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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 (11회 대출)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서영교, 1967-
서명 / 저자사항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 / 서영교 지음
발행사항
파주 :   글항아리 :   문학동네,   2010  
형태사항
271 p. : 삽화 ; 21 cm
ISBN
9788993905229
일반주기
"혜성 떨어질라, 왕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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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34 2010z1 등록번호 111599256 (5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2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34 2010z1 등록번호 111599257 (5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3 소장처 의학도서관/보존서고4/ 청구기호 953.034 2010z1 등록번호 131038972 (1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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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34 2010z1 등록번호 111599256 (5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2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34 2010z1 등록번호 111599257 (5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의학도서관/보존서고4/ 청구기호 953.034 2010z1 등록번호 131038972 (1회 대출)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컨텐츠정보

책소개

한.중.일 고문서에 나타난 혜성 기록을 통해 신라사와 궁중 암투를 새롭게 고증한 책이다. 이 책은 신라의 밤하늘을 가로지른 핼리혜성을 변수로 설정하고 신라시대에 벌어진 '왕들의 연이은 죽음', '군사 반란'과 같은 큰 정치적 사건부터 향가 창작이라는 문학행위의 시대적.정치적 배경까지 읽어낸다.

저자는 6500만년 전 멕시코 유카탄 반도 부근에 떨어진 직경 10킬로미터의 혜성이 가져온 공룡시대의 종말, 과거 크게 번성했던 이집트, 아시리아 문명 등이 통째로 사라졌던 사례를 통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고대인들에게 혜성이 '실질적인 공포'로 경험되었고 그 경험이 유전되어서 미신처럼 전해졌으며, 그 미신이 특정한 혼란기에 야심가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한·중·일 고문서에 나타난 혜성 기록을 통해
신라사와 궁중 암투를 새롭게 고증한 역작!

왜 혜성이 나타날 때마다 신라왕은 피살되었는가?
향가는 신라의 집단공포를 다스리기 위한 주술행위였나?

..........

신라 후기 4년여에 걸쳐 벌어진 근친살해의 연속은
왕실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고, 신라의 멸망을 앞당겼다
그 배후에는 반역을 합리화해준 자연현상, 혜성이 있었다 그리고
혜성이 하늘을 덮친 틈을 타서 왕좌를 덮친 음험한 마음이 있었다


책의 핵심 주장들

· 인간이 있는 역사를 표방해온 20세기 역사학은 행위에 대한 탐구에 치우쳐 인간의 활동 무대인 자연환경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자연은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했다.

· 저자는 6500만년 전 멕시코 유카탄 반도 부근에 떨어진 직경 10킬로미터의 혜성이 가져온 공룡시대의 종말, 과거 크게 번성했던 이집트, 아시리아 문명 등이 통째로 사라졌던 사례를 통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또 16년 전 혜성 ‘슈메이커-레비9’가 목성과 충돌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생중계되었을 때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보유한 폭탄을 동시에 폭파시킨 것의 600배에 상응하는 충격이 관측되었다는 점을 예로 들어가며 고대인들에게 혜성은 “실질적인 공포”로 경험되었고 그 경험이 유전되어서 미신처럼 전해졌으며, 그 미신이 특정한 혼란기에 야심가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 이 책은 6~8세기에 걸쳐 신라인들이 핼리혜성이라는 천체의 괴변에 대하여 ‘불운의 전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에서 “나라의 권력자 누군가가 죽거나 전쟁이 벌어져야 한다”는 확신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 신라의 왕들은 혜성이 출현하면 하늘에 장중한 의례를 연출해서 바쳤다. 「혜성가」와 「도솔가」는 그 산물이다. 왕들은 민심이 흔들릴까 항상 고심하며 살았다. 「혜성가」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대결이라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대결구도의 과정에서 수나라를 선택한 신라가 전운이 감도는 극도의 위기감을 떨쳐내기 위해 집단 주술로 부른 노래였다.

