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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 | ▼a 897.106308 ▼b 2019 | |
| 245 | 0 0 | ▼a 시조, 서정시로 새기다 = ▼x Encounters with the Korean lyrical spirit : an anthology of Sijo / ▼d 맹사성 [외]지음 ; ▼e 고정희, ▼e 저스틴 M. 바이런-데이비스 편역 |
| 260 | ▼a 파주 : ▼b 아시아, ▼c 2019 | |
| 300 | ▼a 143 p. ; ▼c 19 cm | |
| 500 | ▼a K-포엣 스페셜 에디션 = K-poet special edition | |
| 500 | ▼a 공저자: 이현보, 이황, 정철, 신흠, 윤선도, 신계영, 이휘일, 황진이, 김천택, 박효관 | |
| 546 | ▼a 韓英對譯 | |
| 700 | 1 | ▼a 맹사성, ▼d 1360-1438, ▼e 저 |
| 700 | 1 | ▼a 이현보, ▼d 1467-1555, ▼e 저 |
| 700 | 1 | ▼a 이황, ▼g 李滉, ▼d 1501-1570 ▼0 AUTH(211009)116874 |
| 700 | 1 | ▼a 정철, ▼d 1536-1593, ▼e 저 |
| 700 | 1 | ▼a 신흠, ▼d 1566-1628, ▼e 저 |
| 700 | 1 | ▼a 윤선도, ▼g 尹善道, ▼d 1587-1671, ▼e 저 ▼0 AUTH(211009)85590 |
| 700 | 1 | ▼a 신계영, ▼d 1577-1669, ▼e 저 |
| 700 | 1 | ▼a 이휘일, ▼g 李徽逸, ▼d 1619-1672, ▼e 저 ▼0 AUTH(211009)80588 |
| 700 | 1 | ▼a 황진이, ▼d 1506-1544, ▼e 저 |
| 700 | 1 | ▼a 김천택, ▼e 저 |
| 700 | 1 | ▼a 박효관, ▼g 朴孝寬, ▼d 1800-1880, ▼e 저 ▼0 AUTH(211009)168028 |
| 700 | 1 | ▼a 고정희, ▼e 편역 |
| 700 | 1 | ▼a Byron-Davies, Justin M., ▼e 편역 |
| 900 | 1 0 | ▼a Maeng, Saseong, ▼e 저 |
| 900 | 1 0 | ▼a Lee, Hyun-bo, ▼e 저 |
| 900 | 1 0 | ▼a Lee, Hwang, ▼e 저 |
| 900 | 1 0 | ▼a Jeong, Cheol, ▼e 저 |
| 900 | 1 0 | ▼a Shin, Heum, ▼e 저 |
| 900 | 1 0 | ▼a Yun, Seon-do, ▼e 저 |
| 900 | 1 0 | ▼a Shin, Gye-young, ▼e 저 |
| 900 | 1 0 | ▼a Lee, Hwi-il, ▼e 저 |
| 900 | 1 0 | ▼a Hwang, Jin-i, ▼e 저 |
| 900 | 1 0 | ▼a Kim, Cheon-tack, ▼e 저 |
| 900 | 1 0 | ▼a Park, Hyo-gwan, ▼e 저 |
| 900 | 1 0 | ▼a Ko, Jeong-hee, ▼e 편역 |
| 900 | 1 0 | ▼a 바이런-데이비스, 저스틴 M., ▼e 편역 |
| 945 | ▼a KLPA |
Holdings Information
| No. | Location | Call Number | Accession No. | Availability | Due Date | Make a Reservation | Service |
|---|---|---|---|---|---|---|---|
| No. 1 | Location Main Library/Monographs(4F)/ | Call Number 897.106308 2019 | Accession No. 111825688 | Availability Available | Due Date | Make a Reservation | Service |
Contents information
Book Introduction
'K-포엣' 시리즈의 스페셜 에디션.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과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국내외 독자들에게 시조를 소개하기 위해 시조를 영문으로 번역한 작업물이다. 시조를 전공한 한국 학자(고정희)와 영국 중세 문학을 전공한 영국 학자(저스틴 M. 바이런-데이비스)가 공동으로 편역했다.
