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조 인상주의의 모든 것. 파리의 젊은 화가―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 등―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아카데믹 미술계에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당시의 반응을 신문기사, 문헌 등 각종 사료를 통해 생생하게 담는다. 풍경, 일상적인 주제 등에 대한 '인상(impression)'을 표현한 인상주의화가들의 다채로운 그림을 보는 것으로 인상주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의 파리 도시 개조 사업’으로
쾌락과 볼거리의 도시가 된 프랑스 파리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프랑스 파리는 골목들이 얽혀있고, 전염병이 만연한 낡고 더러운 도시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수립된 후 파리를 ‘수도 중의 수도’로 개조하는 일에 착수한다.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센 지사로 임명되어 ‘오스만의 파리 도시 개조 사업’을 시작하는데 이것을 계기로 중세 도시 파리는 현대적인 도시로 변화하고, 극빈층의 거주지역 개선과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업을 펼친다. 무엇보다 미로 같이 구불거리는 길을 세바스토폴 대로, 생미셸 대로처럼 넓은 교차로를 만드는 등 도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파리를 ‘신(新) 도시’로 만든 것이 큰 성과였다. 그리고 금세 여흥의 도시가 되었다. 새롭게 형성된 대로를 따라 카페테라스가 늘어서고, 사교계 인사들의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오스만의 파리’는 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1877)로, 여흥을 즐기는 파리지앵의 모습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로 작품이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
아카데믹 미술계에 반발하며
새로운 ‘풍경’을 찾아 ‘야외로’ 나선 젊은 화가들!
바뀐 일상과 풍경 여기에 산업화로 기술발전과 과학적 발견은 화가들의 작업환경을 바꾸어 놓았다. 물감 용기가 개선되면서 휴대용 화구가 개발되고, 사진기술은 현실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미술에서 화가들을 해방시켰다. 사진으로 인해 화가들의 생계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많은 화가들이 사진의 특성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채로운 포즈와 움직임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과 같이 스냅사진처럼 그림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학자 슈브뢸이 색상환과 색채이론의 영향으로 화가들은 색채대비, 점묘법 등 ‘색채’로 주제와 느낌을 표현한다.
반면 같은 시기의 아카데믹 화가들은 똑같고 진부한 모델을 반복해서 모사하였고, 전통에 빠져 있는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자유로운 형식과 형태로 개성을 뽐내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스럽게 아카데믹 미술계에 대한 저항과 반발심을 드러냈고, 그들은 ‘야외로’ 나선다.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 루브시엔, 베퇴유, 루앙 등의 자연 풍경이 그들 그림의 주제였다. 바지유는 한여름의 물놀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름 풍경>(1869)으로, 시슬레는 센 강의 구름과 하늘을 <쉬렌의 센 강>(1877)으로 남겼다.
독립적인 궤도를 걷기 시작한 인상주의 화가들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 ‘뒤랑 뤼엘’
정원, 자연, 하늘, 인물 등 이전 ‘전통주의’ 화가들이 다루지 않던 일상적인 주제를 담으면서 당시 주류였던 아카데믹 미술계의 살롱전에는 낙선된다. 그러나 그들은 ‘인상주의 전시회’를 매년 총 8회에 걸쳐 진행하며 독립적인 궤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때 드가, 피사로, 카유보트, 모네, 르누아르, 기요맹, 베리트 모리조 등이 참가하며 그림을 발표했다. ‘비주류 전시회’라 불리며 조롱과 웃음거리가 된 그들은 언론을 통해 ‘드로잉이 형편없고’, ‘채색도 서투르다’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지만, 아카데미즘에 지친 일부 문학작가―쥘 라포르그, 옥타브 미라보 등―는 그들을 지지해주었다.
이외 미술상 뒤랑 뤼엘과 탕기 아저씨 등이 비중 있게 언급되는데 화방을 운영하며 화구를 내주고, 그들의 그림을 위탁 판매하거나 전시회를 열도록 돕고, 인상주의 화가들이 국제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을 터준 인상주의의 열렬한 후원가였기 때문이다. 반 고흐의 <탕기 아저씨>(1887~1888), 르누아르의 <폴 뒤랑 뤼엘의 초상>(1910)을 통해 그들의 인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양미술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조
인상주의에 대한 모든 것
‘인상주의 화풍’은 당대 화가들의 ‘인상(impression)’이다. 인상주의는 화가들의 개성, 자유로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에 미술사는 인상주의 등장 전과 후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인상주의의 영향은―모든 전위적 사조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특히 신인상주의의 점묘법, ‘전 세계’의 외광파에 까지 이른다고 언급한다. 후원자 뒤랑 뤼엘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상주의는 프랑스 이외 유럽 전역,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 대륙에까지 퍼졌는데, 미국 화가 휘슬러는 영국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그의 작품 <녹턴: 푸른색과 금색―낡은 배터시 다리>(1872~1875년경)에 여실히 드러난다.
스튜디오(아틀리에)에서의 작업을 거부하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화가를 ‘그림 그리는 사람’에서 ‘창조자’로 의미를 전복시켰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들 스스로 전통의 바깥으로 뛰쳐나왔고, ‘새로운’ 화풍을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시방식’, ‘판매방식’ 등 모든 것을 개척하였다. 추상화가 잭슨 플록의 작품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연작 <루앙 대성당, 세트5>(1969), 제임스 터렐의 설치 미술 <내부의 빛>(1999)등은 어쩌면 인상주의 화가들의 ‘저항의 미술’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화가 쿠르베의 말처럼 ‘보고, 바라고 느끼는 것’을 그리고, 카미유의 말대로 ‘마음을 움직인 첫 인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빠르게 붓질하는 방식을 고안하기도 한 인상주의 화가들. 그들이 실험과 도전, 저항 정신이 서양미술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으며,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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