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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 감성필사 삶을 위로하는 시를 읽고, 쓰고, 가슴에 새기다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저 고석규, 高錫珪, 1932-1958, 저 곽재구, 郭在九, 1954-, 저 Bécquer, Gustavo Adolfo, 1836-1870, 저 Apollinaire, Guillaume, 1880-1918, 저 기형도, 奇亨度, 1960-1989, 저 김기림, 金起林, 1908-, 저 김기택, 金基澤, 1957-, 저 김남조, 金南祚, 1927-2023, 저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저 김수영, 金洙暎, 1921-1968, 저 김승희, 金勝熙, 1952-, 저 김영랑, 金永郞, 1903-1950, 저 김용택, 金龍澤, 1948-, 저 김종삼, 金宗三, 1921-1984, 저 김초혜, 金初蕙, 1943-, 저 나태주, 羅泰柱, 1945-, 저 나희덕, 羅喜德, 1966-, 저 노자영, 盧子泳, 1898-1940, 저 노천명, 盧天命, 1912-1957, 저 도종환, 都鍾煥, 1954-, 저 Rilke, Rainer Maria, 1875-1926, 저 Frost, Robert, 1874-1963, 저 마종기, 馬鍾基, 1939-, 저 문정희, 文貞姬, 1947-, 저 박두진, 朴斗鎭, 1916-1998, 저 박인환, 朴寅煥, 1926-1956, 저 백석, 白石, 1912-1996, 저 서안나, 徐安那, 1965-, 저 송찬호, 宋燦鎬, 1959-, 저 신경림, 申庚林, 1936-2024, 저 안도현, 安度眩, 1961-, 저 Pushkin, Aleksandr Sergeevich, 1799-1837, 저 Housman, A. E. (Alfred Edward), 1859-1936, 저 오규원, 吳圭原, 1941-2007, 저 오세영, 吳世榮, 1942-, 저 Hammerstein, Oscar, II, 1895-1960, 저 오일도, 吳一島, 1901-1946, 저 Yeats, W. B. (William Butler), 1865-1939, 저 윤곤강, 尹崑崗, 1911-1950, 저 이성선, 李聖善, 1941-2001, 저 이용악, 李庸岳, 1914-1971, 저 이육사, 李陸史, 1904-1944, 저 이장희, 李章熙, 1900-1929, 저 정지용, 鄭芝溶, 1902-1950, 저 정채봉, 丁埰琫, 1946-2001, 저 정현종, 鄭玄宗, 1939-, 저 정호승, 鄭浩承, 1950-, 저 조병화, 趙炳華, 1921-2003, 저 Byron, George Gordon Byron, Baron, 1788-1824, 저 천양희, 千良姬, 1942-, 저 Gibran, Kahlil, 1883-1931, 저 Cavafy, Constantine, 1863-1933, 저 Rossetti, Christina Georgina, 1830-1894, 저 Verlaine, Paul, 1844-1896, 저 Éluard, Paul, 1895-1952, 저 Heine, Heinrich, 1797-1856, 저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저 함형수, 咸亨洙, 1914-1946, 저 허영자, 許英子, 1938-, 저 Hesse, Hermann, 1877-1962, 저 황석우, 黃錫禹, 1895-1959, 저
서명 / 저자사항
다시 : 감성필사 삶을 위로하는 시를 읽고, 쓰고, 가슴에 새기다 / 윤동주 외 지음 ; 배정애 사진
발행사항
서울 :   북로그컴퍼니,   2018  
형태사항
211 p. : 삽화, 사진 ; 19 cm
ISBN
9791189166472
일반주기
공저자: 고석규, 곽재구, 구스타포 A. 베케르, 기욤 아폴리네르, 기형도, 김기림, 김기택, 김남조, 김소월, 김수영, 김승희, 김영랑, 김용택, 김종삼, 김초혜, 나태주, 나희덕, 노자영, 노천명, 도종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버트 프로스트, 마종기, 문정희, 박두진, 박인환, 백석, 서안나, 송찬호, 신경림, 안도현,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앨프리드 E. 하우스먼, 오규원, 오세영, 오스카 해머스타인, 오일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윤곤강, 이성선, 이용악, 이육사, 이장희, 정지용, 정채봉, 정현종, 정호승, 조병화, 조지 고든 바이런, 천양희, 칼릴 지브란,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 크리스티나 G. 로세티, 폴 베를렌, 폴 엘뤼아르, 하인리히 하이네, 한용운, 함형수, 허영자, 헤르만 헤세, 황석우  
서지주기
