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설집 <마녀가 된 엘레나>이후 펴낸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익숙한 사물과 반복되는 시간, 수많은 관계들과 공방전을 벌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그러한 공방전 속에서도 죽음을 위협하는 공포의 순간이 올 때는 필사적으로 불안에 몸을 맡기는 평범한 인간들을 대표한다.
작가는 그들을 통해 과연 이 삶이 생물학적으로 유영한다는 차원 말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또한 특유의 감각으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과 시간의 공간화를 표현했다. 백년전쟁의 아득한 중세에서 6.25전쟁의 현대로, 현대의 남북한에서 스웨덴에 이르기까지 중세와 현대, 이곳과 저곳 등의 시공간을 병치하고 몽타주한다.
그곳의 인물들은 전쟁터에서 집단의 명예와 희생이라는 대의명분 속으로 덧없이 사라져갈 필부와 장삼이사 등이다. 작가는 그들의 육체 깊숙한 깊숙한 곳에 새겨진 고통과 좌절된 꿈을 포착해 사실적이고 환상적인 필치로 담아낸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젊은 작가 양유정의 두 번째 소설집 『12월을 꿈꾸는 jun의 이야기』를 펴낸다.
문학평론가 복도훈은 그를 두고 ‘도저한 삶의 필멸과 싸우는’ 작가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유정 소설 속에 인물들은, 익숙한 사물과 반복되는 시간, 수많은 관계들과의 공방전 속에서 회의를 느끼며 과연 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유영한다는 차원 말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방전 속에서 죽음을 위협하는 공포의 순간이 올 때에는 필사적으로 불안에 몸을 맡기는 인물, 그것이 우리들의 초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양유정이 얘기하는 우리들의 초상이란 죽음의 기를 들고 출발선에 서있는 모순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일 테다. 양유정은 말한다. 착란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는 것이 아닌 시간과 시간 사이 윗집과 아랫집 사이, 구멍 안과 밖의 사이에서 온다는 것을.
착란의 끝에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을 얻기도 하며 몸을 절단하고 도려냄으로서 자아와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해체로 확장 시킬 만큼 , 그 사이, 즉 그 간극은 결코 가벼운 언어와 시간이 아님을 그는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첫 소설집 『마녀가 된 엘레나』에서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의 이면성, 그 양면의 시간 속에 들끓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무한의 상상이었다면 두 번째 소설에서 양유정은 양면이 아닌 하나의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시간의 동시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양유정의 소설은 부메랑에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삶에 대해 던진 물음표인 부메랑은 타인과 사물이 개입하여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여기서 공존은 함께 산다는 것 보다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동시성을 얘기함에 있어서 양유정 소설이 가진 발화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2월을 꿈꾸는 jun의 이야기>는 3인칭 시점의 서술인 듯하지만, 소설 속 인물이 현실을 바라보는 서술자의 개입은 일반적인 3인칭 시점의 소설들이 가진 발화의 영역을 뛰어 넘는다.
그는 이 세상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의 착란은 내면의 세계 속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자신의 천성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사물과 시간들은 그의 내면이 아닌 외부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 외부의 것과 움직임을 달리하는 내면의 세상은 그 자체의 체계대로 움직여 결국 외부와 내면의 세계가 함께 있지 못하고 어긋나버려 서로를 동일한 시간의 순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12월을 꿈꾸는 jun의 이야기 중-
양유정이 가지고 있는 부메랑은 그 속도에 의해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 가는 곳곳마다 그의 시선이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을 포옹하고 돌아와, 사이를 사이를 파고드는, 그리하여 모든 간극들의 소통을 돕는 것이 그의 소설의 힘이자 우리가 그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일 테다.
정보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