· 월명사의 「도솔가」가 지어진 배경인 “두개의 해”는 단순히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낮에도 그 꼬리가 훤히 관찰될 만큼 밝은 혜성이 지구를 지나간 것이었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의 고문헌과 상호비교를 통해 『삼국사기』에는 누락된 이 사실을 고증한다. 그리고 「도솔가」의 배경으로 ‘안록산의 반란’이라는 당시의 세계적인 사건이 동아시아 각국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 신문왕대 보덕성민의 반란과 진압은, 당의 압박과 진골귀족의 견제로 내외의 어려움을 겪던 신문왕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기획 상품이었다. 신문왕대의 군비증강과 군대개혁 등을 같이 살폈다.

· 혜공왕대에 일어난 다섯 차례의 정변은 결국 혜공왕의 죽음을 불러왔다. 그 배경엔 반란을 합리화해준 혜성의 존재가 있었다.

· 희강왕, 민애왕, 장보고의 연이은 죽음은 ‘혜성의 등장=권력자의 죽음’이라는 도식이 성립된 신라 하대 정치적 혼란기에 등장한 혜성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불러오는지를 보여준다.


책 소개

eposode
“착오가 분명합니다. 발표자는 왜 2개의 혜성을 1개로 봅니까. 기록에는 838년의 혜성은 10월에 나타났다가 12월에 사라졌고, 또 다른 혜성이 그 이듬해인 839년 정월에 나타나 2월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건 분명 2개의 혜성입니다.”
회의장은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청중들은 발표자가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 그의 입만 쳐다보았다. “어쩌다 저런 실수를 했지?”하며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발표자가 입을 열었다.
“기록은 정직합니다. 하지만 혜성은 2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다만 838년 10월의 혜성이 12월에 사라졌다고 한 것은, 그 혜성이 태양의 근일점을 지나면서 지구에서는 관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혜성이 아무리 밝아도 태양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후 혜성이 태양에서 멀어져 지구로 접근할 때 다시 관측이 가능해졌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혜성인 것이죠.”
토론자는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기록에 있는 그대로 지적했을 뿐입니다.”