참고문헌과 색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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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a 서울 : ▼b 북로그컴퍼니, ▼c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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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a 공저자: 고석규, 곽재구, 구스타포 A. 베케르, 기욤 아폴리네르, 기형도, 김기림, 김기택, 김남조, 김소월, 김수영, 김승희, 김영랑, 김용택, 김종삼, 김초혜, 나태주, 나희덕, 노자영, 노천명, 도종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버트 프로스트, 마종기, 문정희, 박두진, 박인환, 백석, 서안나, 송찬호, 신경림, 안도현,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앨프리드 E. 하우스먼, 오규원, 오세영, 오스카 해머스타인, 오일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윤곤강, 이성선, 이용악, 이육사, 이장희, 정지용, 정채봉, 정현종, 정호승, 조병화, 조지 고든 바이런, 천양희, 칼릴 지브란,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 크리스티나 G. 로세티, 폴 베를렌, 폴 엘뤼아르, 하인리히 하이네, 한용운, 함형수, 허영자, 헤르만 헤세, 황석우
504 ▼a 참고문헌과 색인수록
700 1 ▼a 윤동주, ▼g 尹東柱, ▼d 1917-1945, ▼e▼0 AUTH(211009)126515
700 1 ▼a 고석규, ▼g 高錫珪, ▼d 1932-1958, ▼e▼0 AUTH(211009)107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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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1 ▼a Bécquer, Gustavo Adolfo, ▼d 1836-1870, ▼e▼0 AUTH(211009)148876
700 1 ▼a Apollinaire, Guillaume, ▼d 1880-1918, ▼e▼0 AUTH(211009)58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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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1 ▼a 김기림, ▼g 金起林, ▼d 1908-, ▼e▼0 AUTH(211009)136410
700 1 ▼a 김기택, ▼g 金基澤, ▼d 1957-, ▼e▼0 AUTH(211009)81104
700 1 ▼a 김남조, ▼g 金南祚, ▼d 1927-2023, ▼e▼0 AUTH(211009)57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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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1 ▼a 김승희, ▼g 金勝熙, ▼d 1952-, ▼e▼0 AUTH(211009)44761
700 1 ▼a 김영랑, ▼g 金永郞, ▼d 1903-1950, ▼e▼0 AUTH(211009)5866
700 1 ▼a 김용택, ▼g 金龍澤, ▼d 1948-, ▼e▼0 AUTH(211009)116801
700 1 ▼a 김종삼, ▼g 金宗三, ▼d 1921-1984, ▼e▼0 AUTH(211009)77597
700 1 ▼a 김초혜, ▼g 金初蕙, ▼d 1943-, ▼e▼0 AUTH(211009)86933
700 1 ▼a 나태주, ▼g 羅泰柱, ▼d 1945-, ▼e▼0 AUTH(211009)41243
700 1 ▼a 나희덕, ▼g 羅喜德, ▼d 1966-, ▼e▼0 AUTH(211009)54608
700 1 ▼a 노자영, ▼g 盧子泳, ▼d 1898-1940, ▼e▼0 AUTH(211009)35629
700 1 ▼a 노천명, ▼g 盧天命, ▼d 1912-1957, ▼e▼0 AUTH(211009)126516
700 1 ▼a 도종환, ▼g 都鍾煥, ▼d 1954-, ▼e▼0 AUTH(211009)113333
700 1 ▼a Rilke, Rainer Maria, ▼d 1875-1926, ▼e▼0 AUTH(211009)15211
700 1 ▼a Frost, Robert, ▼d 1874-1963, ▼e▼0 AUTH(211009)94005
700 1 ▼a 마종기, ▼g 馬鍾基, ▼d 1939-, ▼e▼0 AUTH(211009)31883
700 1 ▼a 문정희, ▼g 文貞姬, ▼d 1947-, ▼e▼0 AUTH(211009)8950
700 1 ▼a 박두진, ▼g 朴斗鎭, ▼d 1916-1998, ▼e▼0 AUTH(211009)54270
700 1 ▼a 박인환, ▼g 朴寅煥, ▼d 1926-1956, ▼e▼0 AUTH(211009)15199
