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검증을 바탕으로 조선사 3대 논쟁인 사육신 조작 작업,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유성룡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임진왜란을 초래했다는 잘못된 통설, 원균은 용감한 장수인 반면 이순신은 보신책에만 능한 겁장怯將이라는 몇몇 논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 허위를 벗기고 실상을 구명했다.
철저한 사료검증으로 바로잡은 조선사 최대의 쟁점들!
1970년대 말 한 권세가의 작용과 권력에 아부하던 어용학자들의 부화뇌동으로 사육신死六臣 유응부를 삼중신三重臣 김문기로 대체하려 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사육신 조작 작업,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전쟁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서애 유성룡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며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을 초래했다는 잘못된 통설, 원균은 용감한 장수인 반면 이순신은 보신책에만 능한 겁장怯將이라는 몇몇 논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 허위를 벗기고 실상을 구명했다. 철저한 사료검증을 바탕으로 조선사 3대 논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한 이 책을 통해 일부 인사들의 과장.부회.억측으로 오도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육신, 유응부인가 김문기인가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단종 복위운동(세조 2년, 1456년)에 목숨을 바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추강 남효온(1454~1492년)이 쓴 『육신전』에서 비롯되었다. 세조 집권기 이후 오랫동안 금기로 인식되던 사육신의 절의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정세의 기복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여 중종이 참석한 조강朝講에서 성삼문과 박팽년 등에게 난신亂臣이라는 죄명을 벗기고 충신으로 평정하기를 건의하기도 했으며, 연산군 때는 발간이 금지된 남효온의 시문집도 인출, 반포되었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이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유응부, 이개, 유성원의 순으로 왕조실록에 처음 나타는 것은 『인종실록』에서이며, 숙종 때에는 사육신과 생육신을 모두 절의의 표본으로 삼아 국가에서 이를 표창해야 한다는 건의가 일어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아가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절의 숭상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모든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임금의 명에 의해 공신의 신주를 배향하는 것)」을 편정하도록 했는데,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가 ‘사육신’이라는 명칭으로 편정되었고 김문기는 ‘삼중신’ 중 한 명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와 어용학자들이 사육신 중 유응부를 김문기로 대체하려는 역사 날조극을 자행했고 1978년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 조성 당시 권세가(김문기의 후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작용으로 기존 사육신의 묘와 함께 김문기의 허묘와 위패를 추가로 봉안함으로써 사칠신 묘소가 된 이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95년 사육신 춘계제향에서 사육신 후손의 모임인 사육신선양회와 김문기 후손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2008년 5~6월에는 양측의 주장과 반박문이 모일간지의 광고지면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 책은 각종 실록을 꼼꼼히 고증해 유응부와 김문기 중 누가 진짜 사육신인지 밝혀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육신 오판’을 바로잡는 일이 명분과 역사를 바로세우는 중대한 과제임을 역설했다.
율곡 이이는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나
『선조수정실록』을 비롯한 몇몇 사료를 보면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전쟁을 예견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서애 유성룡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며,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을 초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주로 이이의 전집인 『율곡전서』에 수록된 김장생의「율곡행장」, 이정귀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기인한다. 지인이나 제자가 쓰기 마련인 행장이나 연보는 주인공의 사적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철저한 사료검증 후 인용하는 것이 기본 원칙인데, 국사학계의 석학이라는 이병도 교수가 『한국사대관』에서 이를 그대로 인용했고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사』에도 이 내용이 그대로 실린 후 아무런 비판 없이 다른 저작물에 옮겨져 현재 통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이는 병조판서로 임명된 후 「시무육조」를 통해 군정개혁을 촉구할 때도 ‘십만양병설’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기사는 『율곡전서』 중의 허다한 상소와 시폐를 진술한 차자箚子는 물론 『서애집』 중의 시폐를 진술한 상소와 차자에서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한 이식이 「율곡행장」, 「율곡시장」, 「율곡신도비명」, 「율곡연보」 등을 인용해 기사를 작성하고 의도적으로 이이의 경장계책에 ‘십만양병설’을 삽입하여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의 정국은 선조 8년(1575)에 동서가 분당된 후 서인들이 동인인 유성룡의 위공을 시기하던 분위기에서 이이의 이른바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반대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초래하여 국사가 낭패되었다는 부회적인 기사로 유성룡의 정치 역량을 폄하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국사학계의 일부 인사들은 이런 내용을 엄밀한 사료검증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과장 부회하여 일반 국민들의 역사인식을 오도하고 있다.
