피임약의 처분을 묻는 명화에게 ‘나’는 “그걸 왜 나한테 묻니? 할머니가 주신 약이면 먹고, 아니면 버리든가 네가 알아서 하란 말야. 알겠어?”라며 방관한다. 조금 심한 처분이었다는 생각이 든 ‘나’는 명화의 집에 방문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의 방문을 계기로 명화는 가출하고 피임의 상대방으로 추정되는 오빠가 자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화는 다시 ‘나’를 찾아온다. 이유는 얼마 후 밝혀진다. 고교시절과 마찬가지로 명화는 누군가가 파멸로 향해가는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모두가 명화를 방관하는 세상에서 그나마 오직 ‘나’만이 명화를 찾아본 것이다. 하지만 명화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명화에게 방관자”로 남는다.
4.
김저운의 소설이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먼 길을 떠난 남성에 대하여 여성들이 행하는 기다림의 서사이다. 이를 페넬로페들의 서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페넬로페의 서사는 길 떠난 오디세우스가 겪는 무용담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며 고초를 겪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거꾸로 흐르는 강」은 근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남성들이 겪었던 수난에 비해 그동안 주의 깊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우리 여성들의 수난사를 다룬다. 강희는 아직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승구와 함께 치매 기운이 있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강희의 어머니는 한국 전쟁 때에 “붉은 완장의 무리에 끌려간 남편”을 찾아 만삭의 몸으로 전장을 헤매다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소설에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할아버지 없이 일제 강점기를 살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할머니의 처지 또한 그리 나아 보이진 않는다. 봉건시대의 막바지에서 시앗을 본 외증조부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강희의 외증조모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외증조모가 아끼던 질그릇 단지를 “피눈물의 증표”로 삼으며 강희의 삶이 다른 방식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여기서 유래한다. 하지만 강희의 삶 또한
어머니나 할머니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한 형민은 수배를 당하고 형민을 수사하던 형사는 강희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다. 그 후 형사에게 끌려간 형민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바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계로 이어지는 강희 집안의 여성들은 장대한 역사에서 제국주의와 전쟁, 독재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임과 동시에 남성이라는 젠더권력의 폭력에 희생되는 이중의 희생자라는 지위를 가진다.
그동안 오디세우스들이 겪은 고난에 가려진 페넬로페들의 삶은 이렇게 신산하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료한 이후 남성들의 고난은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지만 여성들의 고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직도 강은 거꾸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행동하는 페넬로페의 이야기다. 「회문」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정희는 소설을 쓰는 ‘나’를 만난다. “가정에 끼친 그의 유일한 공헌은 자식 셋을 만들어 준 일”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희는 모종의 사유로 납북된 남편의 “왜곡된 현실을 어떻게든 밝히”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정희의 기대는 오래가지 않는다. 정희와 바람과는 달리 ‘나’는 그 사연이 “소설로 잘 풀릴 수 있을지 없을지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듣는 자신의 이야기가 가지는 한계는 이런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남편에 관한 진실이 흥미 위조의 소설로 바뀌는 것을 본 정희는 더 이상 ‘나’에게 소설을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남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리저리 애를 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정희는 정부에게서 남편의 복권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내가 소설을 만들려고 애를 쓸 때, 그 속에서 허구와 사실을 짜 맞추며 고심할 때, 그러다 잊고 있을 때, 그녀는 홀로 지아비를, 혹은 자신의 진실을 놓지 않고 싸웠던 것이”라는 사실을. 소설의 윤리는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서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말하게 하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마지막으로 「연」을 읽는다. 예전에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소희는 선박의 전복사고로 남편을 잃은 자신의 딸 남희와 손녀 주희와 함께 주막을 운영한다. 가정에 남성이 없이 가계가 모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소설의 기본적인 구조는 「거꾸로 흐르는 강」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 소설과 다른 소설들의 차이점은 그녀들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남편을 잃고 찾아온 남희에게 소희는 “네가 있고 주희가 있는데 뭔 걱정이냐”며 남희를 위로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성이 아니라 자신들의 옆에 있는 여성들이다. 자신의 젊은 시절에 함께 했던 남자의 죽음에 소희가 무심한 것과, 남희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가야금 명인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소희가 손사래를 치며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결말은 이후로도 그녀들만의 연대가 지속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페넬로페는 자신의 직물을 절단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들을 버리고 완전히 그들에게서 독립한다. 페넬로페들의 진화다. 그들의 곁에는 그들을 떠난 무정한 남성이 아니라 동일한 수난을 겪은 여성들이 자리한다. 김저운의 소설은 수난을 겪은 여성들의 연대기年代記임과 동시에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하여 서로의 아픔을 교환하며 치유하는 연대기連帶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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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목차
개는 어떻게 꿈꾸는가 ○ 7 청학동 가는 길 ○ 39 로그아웃 ○ 83 누가 무화과나무 꽃을 보았나요 ○ 113 그들도 몰랐던 그들의 진실 ○ 1 43 소도蘇塗의 경계 ○ 1 69 연緣 ○ 207 거꾸로 흐르는 강 ○ 2 37 회문回文 ○ 2 69 해설 | 말없음의 내부에서 말하기 |김 대현 ○ 3 25 작가의 말 ○ 3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