700 1 ▼a 백석, ▼g 白石, ▼d 1912-1996, ▼e▼0 AUTH(211009)37761
700 1 ▼a 서안나, ▼g 徐安那, ▼d 1965-, ▼e▼0 AUTH(211009)55218
700 1 ▼a 송찬호, ▼g 宋燦鎬, ▼d 1959-, ▼e▼0 AUTH(211009)97934
700 1 ▼a 신경림, ▼g 申庚林, ▼d 1936-2024, ▼e▼0 AUTH(211009)9009
700 1 ▼a 안도현, ▼g 安度眩, ▼d 1961-, ▼e▼0 AUTH(211009)81102
700 1 ▼a Pushkin, Aleksandr Sergeevich, ▼d 1799-1837, ▼e▼0 AUTH(211009)45082
700 1 ▼a Housman, A. E. ▼q (Alfred Edward), ▼d 1859-1936, ▼e▼0 AUTH(211009)93859
700 1 ▼a 오규원, ▼g 吳圭原, ▼d 1941-2007, ▼e▼0 AUTH(211009)77424
700 1 ▼a 오세영, ▼g 吳世榮, ▼d 1942-, ▼e▼0 AUTH(211009)86928
700 1 ▼a Hammerstein, Oscar, ▼c II, ▼d 1895-1960, ▼e▼0 AUTH(211009)148877
700 1 ▼a 오일도, ▼g 吳一島, ▼d 1901-1946, ▼e▼0 AUTH(211009)148872
700 1 ▼a Yeats, W. B. ▼q (William Butler), ▼d 1865-1939, ▼e▼0 AUTH(211009)115127
700 1 ▼a 윤곤강, ▼g 尹崑崗, ▼d 1911-1950, ▼e▼0 AUTH(211009)12723
700 1 ▼a 이성선, ▼g 李聖善, ▼d 1941-2001, ▼e▼0 AUTH(211009)28262
700 1 ▼a 이용악, ▼g 李庸岳, ▼d 1914-1971, ▼e▼0 AUTH(211009)71610
700 1 ▼a 이육사, ▼g 李陸史, ▼d 1904-1944, ▼e▼0 AUTH(211009)28424
700 1 ▼a 이장희, ▼g 李章熙, ▼d 1900-1929, ▼e▼0 AUTH(211009)99756
700 1 ▼a 정지용, ▼g 鄭芝溶, ▼d 1902-1950, ▼e▼0 AUTH(211009)139829
700 1 ▼a 정채봉, ▼g 丁埰琫, ▼d 1946-2001, ▼e▼0 AUTH(211009)109741
700 1 ▼a 정현종, ▼g 鄭玄宗, ▼d 1939-, ▼e▼0 AUTH(211009)103637
700 1 ▼a 정호승, ▼g 鄭浩承, ▼d 1950-, ▼e▼0 AUTH(211009)104231
700 1 ▼a 조병화, ▼g 趙炳華, ▼d 1921-2003, ▼e▼0 AUTH(211009)100165
700 1 ▼a Byron, George Gordon Byron, ▼c Baron, ▼d 1788-1824, ▼e▼0 AUTH(211009)12763
700 1 ▼a 천양희, ▼g 千良姬, ▼d 1942-, ▼e▼0 AUTH(211009)97933
700 1 ▼a Gibran, Kahlil, ▼d 1883-1931, ▼e▼0 AUTH(211009)113668
700 1 ▼a Cavafy, Constantine, ▼d 1863-1933, ▼e▼0 AUTH(211009)27993
700 1 ▼a Rossetti, Christina Georgina, ▼d 1830-1894, ▼e▼0 AUTH(211009)34326
700 1 ▼a Verlaine, Paul, ▼d 1844-1896, ▼e▼0 AUTH(211009)24886
700 1 ▼a Éluard, Paul, ▼d 1895-1952, ▼e▼0 AUTH(211009)100072
700 1 ▼a Heine, Heinrich, ▼d 1797-1856, ▼e▼0 AUTH(211009)58301
700 1 ▼a 한용운, ▼g 韓龍雲, ▼d 1879-1944, ▼e▼0 AUTH(211009)126552
700 1 ▼a 함형수, ▼g 咸亨洙, ▼d 1914-1946, ▼e▼0 AUTH(211009)148878
700 1 ▼a 허영자, ▼g 許英子, ▼d 1938-, ▼e▼0 AUTH(211009)44941
700 1 ▼a Hesse, Hermann, ▼d 1877-1962, ▼e▼0 AUTH(211009)67586
700 1 ▼a 황석우, ▼g 黃錫禹, ▼d 1895-1959, ▼e▼0 AUTH(211009)22776
900 1 0 ▼a 베케르, 구스타포 A., ▼e
900 1 0 ▼a 아폴리네르, 기욤, ▼e
900 1 0 ▼a 릴케, 라이너 마리아, ▼e
900 1 0 ▼a 프로스트, 로버트, ▼e
900 1 0 ▼a 푸시킨,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e
900 1 0 ▼a 하우스, 앨프리드 E., ▼e
900 1 0 ▼a 해머스타일, 오스카, ▼e
900 1 0 ▼a 예이츠, 윌리엄 버클러, ▼e
900 1 0 ▼a 바이런, 조지 고든, ▼e
900 1 0 ▼a 지브란, 칼릴, ▼e
900 1 0 ▼a 카바피, 콘스탄티노스 P., ▼e
900 1 0 ▼a 로세티, 크리스티나 G., ▼e
900 1 0 ▼a 베를렌, 폴, ▼e
900 1 0 ▼a 엘뤼아르, 폴, ▼e
900 1 0 ▼a 하이네, 하인리히, ▼e
900 1 0 ▼a 헤세, 헤르만, ▼e

