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일본 측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때 동원한 조선훈련대(일본군장교가 교육) 제2 대대장 우범선은 사건 후 일본으로 망명, 일본 여자와 결혼한다. 그 후, 우범선은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 현 구레 시에서 자객 고영근에 의해 살해된다.
고영근은 자신의 노복인 노윤명과 함께 우범선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인근 파출소에 자수하여 살해 이유를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고영근은 민씨가의 심부름꾼 출신으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자로 만민공동회회장을 지냈다. 그후 폭탄테러사건을 일으켜 수배를 받자, 1899년 일본으로 망명가 있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외교문서와 당시 일본신문 보도 등의 자료를 발굴하여,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고영근에 의한 우범선 살해사건의 진상 및 배경, 재판과정 등의 전모를 밝혔다. 아울러 우범선의 자술서,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사카이 나카)의 사건 후 신문 인터뷰 (총4회 연재)기사, 우범선 살해사건 판결서(예심, 1심, 2심) 전문 등의 자료를 발굴했다.
또한 사형선고를 받은 고영근의 구명을 위해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 등을 상대로 직접 벌인 막후교섭과 러일전쟁 개전(1905년2월)을 앞둔 일본 측이 전쟁 중 조선 측의 협조를 받기 위해 ‘고영근 감형’을 대한(對韓) 외교카드로 사용한 외교비화 등이 처음 밝혀진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미스터리
왜 자객 고영근은 우범선을 살해했는가?
새로운 자료 발굴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모를 재구성한 역사 논픽션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명 ‘여우사냥’의 전모를 밝힌다.
“여우는 베어 버려라!”
1895년 10월 8일 ‘여우사냥’(명성황후 시해)에 나선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가 가장 신임한 조선인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 그는 사전에 극비 정보를 일본에 제공하고, 일본 낭인 등이 경복궁에 난입할 때 훈련대 병력을 이끌고 동참한다. 명성황후의 사체를 소각, 매립할 때 우가 지시했다는 기록과, 우가 “왕비를 죽인 것은 자신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일본 외교문서도 있다.
시해사건 8년 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우장춘과 함께 히로시마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던 우범선을 자객 고영근이 찾아가 칼로 찔러 살해한다. 일본 경찰에 자수한 고영근은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살해 동기를 밝혔고, 히로시마재판소는 고영근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 우범선은 왜 조선인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확신범’이었는가?
- 고영근은 왜 일본까지 쫓아가서 우범선을 살해했는가?
- 고영근은 과연 고종이나 민씨일파가 보낸 ‘왕실파견자객’인가, ‘자발적인 자객’인가?
-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간에 고영근 선처를 둘러싼 막후외교 교섭의 진상은 ?
- 조선총독부는 왜 우범선 사후 수십 년 간 그의 장남 장춘長春과 차남 히로하루弘春를 ‘관리’하고 ‘우대’했는가?
- 능참봉 고영근은 어떻게 고종의 능비를 세우는 데 성공했는가?
개요
1895년 10월 8일,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하에 일본 측이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할 때 동원한 조선훈련대(일본군장교가 교육) 제2 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은 사건 후 일본으로 망명,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 농학자 우장춘(禹長春)이다.
우범선은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 현 구레 시에서 자객 고영근(高永根)에 의해 살해된다. 고영근은 자신의 노복인 노윤명(魯允明)과 함께 우범선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인근 파출소에 자수하여 살해 이유를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고영근은 민씨가의 심부름꾼 출신으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자로 만민공동회회장을 지냈다. 그후 폭탄테러사건을 일으켜 수배를 받자, 1899년 일본으로 망명가 있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외교문서와 당시 일본신문 보도 등의 자료를 발굴하여,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고영근에 의한 우범선 살해사건의 진상 및 배경, 재판과정 등의 전모를 밝혔다.
아울러 우범선의 자술서,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사카이 나카)의 사건 후 신문 인터뷰 (총4회 연재)기사, 우범선 살해사건 판결서(예심, 1심, 2심) 전문 등의 자료를 발굴했다.
또한 사형선고를 받은 고영근의 구명을 위해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 등을 상대로 직접 벌인 막후교섭과 러일전쟁 개전(1905년2월)을 앞둔 일본 측이 전쟁 중 조선 측의 협조를 받기 위해 ‘고영근 감형’을 대한(對韓) 외교카드로 사용한 외교비화 등이 처음 밝혀진다.