이 책은 국가의 공적 기록인 실록은 물론이고 동시대 제현諸賢들의 문집과 기타 기록 등 ‘십만양병설’과 관련된 모든 사료를 꼼꼼히 고증해 사실 여부를 고찰했으며, 이이가 주장했다는 ‘십만양병설’을 서애 유성룡이 반대했다는 실록의 기사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일반 국민들의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면밀히 분석 구명했다.
이순신과 원균, 누가 진정한 구국의 명장인가
근래 일부 논자들이 이순신과 원균의 사적을 거론하면서 원균은 용감한 장수인 반면 이순신은 보신책에만 능한 겁장怯將으로 묘사함으로써 국민의 이목을 현혹시키고 역사를 오도했다. 그 대표적인 저작이 『인물한국사』와 『원균 그리고 원균』이다. 이 책들은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뒤 별로 공을 세우지 못해 미관말직에 머물러 있다가 40대 중반에 와서 겨우 정읍현감이 되고 뒤에 영의정 유성룡에게 발탁되어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의 높은 관직을 갑작스레 받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부 작전에서 원균의 지휘를 받던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가로채어 원균보다 한 등급 높은 계급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또한 일본 간첩 요시라가 적장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 조정에 밀고했는데 이순신이 출동하지 않아 결국 정유재란을 초래했으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승전을 거두었을 때는 왜적이 물러가는 중이었다면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전국戰局을 수습한 이순신의 공을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조선사 3대 논쟁』은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뒤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웠는데도 도리어 군직을 빼앗기고 백의종군하게 된 정황, 적침 초기에 수많은 병기와 전선을 침몰시키고 군병을 흩어버리고 육지에 올라 도주하려 한 원균과 달리 적정을 세밀히 정찰한 후 침착하게 출동해 옥포해전과 한산도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후일 원균이 패전한 후 다시 통제사로 기용되어 노량대첩에서 12척의 전선으로 300척의 적선을 맞아 싸워 승리를 거둔 과정,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을 견제 방해하는 몇몇 조신들이 원균을 편들고 이순신을 배제하여 결국 무함 하옥하게 한 사건, 원균이 자업자득으로 왜적에게 유인되어 패사敗死하고 이순신이 재기 분전奮戰하여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다시 회복시키는 과정 등을 객관적으로 서술해 두 장수의 진면목을 살펴보았다.
각종 사료를 엄밀히 고증하여 이순신과 원균의 품성, 장수로서의 재간, 전쟁 중에 보여준 행적과 전공, 사망 당시의 상황 등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이 책을 통해 『인물한국사』와 『원균 그리고 원균』이 당시 원균을 옹호하던 선조 이하 정부 당국자들의 편향된 주장을 그대로 계승 대변하여 이순신을 의도적으로 매몰말소埋沒抹消시키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의 잘못된 통설을 바로잡은 책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사칠신 묘소가 있는 이유, 이이가 주장했다는 십만양병설의 진위 여부, 의도적으로 폄하된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조선사 3대 논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개인 문집과 기타 사료들을 꼼꼼히 고증했다. 과거 사료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은 역사연구의 기본이자 필수요소인데, 실제로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점이 간과되고 있다. 이는 역사기록이 정치의 기복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사관 정신을 내팽개친 일부 학자들이 사료를 곡해하고 사실史實을 억단臆斷하기 때문이다. 검증되지 않은 사료를 무분별하게 취사선택하고 확대 해석함으로써 국민의 이목을 현혹시킨 논자들의 주장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 책을 통해 일부 인사들의 과장?부회?억측으로 오도된 역사인식을 바로세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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