소장정보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2층)/ 청구기호 808.81 2018z5 등록번호 151343272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

컨텐츠정보

책소개

모두의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여울지며 깊은 감동을 선사해온 시 80편을 모아 내 손글씨로 직접 따라 쓸 수 있게 만든 감성 라이팅북이다. 시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따라 쓰고, 다시 읊조리며 '시의 참맛'을 오롯이 느끼게 한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은 시인들의 시를 담고 있다. 윤동주, 김수영, 정지용같이 예전부터 사랑받아온 시인들, 김기택, 김용택, 도종환 등 지금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 로버트 프로스트, 콘스탄티누스 P. 카바피,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세계 문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외국 시인 등 62명의 작가들이 쓴 명시 80편을 만날 수 있다. 각 작품은 80편의 시를 사랑, 쓸쓸함과 그리움, 청춘, 일상, 찬란함이라는 다섯 파트로 나누어 지금 내 가슴을 울리는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내 마음을 울리는 시를 찾아 책을 펼치면, 이 시대 감성 캘리그라퍼 배정애의 캘리그라피가 깜짝 선물처럼 독자를 맞이한다. <시를 잊은 나에게>에서 시의 참맛을 캘리그라피로 재탄생시켜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은 배정애가 다시 참여한 것. 가벼운 손글씨 느낌의 캘리그라피부터 감정을 뜨겁게 표현한 캘리그라피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캘리그라피는 잊었던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시인의 메시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다시,
시(詩)가 건네는 작은 위로가 그리워졌다


누구나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텅 빈 집에 홀로 들어가 외로움과 허무함을 느낄 때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연락이 피곤하고 귀찮을 때, 내 꼴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질 때, 혼자 먼 여행을 떠나봐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 가장 가깝고도 쉬운 해답, 시(詩). 시인의 언어를 흥얼거리며 오롯이 나와 시에만 집중하면 사랑했던 기억도, 평범한 하루하루도, 잊기 힘든 그 사람도…… 모두 다 시로 피어난다. 이런 마법 같은 경험은 읽는 이의 정신적 빈곤을 채우고 삶의 해답을 찾게 한다.
《다시(多詩)》는 모두의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여울지며 깊은 감동을 선사해온 시 80편을 모아 내 손글씨로 직접 따라 쓸 수 있게 만든 감성 라이팅북이다. 시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따라 쓰고, 다시 읊조리며 ‘시의 참맛’을 오롯이 느끼게 한다.

다시,
삶을 어루만지는 시를 읽고 느끼다


이 책에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은 시인들의 시를 담고 있다. 윤동주, 김수영, 정지용같이 예전부터 사랑받아온 시인들, 김기택, 김용택, 도종환 등 지금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 로버트 프로스트, 콘스탄티누스 P. 카바피,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세계 문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외국 시인 등 62명의 작가들이 쓴 명시 80편을 만날 수 있다. 각 작품은 80편의 시를 사랑, 쓸쓸함과 그리움, 청춘, 일상, 찬란함이라는 다섯 파트로 나누어 지금 내 가슴을 울리는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내 마음을 울리는 시를 찾아 책을 펼치면, 이 시대 최고의 감성 캘리그라퍼 배정애의 캘리그라피가 깜짝 선물처럼 독자를 맞이한다. <시를 잊은 나에게>에서 시의 참맛을 캘리그라피로 재탄생시켜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은 배정애가 다시 참여한 것. 가벼운 손글씨 느낌의 캘리그라피부터 감정을 뜨겁게 표현한 캘리그라피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캘리그라피는 잊었던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시인의 메시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다시,
시를 쓰고 읊조리고 음미하다


천천히 시를 읽다 보면 기쁨, 후회, 분노, 상실감 등 다채로운 감정의 소용돌이와 마주한다.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고, 삶의 진리를 깨치기도 한다. 이런 기분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직접 따라 쓸 수 있는 필사 공간을 마련했다. 시의 감성을 표현하는 사진과 색깔로 아름답게 꾸며내 마치 독자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듯하다.
“글씨에 조금 자신이 없더라도 괜찮아. 여기에 시를 쓰면 근사하게 보일 테니까.”
용기를 내 시를 한 자 한 자 따라 쓰면,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오롯이 느끼게 된다. 시를 통해 공감의 문이 열리고 소통의 길이 생긴다. 시인이 내 삶의 굽이굽이를 어루만져주다 보면 마음은 저절로 맑아지고 고요해진다. 사랑에 아파 떨구는 눈물도, 상대의 무심함에 상처받은 마음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도…… 《다시》와 함께라면 조금은 괜찮아진다.

