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서 8·15광복 전후까지, 근대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그 반세기 동안의 보고인 동시에 역사적 격동기를 관통해야 했던 근대적 모색의 기록이다. 우리 경영사와 기업사의 밑그림을 복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통과해야 할 실록이다.
상업이라고는 종로 네거리 ‘육의전’이 전부였던 조선에 외세의 식민지배와 함께 자발적으로 요청하지 않은 근대화의 충격이 밀어닥쳤다. ‘전차’에서부터 ‘활동사진’까지 근대화라는 유혹을 둘러싸고 변방 도시 경성이 들썩인다.
일본은 월등한 자본과 무력을 앞세워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이에 맞서 우리 토착상인들은 힘겨운 투쟁을 전개했다. 민족 자본을 형성하고 경성 상계의 주권을 지켜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이 역사적 시기, 그 드라마틱한 상계의 역사를 담았다.
5백 년 도읍 한성에서 근대 상업 도시 경성으로,
경계의 시대, 상계의 흥망성쇠를 통해 보는 근대 이야기
상업이라고는 종로 네거리 ‘육의전’이 전부였던 조선. 이 땅에 가혹한 외세의 식민지배와 함께 자발적으로 요청하지 않은 근대화의 충격이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번갯불 먹는 괴물 같은 ‘전차’에서부터 현실인지 화면인지 구별이 안 되도록 생생한 ‘활동사진’까지. 근대화, 그 달콤한 황금빛 유혹을 둘러싸고 조용했던 변방 도시 경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월등한 자본과 무력을 앞세워 야금야금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 우리 토착상인들은 힘겨운 투쟁을 전개했다. 민족 자본을 형성하고 경성 상계의 주권을 지켜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이 역사적 시기, 그 드라마틱한 상계의 역사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서 8·15광복 전후까지, 근대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그 반세기 동안의 엄밀한 보고인 동시에 역사적 격동기를 숨 가쁘게 관통해야 했던 치열한 근대적 모색의 기록이다.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은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우리 경영사와 기업사의 온전한 밑그림까지 복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맨 먼저 통과해야 할 귀한 실록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경성을 지켜낸, 경성을 살아낸 사람들
화륜거나 철마로 불렸던 기차가 씩씩거리며 달려오는 장면을 본 관객들은 스크린을 대신한 흰 옥양목 장막에서 기차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자신들을 덮칠까 봐 곧잘 비명을 지르곤 했다. (……) 그래서 영화가 모두 끝나고 불이 환하게 켜지면 관객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너도나도 장막 앞으로 몰려나갔다. 조금 전까지 실감나게 본 그 기차가 과연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 도깨비처럼 자신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인지 못내 궁금해서 장막을 들춰보거나 두드려보고는 했다.
-본문에서
하루가 다르게 정신없이 변화하는 조선 근대화의 정점, 경성. 그 안에는 정신이 혼미해지게 신기한 ‘활동사진(영화)’에 열광하고, 높은 하늘을 나는 안창남의 비행술에 박수를 보내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대모테 안경을 쓰고 젬병 모자를 눌러쓴 모던보이도 있었고, 짧은 치마와 작은 양산으로 멋을 낸 모던걸도 있었다.
또한 조선 3대 재벌로 꼽히며 언제나 많은·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김성수와 민영휘, 최창학과 같은 부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재산 규모와 축적 과정, 향후 앞날에 대한 전망은 서민들에겐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그런 부자들이 즐겨 다니던 고급 요릿집 명월관과 식도원에는 한 달에 당시 4만 원이나 저금하던 기생들도 있었다.
그런 중에는 서울 안 ‘명사’들의 자가용 자동차가 한 둘이 아니다. 맷 해 전만 하드래도 그런 줄 몰으겟든데, 요즈음에 와서는 장안에서 누구누구하는 ‘명사’들이란 거지반 가자용 자동차를 한 대쯤은 가지고 잇다.
이제 이분들의 사유하고 있는 자동차란 도대체 얼마나한 가격의 것들인가? 알어보면 아래와 갑다.
최창학崔昌學 - 1만 3,000원(지금 돈 15억 6천만 원)
민대식閔大植 - 8,000원(지금 돈 9억 6천만 원)
김기덕金基德 - 8,000원
방응모方應謨 - 8,000원
신석우申錫雨 - 7,000원(지금 돈 8억 4천만원)
박영철朴榮喆 - 6,000원(지금 돈 7억 2천만 원)
한학수韓學洙 - 7,000원
임병기林炳基 - 8,000원
-본문에서
하지만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당시를 살아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당장 내일 아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서민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입이 떡 벌어지는 높은 이자와 야박한 변제 독촉으로 서민들의 고혈을 빤다는 원성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끼니 해결이 급했기 때문에 임시변통을 해주는 전당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되는 물건이면 전당포에 갖다 맡기고, 겨우겨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경성상계』는 당시 경성을 주름잡으며 자가용을 타고 다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신문기자, 의사, 두부장수, 인력거 인부 등 당시를 살아가던 다양한 사람들의 현실적인 경제생활을 함께 보여주며 근대화와 함께 뿌리내리기 시작한 경성의 자본주의 진행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상계의 흥망성쇠를 통해 보는 근대 경성이야기
이 책이 조선 근대화와 함께 형성된 경성상계의 극적인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매우 유력한 텍스트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종로 육의전 상인의 맥이 끊기는 대목에서 가장 극명하게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종로 육의전의 명맥을 이은 가장 최후의 상인은 백윤수였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종로 네거리에서 견직물시전을 열어 부를 축적한 거상이었다. 백윤수는 대창무역이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청나라에서 견직물을 수입하여 되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당시의 그의 자본금 규모가 조선 최대의 재벌이라 불린 김성수 일가의 자본금의 반에 육박한 50만원(지금 돈 600억 원)이었다고 하니 그의 재산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이 백윤수가 훗날 비디오 아트를 창시해 세계적인 예술가로 칭송받은 백남준의 조부라는 것이다.