시조 전문가로서 고정희 역자는 번역 결과가 원문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노력하였으나, 두 언어 사이의 차이와 문화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특정 부분들은 직접적인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축어적인 번역보다 '대안 번역'을 찾는 방향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대안 번역이란, 원문과 번역문이 엄격하게 일대일로 대응하지는 않더라도 더 정확하게 원문의 의미와 뉘앙스를 전달하는 번역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스틴 M. 바이런-데이비스 역자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시조는 3행으로 이루어진 한국어 시가로,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노래로 불리었다. 이 시기 시조는 한국인들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적 도구였다. 현대 독자들은 시조를 감상하며 한국인의 서정적 심성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학자이자 관료들이었던 '사대부'들의 정제된 중세 철학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집에는 11명의 뛰어난 시인들이 지은 중요한 시조들이 소개되어 있다.
‘K-포엣’ 시리즈의 스페셜 에디션으로 『시조, 서정시로 새기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과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국내외 독자들에게 시조를 소개하기 위해 시조를 영문으로 번역한 작업물이다. 시조를 전공한 한국 학자(고정희)와 영국 중세 문학을 전공한 영국 학자(저스틴 M. 바이런-데이비스)가 공동으로 편역했다.
시조 전문가로서 고정희 역자는 번역 결과가 원문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노력하였으나, 두 언어 사이의 차이와 문화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특정 부분들은 직접적인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축어적인 번역보다 ‘대안 번역’을 찾는 방향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대안 번역이란, 원문과 번역문이 엄격하게 일대일로 대응하지는 않더라도 더 정확하게 원문의 의미와 뉘앙스를 전달하는 번역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스틴 M. 바이런-데이비스 역자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시조는 3행으로 이루어진 한국어 시가로,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노래로 불리었다. 이 시기 시조는 한국인들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적 도구였다. 현대 독자들은 시조를 감상하며 한국인의 서정적 심성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학자이자 관료들이었던 ‘사대부’들의 정제된 중세 철학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집에는 11명의 뛰어난 시인들이 지은 중요한 시조들이 소개되어 있다. 독자들이 각자의 나라와 문학 장르, 시대를 넘어 시조의 시적 자질과 서정적 형식을 두루 경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존재론적 시각을 제공하는, 시조의 정신
영문으로 번역된 한국의 고대 시가, 시조
시조는 음수율을 가진 3개의 시행으로 이루어진 운문이다. 3개의 시행은 각각 14개에서 16개의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음절들은 4개의 음보로 나뉜다. 시행의 맨 마지막 음절에서 각운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시조를 창작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시적 자질은 아니다. 시조 율격의 유일한 원칙은, 시조가 음수율을 가지고 있어 각 음보마다 배분되는 음절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시조의 율격적 자질은 영문 번역 과정에서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기에, 역자들은 시조의 정신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번역을 통해 율격적인 자질은 구현할 수 없더라도, 영역(英譯) 시조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다. 시조는 특유의 시적 이미지들을 통해 새로운 존재론적 시각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시조가 각 시행의 가운데에 휴지를 두어 시행을 의미론적으로 이분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원문의 한 시행을 두 시행으로 나누었다. 독자들이 시조를 산문보다는 운문으로서 감상할 수 있도록 도우며, 더욱 수월한 감상 경험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역자들은 시를 공부하고 가르쳐온 학자들로서 어떻게 해야 독자들이 영문으로 번역된 시조를 시로서 감상할 수 있을지를 고심하였고, 또한 어떤 시조를 선집에 포함시킬지를 결정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시조를 한 편의 서정시처럼
제1부에서는 <강호사시가>, <어부단가>, ‘정철 시조’와 함께 <도산십이곡>을 선별하였다. 신흠(1566-1628)의 시조는 이황이 남긴 유산과는 대조되는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신흠은 관료였지만 조정에서 쫓겨나는 비극적인 개인사로 하늘의 섭리를 회의하게 되었고, 자연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쫓겨난 노인의 노래(방옹시여)’라는 제목을 보면, 비극적이고 우울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제2부에는 윤선도(1587-1671)의 <어부사시사>를 실었다. 이 작품은 40수나 되어 양적 불균형이 생겨나기 때문에 전문을 실기로 한 건 어려운 결정이었다. 첫째, 윤선도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조 시인이다. 둘째 그의 시조 40수를 읽어나가다 보면 다른 시조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이미지들과 다시 조우할 수 있으며, 시조 장르 자체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제3부는 성리학자들의 전원 시조를 소개한다. 17세기에 이르면, 시조 시인들이 성리학의 철학적 사고보다 실제 생활을 시조에 반영하는 경향들이 나타난다. 신계영(1577-1668)은 관료였지만 말년에는 충청도 지방에 거처하며 시골에서의 삶의 모습을 시조에 반영하였다. 이휘일(1619-1672)은 경상도 지역의 성리학자였다. 이들처럼 고향에 머무는 것을 선호했던 시인들은 성리학자들이 이상으로 생각했던 자연의 섭리 대신, 일상적인 삶의 관찰과 전원적인 분위기를 시조에 담았다.