작가 김연수는 말했다. 하루 중 얼마간을 시를 읽는 데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고. 읽는 기쁨, 보는 재미, 쓰는 즐거움을 한번에 선사하는 《다시》를 곁에 두고 어제와는 다른 오늘, 더 풍요로워지고 고귀해진 삶을 누려보자.


정보제공 : Aladin

저자소개

곽재구(지은이)

1981년 &lt;중앙일보&gt; 신춘문예 「사평역에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등이 있고,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다. 동화집으로는 『아기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동서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받았다.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지은이)

스페인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인 베케르는 가난으로 점철된 짧은 생애를 보냈다.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자로 은둔의 삶을 추구했고 절망적인 사랑에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문학과 음악, 회화에 매력을 느꼈고, 해양 학교에 입학했다가 바로 공부를 그만두었다. 마드리드로 이주한 후에 재무부에서 한직에 근무했지만 시를 쓴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해고당했다. 베케르는 무엇보다 시인이었지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민담, 괴담을 바탕으로 22편의 짧은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1861년부터 1863년 사이에 발표된 「혼령의 산 El Monte de las animas」도 그중의 하나다. 베케르는 34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형도(지은이)

1979년 연세대에 입학한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다. 1980년 대학문학상 박영준 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에 입선했다. 그후 1982년 대학문학상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식목제'로 당선되었으며,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어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81년 안양의 문학동인 '수리'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시작에 몰두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지은 책으로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짧은 여행의 기록>,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전집 <기형도 전집> 등이 있다.

김기림(지은이)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함경북도 학성군(후에 성진으로 편입됨) 학중면 임명동 275번지에서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명은 인손(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등단 초기 간간이 G. W.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임명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한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다. 13세에 성진의 농학교(중등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년 수학 직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 다니게 된다. 보성 3학년 재학 도중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게 되는데,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도쿄 소재의 메이쿄(名敎)중학[현재는 도쿄 근처 지바(千葉) 현 우라야스(浦安) 시 소재의 도카이(東海)대학 부속 우라야스고교]에 편입, 졸업한다. 졸업 이후 1926년 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로 진학하고 1930년 봄에 동 대학을 수료한다. 대학 재학 기간 중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과 더불어 ≪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 창작과 비평 발표 등의 문필 활동에도 힘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글은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4월 27일에서 5월 3일까지 발표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평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한다면 문학적 감상을 섞은 단상 형태의 수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평론은 같은 해인 1930년 7월 24일에서 30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 편석촌이라는 필명(호)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한 <시와 시인의 개념-근본적 의혹에 대하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그는 활발하게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은 시작 활동과 비평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당대 문단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그런 와중에 1933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인들의 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문학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 1935년은 그의 문단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대표작이기도 한 장시 <기상도>를 잡지 ≪중앙≫과 ≪삼천리≫에 연재하는 한편, 그의 초기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오전의 시론> 시리즈를 ≪조선일보≫ 지면에 장기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연달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학문 연구를 위해 재도일하여 도호쿠(東北)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도호쿠제대 재학 기간 동안 조선 내 그의 문단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기도 하나, 이 기간 그는 영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학관을 심화하는 한편, 보다 폭넓은 사회 역사적·철학적 토대 위에 종래 자신이 추구했던 모더니즘문학 운동의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19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함과 함께 조선 문단 전면에 재등장한다. 복귀 후 한동안 문단 활동에 주력하지만, 1940년대로 넘어서자 점차 조여드는 일제의 압박에 회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절필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친일 문학인들과 단체의 끈질긴 동참 권유를 뿌리치고 긴 침묵의 기간을 보낸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가족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간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듯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발발된 직후 서울 거리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연행당한다. 그 뒤 북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내에서 그의 행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시론집으로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김남조(지은이)

1927년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평생을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사랑과 삶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그의 문학은 온 국민에게 따뜻한 사랑의 감성을 심어주며 세대를 초월하여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시집으로 &lt;목숨&gt;, &lt;나아드의 향유&gt;, &lt;겨울 바다&gt;, &lt;사랑초서&gt;, &lt;충만한 사랑&gt;, &lt;사람아, 사람아&gt; 등 19권의 시집과 &lt;잠시 그리고 영원히&gt;, &lt;시간의 은모래&gt;, &lt;그래도 못다한 말&gt;, &lt;사랑의 말&gt;, &lt;사랑 후에 남은 사랑&gt; 등 11권의 수필집, &lt;예술가의 삶&gt; 및 꽁뜨집 &lt;아름다운 사람들&gt; 등이 있고, 영어, 일본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번역시집이 있다. 한국시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회, 한국여성문학인회 등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김소월(지은이)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곽산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한시와 민요를 접하며 시적 감성을 키웠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시인 김억을 만나 영향을 받았다. 1920년 『창조』에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이후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진달래꽃」 등 서정시를 통해 민족의 한과 이별의 정서를 노래했다. 그의 시는 전통적 민요의 리듬과 서구 시형의 감각을 결합해 한국적 서정시의 전형을 세웠다. 1925년 출간된 시집 『진달래꽃』은 그가 생전에 남긴 유일한 시집으로, 단아하고 절제된 언어로 민족적 슬픔과 사랑을 표현했다. 도쿄상업대학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후 생활고에 시달렸고, 1934년 12월 24일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소월시초』가 발간되며, 그는 오늘날 ‘한국 서정시의 상징적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수영(지은이)