2006년 부산대에서 열린 역사학 학술대회의 한 풍경이다. 토론은 질책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에 기반한 지적이었다. 문헌사학자인 토론자는 문헌의 축자적 해석에 충실했지만, 그것이 묘사하는 대상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가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1개의 혜성을 2개의 혜성으로 보는 잘못을 범했다.
***
이 책은 신라의 밤하늘을 가로지른 핼리혜성을 변수로 설정하고 신라시대에 벌어진 ‘왕들의 연이은 죽음’ ‘군사 반란’과 같은 큰 정치적 사건부터 향가鄕歌 창작이라는 문학행위의 시대적·정치적 배경까지 읽어낸다. 그를 통해 기록이 성근 고대사의 전개를 좀더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이해하고, 벌어졌던 일들을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내재적인 심리로부터 발본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시도이다.
이런 접근은 고대사학계에서는 아직 생소하다. 17세기 조선시대에 소빙하기가 존재했다고 선구적으로 주장한 이태진 서울대 교수 이후, 자연현상으로 고대사의 새로운 이해를 도모한 경우는 이 책이 처음이다.
위에 인용한 토론회의 분위기는 바로 모든 새로운 시도가 부딪치는 갈등의 전형적인 장면이다. 이 논문을 비롯해 이 책의 토대가 된 다섯 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기까지 저자는 몇차례 거절을 당했다. 심사자들은 “왜 우리나라 역사기록에 없는 사실로 우리 역사를 해석하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고대 사서에는 무수한 혜성 기록이 등장하지만 이런 천체天體 이변은 큰 역사적 변수로 간주되지 못해왔다. 아주 심한 가뭄이나 홍수, 연이은 기근과 전염병 등 경제적, 물적 타격을 입히는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뤄져왔을 뿐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 반박했다.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혜성과 같은 천체 이변은 고대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전염성이 강한 공포는 그에 대응하는 ‘정치적 행동’을 불러온다고 말이다. 또한 저자는 강조한다. 고대이든 현대이든 간에 지구를 지나가는 혜성은 같은 날 전 세계의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목격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이 없다고 해서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핼리혜성이 신라의 밤하늘을 비추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 게다가 중국의 기록문화는 지난 1500년 동안 338회나 출현한 핼리혜성을 거의 모두 기록하고 있다. 오직 딱 한번 놓쳤을 정도로 꼼꼼했다. 사서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고대인들이 세계를, 특히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오늘날의 우리와 많이 달랐다. 하늘의 기상이변은 곧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하늘의 분노를 의미했다. 이는 곧 그러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나라가 평온할 때는 이러한 기상이변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왕권이 불안하거나 전쟁의 기운이 감돌 때, 기근이 심하고 백성들이 가중된 세금과 노역에 허덕일 때는 ‘반란’의 정치적 논리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라 하대의 정치적 격변기에 등장한 혜성은 “그 나라 최고위 정치지도자 중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또한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있었는데 월명대사가 도솔가를 지어 부르자 사라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백성들의 공포와 분노를 다스려 권력에 대한 도전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신라 권력지배층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저자는 한·중·일 고문서를 상호 비교하고 거기서 신라의 사람들이 ‘분명히’ 목격했을 법한 혜성 기록을 추려냈고, 이것을 당대의 사건들과 연결시켰다. 이 책은 그러한 연관성을 돌다리 하나하나 두드려가듯 섬세하게 입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008년에 펴낸 『고구려 전쟁의 나라』에서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을 코드로 고구려가 동아시아 강소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읽어내 주목받았던 저자는, 이번 책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을 통해 고대의 정치사회 그리고 고대인들의 심성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인식도구’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제1장 「신라는 융천사의 혜성가를 언제, 왜 만들었나」에서는 「혜성가」의 창작의도를 추적하고 있다. 그 추적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아래와 같이 간단히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금강산에 놀러 가려고 했을 때, 혜성이 심대성을 범했다. 낭도들이 의아해하여 여행을 중지하려고 했다. 이때 융천사가 향가를 지어 부르매 혜성이 없어지고 일본병이 물러가서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진평왕이 기뻐하여 낭도들을 풍악에 놀러 보냈다.”

하지만 융천사의 「혜성가」는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정치적 위기가 있었고 그를 타개하기 위한 왕명에 따라 지어졌다. 그리고 기록은 향가를 지어 부르자 일본병이 물러갔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엔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정말 향가의 주술성이 그 효험을 발휘한 것일까? 이 수수께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 동아시아의 정치구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6~7세기 고구려는 수나라와 맞섰다. 제국 유지에 필수적이었던 돌궐과의 동맹이 고구려의 이간질로 파기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별렀다. 신라는 수나라의 편이었다. 진흥왕대부터 진평왕대까지 영토팽창 의욕을 불태우던 신라는 수와 공조해서 고구려 국경을 침범하며 괴롭혔다. 그러던 607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큰 혜성이 나타나 신라 하늘에 100일간 떠 있었다. 나라에 위기감이 고조됐다. 왕실에서는 혜성의 소멸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했다. 「혜성가」는 이때 부른 노래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고 그 준비의 일환으로 신라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608년 신라 변경을 침범해 8000명을 사로잡았고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고구려는 예전부터 신라를 압박했다. 일본에 사신을 보내 신라를 칠 것을 요구했고 실제 대규모 왜병이 신라 침공을 위해 해안에 배치되었다가 장수가 병들어 죽는 바람에 무산된 적도 있었다. 백제도 고구려와 공조해서 신라를 침공했다. 드디어 612년 수나라의 30만 대군이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이 압록강에서 고구려군에게 전멸 당했다. 세계 최강이라 믿었던 수나라의 참패는 신라에게 큰 충격이었다. 마치 607년의 혜성이 불운의 전조였던 것처럼 계속 신라 지배층의 머리를 짓눌렀다. 613년 수나라의 2차 고구려 침공은 양현감의 반란으로 좌절됐다. 수나라는 드디어 분열 조짐이 보였다. 신라는 백고좌회라는 거대한 국가적인 불경 읽기 법회를 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100개의 등불을 밝혔고, 100개의 향불을 피웠으며, 100가지 색깔을 꽃을 뿌려 삼보를 공양했다. 그러면서 혜성의 저주가 풀리기를 기원했다.
저자는 말한다. “신라가 고구려, 왜, 백제 3국에 포위된 상황에서 출현한 607년의 핼리혜성은 신라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혜성가」는 술렁이는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국가에서 행한 대규모 의례에서 불려진 노래였다”고 말이다. 「혜성가」는 결코 국문학자들이 말하듯이 “집단적으로 창작되고 전승된 민속의 산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대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명백히 현실적 의도로 창작된 작품이었다.