제4부는 사대부 아닌 다른 계층의 시인들이 쓴 시조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생은 양반 계층 남성들의 동반자로서 음악과 시로 유흥을 제공했던 여성들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님과 헤어졌을 때의 슬픔을 노래한다. 사실 사랑하는 님에게 버려진 여인의 슬픔은 남성 작가들이 임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전달하는 관습적인 은유로 활용해왔다. 그러나 기생들은 자신의 실제 연인에 대해 비판적이며, 연인을 자신보다 열등하거나 존중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보인다. 18세기부터는 중인 계층 남성에 의한 시조 장르의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중인 계층 남성들은 시조 장르에 기여하며 이후 시조의 가창문화를 이끄는 핵심인물들이 된다.
시조를 감상하는 경험이 서정시에 대한 독자들의 감수성을 넓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시조가 독자들에게 한 편의 서정시처럼 감상될 수 있길 바란다. 아무쪼록 이 선집의 독자들이 시조의 세계를 엿보고, 그 안에서 한동안 거닐며 의미 있는 통찰과 위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지은이
맹사성(1360-1438)
이현보(1467-1555)
이황(1501-1570)
정철(1536-1593)
신흠(1566-1628)
윤선도(1587-1671)
신계영(1577-1669)
이휘일(1619-1692)
황진이(16c)
김천택(18c)
박효관(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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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Introduction
신흠(지은이)
1566~1628.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성리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 비주류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사상적 대안을 모색하였다. 만물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유연한 관점을 지녀 다양한 색깔의 글을 남긴바, 그의 글은 주제가 호한하면서도 자유롭고 섬세한 감성을 보여 준다. 호는 상촌이며, 문집으로 <상촌집>이 있다.
윤선도(지은이)
조선 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시조 작가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字)는 약이(約而)이며, 호(號)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이다. 1612년 26세의 나이로 진사(進仕)에 급제했고,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1616년 당시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병진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 유배지에서 <견회요>와 <우후요> 등의 시조를 창작했다. 1618년 유배지가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졌다가, 인조반정(1623) 직후 대사면령이 내려 유배에서 풀려 전라도 해남으로 돌아갔다. 남인(南人)에 속했던 윤선도는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유배를 떠나는 등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42세(1628)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해, 당시 이조판서이던 장유(張維)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47세 때인 1633년에 다시 증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에서 생활하던 무렵,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자 향족(鄕族)과 집안의 노복(奴僕)들을 이끌고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 인근에서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이미 적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던 중, 태풍을 피해 잠시 머물던 곳이 바로 보길도였다. 이후 윤선도는 자연 풍광이 수려한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다. 52세 때인 1638년에는 병자호란 당시 서울을 지척에 두고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不奔問)’는 혐의로 탄핵을 받고,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게 된다. 이후 해남에 돌아와 집안의 대소사를 차남에게 맡겼으며, 1640년부터 해남의 금쇄동에 거처를 마련해 은거했다. 이후 10여 년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보길도와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나이 56세 때인 1642년에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연작 18수의 시조 작품을 창작했으며, 2년 후에는 <산중속신곡> 2수와 <증반금> 등의 시조를 짓기도 했다. 윤선도가 63세 되던 1649년 인조(仁祖)가 승하하고, 세자로 있던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즉위했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시절 사부를 지낸 바 있었기에, 이해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요체를 논한 <기축소(己丑疏)>를 올렸다. 1651년에는 자신이 거처하던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다. 66세가 되던 1652년에는 왕의 특명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이때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있는 별장에 머물면서 <몽천요> 3수를 창작했다. 하지만 이내 효종에 의해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조정에 나아갔고, 당시 권신인 원두표(元斗杓)의 비리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당해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7년(71세)에는 조정에 불려 갔다가 다시 관직에 제수되었고,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해 왕릉을 정하는 산릉의 간심(看審)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인을 대표한 논객으로 예송(禮訟)에 참여했다가 패배해, 당시 권력을 장악한 서인들에 의해 1650년 함경도 삼수에 유배되었다. 