1921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35~1941년 선린상업학교에 재학했다.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주산과 미술에 재질을 보였다. 이후 동경 성북예비학교에 다니며 연극을 공부했다. 1943년 조선 학병 징집을 피해 일본에서 귀국했으며 안영일 등과 연극을 했다. 1945년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예술부락》이라는 잡지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했다. 1946 ~1948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며 졸업은 하지 않았다. 1949년 김경린 등과의 친교로 시론과 시를 엮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북한군 후퇴 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다 탈출했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부산, 대구에서 통역관 및 선린상고 영어교사로 지냈다. 1957년 12월, 한국시인협회상 제1회 수상자가 되었다. 1959년, 1948~1959년 사이에 발표했던 시를 모아 첫 시집이자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을 출간했다. 1960년 4·19 혁명 발발. 이후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시평 등을 잡지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였다. 1968년 6월 15일 밤 귀갓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머리를 다쳤다.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한국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수영은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고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 또한 보여 주었다. “내일의 시”, “미지의 시”를 향한 그의 실험 정신은 언제까지나 신선한 충격으로 남을 것이다.

김영랑(지은이)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lt;내 마음 아실 이&gt;, &lt;가늘한 내음&gt;, &lt;모란이 피기까지는&gt;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김용택(지은이)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1982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등이,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은하수를 건넜다』 등이 있다. 태어나 자라온 강가에서 서쪽 하늘 초승달과 작은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의 눈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김종삼(지은이)

1921년 4월 25일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남. 평양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 도요시마豊島 상업학교에 편입, 졸업하고 동경문화학원 문학과에 입학함. 해방이 되자 귀국 극예술협회 연출부에서 음악을 담당함. 1954년 『현대예술』 6월호에 시 「돌」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함. 『현대시회』 회원으로 시를 쓰며 『시극』 동인으로 각종 시극의 음악을 연출함. 1967년 동아방송 제작부에서 음악 연출을 담당하다 정년을 맞음. 1984년 12월 8일 간경화로 생을 마감. 경기도 송추 울대리 길음성당 묘역에 영면함. 제2회 현대시학 작품상(1971), 한국시인협회상(1978)을 수상함. 개인시집 『십이음계』, 『시인학교』, 『누군가 나에 물었다』, 시선집 『북치는 소년』, 『평화롭게』, 연대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 공동시집 『본적지』 등을 상재함.

김초혜(지은이)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4년《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떠돌이 별』『사랑굿 1』『사랑굿 2』『사랑굿 3』『어머니』『섬』『세상살이』『그리운 집』『고요에 기대어』『사람이 그리워서』『멀고 먼 길』『만나러 가는 길』, 시선집『떠도는 새』『빈 배로 가는 길』『편지』, 편지글『행복이』『사람이』등이 있다. 한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공초문학상, 서정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나태주(지은이)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하여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007년 공주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할 때까지 43년 동안 교직에 있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이후, 50여년간 꾸준한 창작 활동으로 수천 편에 이르는 시 작품을 발표했다. 광화문 글판에 선정된 「풀꽃」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시집, 산문집, 동화집, 시화집 등 200여 권이 있으며, 공주문화원장과 한국시입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받은 상으로 흙의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유심작품상 등이 있으며 현재는 공주시의 도움으로 ‘나태주 풀꽃 문학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나희덕(지은이)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파일명 서정시』『가능주의자』『시와 물질』, 산문집 『반통의 물』『저 불빛들을 기억해』『예술의 주름들』 등이 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노천명(지은이)