제2장 「신문왕대 보덕성민의 반란과 핼리혜성」에서 저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조에 나오는 혜성 기록에 대해 사료 비판을 했다. 『삼국사기』에는 단 한차례 혜성 기록이 등장하지만 양당서(구당서와 신당서)와 『일본서기』와 비교해보면 신문왕 대에는 총 세 번의 혜성 등장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고증된 혜성 기록과 신라 당대의 사건들을 비교했다. 저자는 신문왕이 직면한 대내외적 위기를 살펴봤다. 신문왕은 제위에 오르자 마자 부인의 아버지, 즉 장인이 주동자가 된 반란 음모를 밝혀내고 장인을 사형장에 보내야 했다. 불안한 왕권에 대한 도전의 기미는 신문왕 재위 내내 존재했다. 여기에 당나라의 재침에 대한 우려도 끊이지 않았다. 당 고종은 태종무열왕의 ‘태종’ 칭호를 개칭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것은 신라의 정체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었다. 신문왕은 자기 주변에 포진한 진골귀족들에 대해 불신을 품은 가운데 당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신문왕은 당나라와의 대결을 택했다.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확충해서 당에 맞섰다.
이러한 와중에 나타난 혜성은 신문왕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그는 왕태자 시절인 668년 4월에 나타난 혜성을 직접 목격했다. 그해 9월 고구려가 멸망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 683년 음력 10월에도 혜성이 찾아왔다. 국내외적인 정치적 위기를 겪던 신문왕은 이 혜성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저자는 『삼국사기』에서 힌트를 얻는다. 혜성이 나타나고 얼마 후 신문왕은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의 성을 준 뒤 왕경에 머물게 했다. 그 이듬해 10월 어느날에도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나타났다. 바로 그 다음 달인 11월 보덕왕 안승의 조카인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저자는 이 일련의 사건을 신문왕이 기획한 정치적 학살이라고 본다. 먼저 보덕국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 고구려 멸망 이후 나라를 잃은 고구려 유민들은 북으로 남으로 흩어졌는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신라 땅 금마저(전북 익산 지역)에서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어느 정도 자치를 허락받은, 일종의 제후국처럼 경영됐다. 혜성이 나타나자 신문왕은 보덕국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왕 안승을 왕경에 불러들였다. 그 이듬해 유성이 떨어지자 신문왕은 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제 희생양을 찾아야 했다. 다시 보덕국에 화살이 향했다. 왕이 없는 빈 자리에서 왕의 조카가 반란의 수괴로 지목되었고, 신라 왕의 군대가 그를 재판도 없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대문이 죽자 보덕성민들은 여기에 항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는 이 반란조차 철저하고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남쪽으로 분산 배치한 보덕성민 중 신체 건강한 자들을 불렀고, 그들을 조직하여 신라 중앙군인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을 만들었다. 백제의 잔민들을 모아서는 청금서당을 창설했다. 신문왕은 이렇게 위기를 돌파해나갔다.