1665년(79세)에는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백운산 아래의 옥룡동에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2년 후인 1667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에 있는 거처 낙서재(樂書齋)에서 운명해, 해남의 금쇄동에 묻혔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윤선도의 삶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부로 있었던 봉림대군이 후에 효종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생애의 절반 이상을 관직보다는 유배지 은거지에서 지내야만 했으며, 반대 당파의 비방에 결연하게 맞서며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사(經史)에 해박했으며, 의약과 복서 및 지리 등에도 널리 통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6권 6책)가 있다. <어부사시사>·<오우가> 등 75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작품들로 인해 ‘자연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황(지은이)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 평생 이학 연구와 실천에 힘을 기울여 동아시아 이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종사하다 일찍 물러나 서당을 짓고 이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계몽전의』를 편찬하여 이학을 밝혔고, 『연평답문』 『심경부주』를 활용하여 수신에 힘을 기울이면서 『자성록』을 남겼다. 만년에 조정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 등 정책과 학문 양쪽으로 선정의 방략을 건의했다. 문하에서 김성일·유성룡·정구·조목·이덕홍 등 후일 영남학파를 이룬 주요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기대승·성혼·이이 등 당대 조선의 학자들 대부분이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후 조선과 동아시아의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현대에도 계속 재성찰되고 있다. 별세 뒤 도산서원이 건립되어 향사되었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황진이(지은이)
<기생시집>
정철(지은이)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웠으며,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같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26세에 진사시에 1등으로,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사헌부지평을 거쳐 좌랑·현감·전적·도사를 지내고,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이어 함경도암행어사가 되었다. 32세에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에 낙향했다. 43세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해 출사했다. 이후 사간·집의·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했다. 45세 되던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關東別曲)〉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가사와 시조 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48세에 예조판서로 승진해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역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에 사직하고 고향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했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의 가사와 수많은 시조·한시 등을 창작했다. 54세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가 되어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을 배제하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591년 건저 문제(建儲問題)로 진주로 유배,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을 받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충청·전라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지내고, 다음 해 명나라에 사은(謝恩) 행차를 다녀왔다. 이 사은사 행차가 빌미가 돼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寓居)하다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박효관(지은이)
자는 경화(景華), 호는 운애(雲崖)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유명한 가객이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아주 적다. 이는 그가 신분이 낮은 중인 계층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밝혀진 바는, 그는 본디 서울 오군영 소속의 수군(守軍) 일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객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생애 후반부에 종2품 동지중추(同知中樞) 벼슬을 얻기도 하나, 이 벼슬은 실직이 아니라 일종의 명예직이다. 수군을 지냈지만, 워낙 가객으로서의 명성이 높고 또한 대원군 휘하에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얻게 된 직함으로 보인다. 박효관은 당시 대표적인 음악 풍류회였던 ‘노인계’와 ‘승평계’의 수장으로, 많은 가객들 사이에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가객이었다. 이런 그의 가객으로서의 명성 때문에, 당시 여항 음악인들은 그를 존경해서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선생’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의 활동 중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흥선대원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가곡원류≫라는 방대한 가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김천택(지은이)
맹사성(지은이)
이현보(지은이)
신계영(지은이)
조선 중기의 문신.
이휘일(지은이)
고정희(옮긴이)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 고전시가 연구자로서 『고전시가 교육의 탐구』(2013), 『한국 고전시가의 서정시적 탐구』(2009), 『한국 고전시가와 문체의 시학』(2004) 등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영국 서리대학교에서 방문학자를 지낸 것을 계기로, 현재 연구의 관심사를 중세 문학에 대한 국제적인 시각을 갖추는 방향으로 넓혀 나가고 있다.
저스틴 M. 바이런-데이비스(옮긴이)
영국 서리대학교에서 2016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중세 후기 영문학 강의를 맡았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중세의 신학과 anchorite(봉쇄은수자)의 텍스트, 계시적 텍스트, 묵시적 텍스트들이다. 그는 Julian of Norwich에 대한 논문들을 출간하였고, 2019년에는 웨일즈대학교 출판사에서 Revelation and the Apocalypse in Late Medieval Literature: The Writings of Julian of Norwich and William Langland라는 단행본이 나올 예정이다. 현재 편집자, 연구자, 그리고 작가로 일하고 있다.
Table of Contents
서문 도입 제1부 사대부들의 고전적인 시조 강호사시가_맹사성 어부단가_이현보 도산십이곡_이황 정철 시조_정철 방옹시여_신흠 제2부 시조 장르의 정점 어부사시사_윤선도 제3부 사대부들의 전원 시조 전원사시가_신계영 전가팔곡_이휘일 제4부 기생과 중인 남성 가객들의 시조 황진이 시조_황진이 김천택 시조_김천택 박효관 시조_박효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