백윤수는 1924년 사망하고 경영권은 장남을 거쳐 사남인 백낙승에게 승계되는데, 백낙승은 메이지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한 수재로 상황판단력과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대창직물에서 이름을 바꾼 태창직물을 통해 만주에 포목을 밀수출하고, 해방직후 국내의 포목값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높은 폭리를 취하며 포목을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실권을 쥐고 있던 이승만 박사에게 접근해 많은 이권을 따내며 승승장구한다. 많은 계열사를 설립해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기업인 ‘태창 재벌’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태창 기업은 나중에 각종 파동과 사건 등에 휘말리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백낙승은 1960년 4.19 직전에 타계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백남일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창 재벌의 재산은 부정축재 처리 과정에서 국가에 헌납되고 백남일은 일본에 귀화하고 만다. 이로써 500년 넘게 이어오던 조선 상계의 상징 육의전의 마지막 후손마저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백윤수는 종로 육의전에서 조상 대대로 견직물 시전을 경영해온 거상으로, 혹독한 화폐 개혁의 고비를 힘겹게 넘어선 1907년에는 전통적인 시전 상인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기업 형태의 ‘백윤수상점’을 열었다. 이어 1926년에는 다시 지금의 종로 2가 종각 건물 바로 옆에 ‘대창무역주식회가’를 설립하면서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손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 백윤수의 후계자 백낙승은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기 직전에 타계했는데, 그의 장례는 매우 쓸쓸했다고 한다. 종로 시전 상인의 마지막 후손이자, 이 땅에 맨 처음 재벌을 건설한 총수의 죽음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었다. -본문에서
조선의 상업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종로 네거리 육의전의 몰락과 때를 같이하여 일본 상인들의 경성 진출이 활발해졌다. 일제의 본격적 침략과 함께 경성으로 진출한 일본 상인들은 지금의 남산 아래 진고개 일대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터를 잡으면서 ‘혼마치’라 불리기 시작한 이 지역은 집단적인 일본인 거류 지역이었다. 크고 작은 일본인 상점들이 이 지역에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인 중심의 북촌 상가와 대비되는 경성의 주요 상업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든든한 조선총독부의 지원과 막대한 물량공세를 퍼부은 일본인 상점과 경쟁하기에 조선 상계는 어려움이 많았다.
종로와 혼마치의 상권 경쟁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종로의 화신백화점과 혼마치의 미쓰코시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백화점은 ‘풍요와 소비의 판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근대 상점이었다. 따라서 백화점 간 경쟁은 단순한 경영 싸움이 아니라 조선과 경성 상인들의 자존심 싸움이자 민족적 자존심 대결이었다.
따라서 백화점의 패권을 둘러싸고 종로와 혼마치를 대표하는 두 백화점의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다.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은 동아백화점을 인수하며 종로에서의 입지를 견고히 다진다. 또한 일본 현지에 대량 물류창고를 지어 좋은 물건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펼쳐나간다. 화신백화점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박흥식은 혼마치의 일본 백화점에도 뒤지지 않는 위용을 과시하는 새 빌딩을 쌓아올리고 화신백화점을 문을 다시 연다. 이처럼 종로의 화신백화점은 단순한 백화점이 아니라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쓰코시, 조지야, 히라다, 미나카이백화점에 맞서 경성을 지키는 조선인 상권의 자존심으로서 꿋꿋하게 그 입지를 지켜나갔다.
광복, 명멸하는 상계의 새 판도
이처럼 8.15광복 직후 줍다시피 해서 적산기업을 불하받은 데 이어, 6.25 한국전쟁 이후 외국 원고자금으로 이루어진 군납과 관납을 비롯한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는 그들에게 다시없는 ‘노다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절호의 기회를 통해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전혀 낯선 이름들의 벼락부자, 아니 새로운 기업 집단이 재계에 속속 부상했다. -본문에서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경성 상계에 새로운 변화가 닥친다. 단파 방송을 통해 일본이 항복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중요 문서와 서류를 소각했고 이와 함께 화폐 발행을 남발해 그 돈으로 각급 국책회사 직원들의 퇴직금과 재선 일본인의 귀국 경비 등으로 사용했다. 식민경제의 마궁이며 수탈의 원흉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도 광복과 함께 폐쇄됐다.
지금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경성 상계의 유력 기업가들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그 흥이 다하게 된다.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은 ‘반민족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대상 1호로 수감된다. 이렇듯 해방 이후 경성 상계의 유력 기업가들이 반민특위의 숙청 작업으로 비틀거릴 때, 젊고 새로운 기업들이 부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기업들은 일본인들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버려진 적산기업을 거의 거저라 하다시피 불하받으면서 한 순간에 기업의 몸집을 불릴 수 있었다. 더욱이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조차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전쟁 이후 복구 작업을 위한 외국의 원조 자금이 제공되었고, 각종 시설의 복구는 이들 기업에겐 황금파이와 같았다.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온다고 했던가. 이렇듯 새롭게 부상한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경성 상계를 지키던 상인들은 역사 속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경계의 시대, 경성 상계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 세대가 또 지나 우리 재계사의 역사가 되었다.
정보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