제3장 「월명사 도솔가와 두 개의 해」에서는 「도솔가」의 창작배경을 밝힌다.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 조를 보면 경자년庚子年(760) 4월 초하루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자 월명사를 불러 도솔가를 지어 부르니 이변이 사라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국문학계를 중심으로 한 그간의 연구에서 「도솔가」가 국가적 불교의례의 한 부분이고, 국난 극복의 의지를 담았다는 것은 밝혀졌다. 하지만 저자는 “도솔가가 창작된 당시(760년) 신라가 처한 불안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깊은 고려가 없었다”고 지적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저자는 일본 학자 오카야마를 인용하며 그 배경으로 ‘안록산의 난’을 제시한다. 오카야마는 「도솔가」가 사실은 “두개의 해를 사라지게 하려고 부른 노래가 아니라, 당에서 일어난 안록산의 반란이 미륵의 하생으로 평정되기를 바라는 노래였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의 참신함을 인정한다. 안록산의 난은 당의 정치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국가의 구조를 변형시켰다. 무엇보다 당의 무정부 상태는 신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신라에도 큰 불안감을 조성시켰다는 얘기다. 하지만 오카야마가 “두개의 해를 단지 기이한 천문현상으로만 치부하는 것”에는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두 개의 해는 “낮에도 관측될만큼 크고 밝은 핼리혜성이 지구를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또 하나의 해가 바로 혜성이라는 것을 치밀하게 증명하고 난 뒤, 당시 일본이 신라를 침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주장한다. 경덕왕은 759년 발해와 일본의 협공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오곡, 휴암 등 6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둬서 북방을 요새화했고, 해안 경계도 지속했다. 신라가 해안 경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귀화한 신라 사람들을 통해 일본에 보고되었다. 그럴 때 혜성의 꼬리가 낮에도 현란하게 빛을 발하는 천변이 신라의 왕경에서 열흘 이상 지속되었다. 신라인들은 불안에 휩싸였고, 안록산의 난과 같은 큰 전란이 신라를 휩쓸 수도 있다는 전조로 받아들였다. 이런 불안함이 월명사의 산화공양밀의散花供養密儀라는 대규모의 국가의례를 촉발시켰다. 국왕 이하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 왕실의 구성원과, 종친들, 중하급 궁정 관리와 군인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됐고, 수많은 악공과 무희가 동원됐다. 그 가운데 월명사가 지은 「도솔가」가 선창되었고, 대중은 의례가 행해지는 가운데 후렴처럼 반복되는 「도솔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집단 최면에 도취되어갔다. 저자는 정확한 고증과 함께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당시의 상황을 추리해나간다.

제4장 「혜공왕대의 성변과 정변」에서는 반란 및 왕의 피살과 핼리혜성의 관련성을 따져본다. 당시 신라에는 귀족들의 반란이 연이어 다섯 차례나 계속되었다. 그중 두 번은 반란군이 왕궁을 포위했고, 결국 그런 가운데 혜공왕은 피살되었다. 이에 대해 고 이기백 교수는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표징으로 하는 혜공왕을 지지했던 ‘왕당파’와 중대를 부정하는 ‘반왕파’ 사이에 치열한 쟁투가 있었고, 결국 혜공왕이 피살되면서 중대는 막을 내렸다고 보았다.
하지만 저자는 반론을 제기한다.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도전과 귀족들 사이의 쟁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기백이 혜공왕대 정변의 전개과정을 지나치게 도식화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역사 해석을 경직화시킨 면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조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성변, 즉 혜성의 등장 기록을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삼국사기』 권9는 “왕이 어려서 즉위했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다니며 노는 데 절도가 없어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하였다”라고 혜공왕대에 일어난 혼란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하여 23세에 피살당했다. 그가 방탕한 청년기를 보냈다면 그것은 짧은 것이었다. 혜공왕이 9세 되던 해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10세에 왕궁에 운석이 떨어졌고, 11세에 혜성이 나타나고 운석이 떨어졌다. 그리고 13세에 또 혜성이 나타났다. 이러한 성변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던, 다시 말해 방탕한 생활조차 할 수 없었던 어린 나이에 일어난 것이다.
혜공왕대 사람들의 국왕에 대한 세평을 반영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요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것은 바로 계속된 천재지변으로 신라인들이 불안해했고, 그것을 당시 사람들은 국왕의 부도덕함을 하늘이 꾸짖는 징조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야심가들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성변과 반란이 어떻게 연계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으며, 과연 혜성을 재앙의 사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도 짚어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고 메시지를 전한다.