이 책에서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주요 내용
1. 자객 고영근 진술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영근은 “국모를 시해하고 사체를 태운 극역대악”인 우범선을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처단했다고 재판과정 등에서 진술했다. 따라서 자신을 단순 살인범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재판장과 법리논쟁을 벌였다.
2.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한 고종
사건직후 고종이 주한 일본 공사를 불러 고영근에 대해 선처를 부탁한다. 고영근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노윤명은 무기에서 12년으로)되고, 1904년 3월 방한한 이토 히로부미(당시 추밀원의장)에게 고종이 직접 국내 송환을 부탁하는 비밀외교 교섭이 진행되기도 한다. 그 결과 고영근은 5년여를 일본 감옥에서 복역하고 1909년 석방돼 한국으로 돌아온다.
3.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의 능참봉이 된 고영근
고영근은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명성황후와 합장된 금곡리 홍릉의 능참봉이 된다. 능참봉 고영근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세우지 못하게 한 고종의 능비를 1922년 12월 자의로 건립하여 큰 소동이 벌어진다. 하지만 일본 측은 3.1 독립운동 직후에 조선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어쩔 수 없이 고영근이 세운 능비를 인정한다. 당시 신문 지상에 ‘고종능비사건’이 대서특필됨.
4. 훈련대 해산을 일본 측에 제보한 우범선
우범선은 시해사건 열흘 전(9월 27일) 훈련대 해산이라는 결정적인 정보를 일본군 장교와 미우라 공사에게 제공하고, 경복궁에 침입하기 하루 전날 미우라 공사와 일본군 책임자 우마야바라(馬屋原務本) 일본군 수비대 대대장과 최종 전략회의를 가진데 이어, 일본군 수비대의 최종대책회의에도 참석했다. 이는 일본의 외교문서, 일본군 진중일지 등의 자료에서 드러난다.
5. 우범선이 일본 망명 중 남긴 자술서의 내용
우범선은 일본 망명 중 자신의 심경을 적은 <자술서>와 고향을 그리는 한시(2수)를 남겼다. (오사카아사히신문, 1903년 11월 28일자). 우가 남긴 유일한 기록인 이 자술서에서 그는, 자신이 을미사변에 참가한 것을 “악정을 타파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망명 후 반성하기는 커녕 “영웅인양 행동하고 있었다”고 일본의 저명한 교육자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가 지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언급한다.
6. 우범선, “왕비를 죽인 것은 자신”
우범선이 살해되기 직전인 1903년 여름, 윤효정(尹孝定 )등 조선 망명인들과의 주석에서 “(우범선이) 전에 왕비를 죽인 것은 자신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윤효정이 고영근에게 우범선 살해계획을 제의한다. 고영근은 우범선 살해의 공을 독차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계략으로 윤의 살해계획을 일본경찰에 밀고한다. 결국 윤은 일본에서 추방당하고 고가 우에게 접근해 단독으로 범행에 성공한다.
7. 친일파 망명자들을 관리하고 우대한 일본
당시 일본 정부는 대부분 친일파였던, 수십 명에 달하는 일본 망명 조선인에게 생활보조비를 지급했다. 조선에서의 직급이 차관급 이상의 경우 월 35엔, 차관급 이하는 월 20엔씩 지급했다. 훈련대 대대장인 우범선은 월 20엔의 수급 대상자이나, 고영근과 노윤명은 수급대상자가 아니어서 격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8. 우범선의 두 아들 장춘과 홍춘(히로하루)을 돌본 일본 정부
우범선 사후 20여년이 지난 1920년대 중반까지 그의 장남인 우장춘과 동생 히로하루(弘春)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조선총독부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학비가 지급되었다.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에게도 조선총독부로부터 지원금이 나오는 등 이들 가족이 ‘관리’ ‘우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조선 지배를 놓고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일본으로선 명운이 걸린 명성황후 제거(미우라는 ‘여우사냥’이라 명명)에 우범선이 훈련대 병력을 이끌고 동참해서, 일본 측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데 대한 논공행상으로 보인다. 당시 훈련대를 동원하지 못했을 경우 일본 측은 ‘입궐의 목적’(왕비 살해)을 달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9. 우장춘의 ‘씨 없는 수박’은 없다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평가받던 우장춘은 1950년 3월 한국으로 와서 한국농업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1959년 8월 병사했다. 그러나 교과서에도 실려 한국인이면 대부분 알고 있는 “우장춘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는 허구다. 씨 없는 수박을 세계최초로 개발한 것은 일본인 교수이며, 우장춘은 단지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해 보인 것뿐인데 ‘개발’했다고 잘못 전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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