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 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 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도종환(지은이)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신석정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2006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자연을 인간처럼 이해하고, 인간을 자연처럼 이해하는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시와 산문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고 맑은 통찰의 눈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시집으로 《접시꽃 당신》, 《흔들리며 피는 꽃》, 《해인으로 가는 길》,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너 없이 어찌 내게 향기 있으랴》 등이 있습니다. 동시집 《누가 더 놀랐을까》, 동화 《나무야, 안녕》, 그림책 《도종환 시인의 자장가》, 《병아리 싸움》 등을 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지은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릴케는 보헤미아 출신답게 평생을 떠돌며 실존의 고뇌에 번민하는 삶을 살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 프라하의 독일계 가정에서 1875년에 태어났다. 첫딸을 잃은 어머니는 릴케를 여자처럼 키웠고, 군인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릴케를 군사학교에 보냈다. 릴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야 했고, 몸이 허약해 군사학교는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후 프라하대학교에 들어가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뮌헨대학교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정신적, 문학적으로 성숙해졌다. 루 살로메와 두 차례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후 독일 화가 마을인 보르프스베데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웠고 로댕의 제자였던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와 결혼했다. 그 후 릴케는 파리로 가 로댕을 만났고, 세잔의 작품을 탐닉하며 구도적 작가정신을 닮으려 했다. 파리 생활의 체험은 자전소설 《말테의 수기》에 담겼다. 러시아 여행의 성과는 《기도시집》, 보르프스베데에 머물던 시절에 주로 쓴 시는 《형상시집》과 《신시집》으로 묶였다. 방랑의 삶을 계속하던 릴케는 1922년 장편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완성하고, 1926년 51세의 나이로 스위스 요양원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종기(지은이)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의대,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1966년 도미,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영상의학과 의사와 의대 교수로 근무했다. 19 5 9 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뒤, 『조용한 개선』 『두번째 겨울』 『평균율』(공동 시집), 『변경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그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늘의 맨살』 『마흔두 개의 초록』 『천사의 탄식』 등의 시집을 펴냈다. 그 밖에 『마종기 시전집』, 시선집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아주 사적인, 긴 만남』(공저)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우리 얼마나 함께』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공저)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대산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문정희(지은이)

전남 보성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랐다. 1969년 등단 이후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 등을 썼으며, 장시·시극·산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 프랑스 ‘시인들의 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아바나 국제도서전 등에 참가했고, 11개 언어로 옮겨진 15권의 번역 시집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수상했다.

조지 고든 바이런(지은이)

1788년 1월 22일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사 악명이 높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잭은 이런 바이런 집안의 전형적인 인물로 재혼을 한 후에도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고서 가족을 버리고 프랑스로 도피해 거기서 비참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캐서린은 세 살 난 외아들 바이런을 데리고 그녀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애버딘으로 가서 적은 수입으로 세를 얻어 살았던 그는, 절름발이라는 사실에 매우 민감했던 소년 시절에 애버딘 그래머 스쿨(Aberdeen Grammar School)에 다녔다. 그가 열 살 때 자식 없이 죽은 부도덕한 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작의 작위를 물려받아 ‘바이런 경’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고 큰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잉글랜드에 있는 본가인 뉴스테드(Newstead)로 돌아갔다. 변호사인 존 핸슨(John Hanson)의 도움으로 바이런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1799년 가을에 덜위치(Dulwich)에 있는 학교에 가기도 했다. 1801년에 바이런은 해로 스쿨(Harrow School)에 입학했고 곧이어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진학하게 되는데, 학창 시절 동안 학교 공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시를 쓰고 소설과 역사책을 즐겨 읽었다. 또한 그는 선천적으로 불구인데도 운동을 좋아했고 술과 나쁜 친구와 천박한 여자들을 접하고 도박에도 손을 대 빚을 지는 등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진보적인 휘그(Whig)당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1807년 여름 바이런은 그의 초기 시들을 묶어서 11월에 ≪덧없는 시편들(Fugitive Pieces)≫이라는 시집을 자비로 인쇄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에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시집 ≪한가한 시간(Hours of Idleness)≫을 정식 출간했다. 하지만 이 시집이 <에든버러 리뷰(Edinburgh Review)>에 의해 혹평을 받자, 그는 1809년에 <영국의 시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비평가들(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을 써서 비평가들을 통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에 성년이 된 그는 1월에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귀족원의원이 되어 당시의 귀족 자제들의 관습에 따라 일찍부터 꿈꾸어 오던 유럽 대륙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포르투갈, 스페인, 몰타, 알바니아, 그리스, 콘스탄티노플까지 두루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체험하고 문학적인 시야를 넓힌 후 1811년 7월 14일 런던으로 귀국했다. 1812년 2월 27일에 바이런은 상원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으며, 3월 초에 출간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1·2편은 2년간에 걸친 그의 유럽 여행에 대한 기행문인 셈인데, 이 시에서 주인공인 차일드 해럴드는 동방 제국을 순례하면서 보고 체험했던 이국의 풍물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노래한다. 이 시는 바이런에게 “어느 날 아침에 깨어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뜻하지 않은 성공을 가져다주어서 미모의 청년 귀족 바이런이 휘그당 모임에서 명사 취급을 받도록 했으며, 영국 상류 사교계의 열렬한 갈채와 찬양을 받으며 여성들의 애모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 그에게 무절제한 여성 편력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1813년에 ≪이단자(The Giaour)≫와 ≪아비도스의 신부(The Bride of Abydos)≫, 1814년에 ≪라라≫와 ≪해적(The Corsair)≫, 1815년에 ≪히브리 가곡(Hebrew Melodies)≫, 1816년에 ≪코린트의 포위(The Siege of Corinth)≫와 ≪파리지나(Parisina)≫ 등 수많은 걸작 시집들을 잇달아 출판하고 호평을 받았다. 바이런은 복잡했던 많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 1814년 9월 앤 이저벨라 밀뱅크와 1815년 1월 2일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되는 바이런의 가정적인 추문은 런던 사회 전체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고 신랄한 비방을 자아내게 됨으로써 바이런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16년 4월 바이런은 이혼을 하고 유럽으로 떠나 스위스, 이탈리아의 도처를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 생활을 했고,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지내는 도중 이탈리아 비밀 혁명 단체에 들어갔으며, 이탈리아인의 생활을 어느 때보다 가깝게 접하는 한편 신성동맹에 대한 반란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면서 1816년과 1818년에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3·4편, 1816년에 ≪시용의 죄수 (The Prisoner of Chillon)≫, 1817년에 ≪베포(Beppo)≫와 시극 <맨프레드>, 1820년에 ≪단테의 예언(The Prophecy of Dante)≫과 ≪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 1821년에 ≪두 사람의 포스카리(The Two Foscari)≫와 시극 <카인(Cain)>, ≪심판의 계시(The Vision of Judgement)≫, 그리고 그의 필생의 대작인 ≪돈 주안≫을 1818년부터 1823년에 걸쳐 출간했다. 또한 시인 리 헌트(Leigh Hunt)를 계속 도왔고, 그가 편집하는 ≪리버럴(The Liberal)≫에 원고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1823년 4월 런던에 있는 그리스 위원회로부터 터키에 대항해서 독립 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돕는 요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제 자유와 정의와 인류애를 위한 정치 운동에 정열을 불태우고자 했던 그는, 터키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그리스의 독립 운동을 돕고자 스스로 원군을 조직해 7월 16일에 그리스를 향해 출범했다. 하지만 그는 1824년 1월 그리스의 미솔롱기(Missolonghi)에 상륙한 후 그리스 독립군 최고 사령관이 되어 터키와의 전투를 기다리던 중 불운하게도 열병에 걸렸고, 의사가 고집한 사혈 요법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어 그해 4월 19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리스 전체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곧 그는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유해는 영국으로 옮겨졌으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 안치가 거부되어, 7월 16일에 뉴스테드와 가까운 한 교회 묘지의 집안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45년 뒤인 1969년에 그를 추도하는 기념비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세워졌다.