“중요한 점은 신라인들이 전보다 더 성변과 병란이라는 인과성의 추구에 집착하게 되었고, 혜성을 다가올 유혈 사태의 전조로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데 있다. 신라 지배층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 성변이 병란으로 이어진다는 기존의 미신적인 믿음은 혜공왕대의 연이은 반란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명한 사실로 바뀌었다.”

제5장 「신라 말 왕위쟁탈전과 혜성: 장보고의 피살 사건」은 혜성이 완벽히 정치적 변동의 전조라는 믿음이 굳어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리얼하게 담고 있다.
836년 12월 흥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자 왕궁에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근친 간에 유혈투쟁이 벌어졌다. 사투의 당사자는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그의 조카 김재륭이었다. 양자가 사병을 동원하여 벌어진 이 싸움에서 김재륭이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고, 김균정은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피의 살육은 838년 정월과 839년 정월에 더욱 처참한 모습을 띠며 대규모로 재현된 것이다.
정치란 한 치 앞이 칠흑의 어둠이다. 후세에 와서 돌이켜보면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다 명쾌해진다. 후세 사람이 보면 자명한 일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우징 일파의 청해진 집결과 김명(민애왕)의 왕위 찬탈, 장보고 군대를 이용하여 민애왕 정권을 전복한 김우징의 죽음과 그 아들 문성왕의 장보고 암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당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급격한 변화였다.
한 명의 왕위 계승 후보자와 두 명의 왕이 죽는 사건이 단 3년 만에 일어났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쟁탈전이 격화되었단 말인가. 838년 1월 김명이 어떻게 희강왕을 살해하고 왕위 찬탈을 할 수 있었으며, 김우징은 어떻게 의지를 굽히지 않고 839년 1월 장보고를 끌어들여 민애왕 정권을 전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841년 장보고의 허망한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개 개인으로서 신라 정부의 힘을 압도한 장보고는 자신의 청사廳舍에서 단 한 자루의 칼에 죽었고, 청해진은 무력화되었다.
저자는 이런 의문 속에서 837과 841년 사이에 6개의 혜성이 출현했음을 발견한다. 836년 적판궁의 난투극 이후 불안한 정치적 상황에서 연이은 혜성의 출현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여기서 잠깐 저자가 제기한 하나의 문제를 살펴보자. 『삼국유사』 권2 기이 하 혜공왕(765~779) 조를 보면 성변星變과 지변地變을 나열하고 그 결과 대공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반면 『신당서』 권32, 천문지를 보면 신라 성덕왕 재위 기간인 707년에서 730년 사이 다섯 차례나 혜성이 출현한 것이 확인되지만 신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평화시대를 반영하는 듯 『삼국사기』는 혜성 출현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천인상관설을 강조하기 위한 작위적인 기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신라 성덕왕대의 경우 통치는 안정된 편이었다. 따라서 통치의 수준이 안정되고 만족스럽다고 느껴졌을 때는 상서롭지 못한 전조가 경시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저자는 추론한다. 과거 634년, 100일 이상 혜성이 하늘에 떠 있었을 때 당 태종은 그것을 자신의 통치에 대한 결함을 두고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 느꼈다. 그러나 신하 우세남은 당 태종이 통치에 주의를 빈틈없이 기울인다면 혜성의 출현조차 불안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위징도 여기에 동의했다. 불행과 재난을 경고하는 전조도 국가가 건강한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음을 고대의 위정자들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즉 내분의 기미가 있을 때 혜성이 거듭 출현하고 성변이 일어난다면 사회적 불안 심리는 고조될 것이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야심가들이 나올 수 있다. 혜성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 보다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당대가 불안하다면 더욱 그러하다. 일반인들도 조정의 현실적 위기를 직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전제 후, 저자는 본문에서 희강왕을 자살로 내몬 837년의 혜성, 희강왕을 자살로 내몰고 왕위에 오른 민애왕이 즉위하자마자 나타난 838년 10월의 대혜성과 이를 기화로 일어난 김우징 및 장보고 연합세력의 반란, 혜성을 보고 그것을 정권 교체의 전조로 확신한 5천명의 장보고 군대에게 정부군 10만이 철저하게 패배하는 모습, 그 뒤 841년의 혜성과 정부가 보낸 자객 염장에 의해 술에 취한 장보고가 암살되는 일련의 과정을 섬세하게 짚어나간다.

이렇듯, 이 책은 핼리혜성과 신라 중대와 하대에 걸친 중대한 정치적 사건들, 전란들을 엮어서 당대의 역사를 새롭게 사고했다. 어느 한 시기에 혜성이 거듭 출현했다는 것이 신라의 정치적 혼란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원인을 제공한 자연현상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이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에서 한번도 고려되지 못했다는 점이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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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서영교(지은이)

1967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동국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현재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유적과 고문헌, 사서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 근거해서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이 초래한 동아시아사, 더 나아가 유라시아사의 실상을 추적해왔다. 박사과정 중 「신라장창당의 신고찰」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쟁사 연구에 몰입했다. 박사논문을 수정하고 보강한 저서 『나당전쟁사 연구-약자가 선택한 전쟁』(2007)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한국 고대사학자 중에서는 보기 드문 전쟁 전문가로, 고구려 700년사를 유목민과의 ‘동업과 경쟁’으로 살핀 『고구려, 전쟁의 나라』(2007), 전쟁사로 시장과 이익의 메커니즘을 살펴본 『전쟁기획자들』(2008), 고문서의 혜성 기록을 통해 신라사와 궁중 암투를 새롭게 고증한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2010)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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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들어가는 글 혜성 떨어질라, 왕을 죽여라! = 5 
제1장 신라는 융천사의「혜성가」를 언제, 왜 만들었나 = 27 
 1. 진평왕대 대륙정세의 격변과 왜(倭) = 32  
 2.「혜성가」의 등장과 607년의 핼리혜성 = 42  
 3. 긴 꼬리의 별, 신라인들의 머리를 짓누르다 = 53  
제2장 신문왕대 보덕성민의 반란과 핼리혜성 = 65  
 1.『삼국사기』가 침묵한 혜성 출현 사건 = 68 
 2. 피를 부른 역모와 당(唐)과의 전쟁불사 = 74  
 3. 보덕국의 해체 - 만들어진 역란 = 88  
제3장 월명사 도솔가와 두 개의 해 = 107  
 1. 안록산의 난과 신라의 위기 = 113  
 2. 760년의 핼리혜성과 두 개의 해 = 119  
 3. 살인의 전운과 월명사의 산화공양밀의 = 132  
제4장 혜공왕대의 성변과 정변 = 143 
 1.『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나타난 천문 기사 - 불운의 전조 = 146 
 2. 패혜성변과 병란 - 혜공왕의 죽음 = 154 
 3. 재앙의 사자 혜성의 실체 - 백 년의 평화를 깬 유혈 사태 = 163
제5장 신라 말 왕위쟁탈전과 혜성: 장보고의 피살 사건 = 173
 1. 837년 핼리혜성, 희강왕을 자살로 내몰다 = 176
 2. 대혜성의 출현, 달구벌 전투와 민애왕의 처형 = 182 
 3. 841년 11월의 혜성, 자객 염장의 칼에 살해된 장보고 = 193 
보론
 1. 신문왕의 혼례: 분노를 잠재우고 지배 논리를 세우다 = 214 
 2. 흥덕왕과 앵무새 - 근친 왕족에 의한 최초의 국왕 살해 = 231
주(註) =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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