박인환(지은이)

1926년 강원도 인제 출생, 1956년 서울 세종로에서 생을 마쳤다. ‘마리서사’를 운영하며 문학 예술 언론인들과의 교분을 넓혀, 청년문학가협회 시 낭독회 참여, 국제신보 등에 신작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자유신문,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종군기자로도 활약했다. 신문사 퇴직 후 당시 우리나라 최대 화물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 여행을 다녀와 「아메리카 시편」 등을 발표했다. 모더니즘 경향의 동인지 『신시론』 앤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참여했다. 1955년 개인 시집 『박인환 선시집』을 출간했다. 1956년 3월 17일부터 사흘간 ‘이상(李箱) 추모회’를 열어 폭음 끝에 3월 20일 9시에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만 30세, 시력(詩歷) 10년이었다. 1976년 10주기를 맞아 장남인 박세형 씨가 추모 시집 『목마와 숙녀』를 간행했다.

백석(지은이)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송찬호(지은이)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등단했습니다. 동시집 『저녁별』 『초록 토끼를 만났다』 『여우와 포도』 『신발 원정대』,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분홍 나막신』 등을 냈습니다. 김수영 문학상, 동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시문학상, 창원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신경림(지은이)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와 동국대에서 공부했다.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농무』 『새재』 『달 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노 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과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산문집 『민요기행』 『시인을 찾아서』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4·19문화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동국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2024년 타계했다.

기욤 아폴리네르(지은이)

188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모나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프랑스에 완전히 귀화하였다. 1918년 그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1898년부터 여러 잡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 한편으로는 전위예술에 매혹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예술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면서 피카소, 브라크, 막스 자콥 등과도 교류하였던 그는 불문학사에서 상징주의의 황혼기이며 초현실주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인 20세기 초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알코올』은 아폴리네르의 첫 시집으로, 1913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부제인 <시집 1898-1913>이 말하듯이 『알코올』은 아폴리네르가 시인으로서 처음 이름을 알린 이후 15년간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와 주제, 음조와 길이가 다른 50편의 시를 혼란스럽게 늘어놓고 있지만 이 시집 전체가 지니고 있는 특이한 분위기는 거기에 어떤 <숨겨진 건축>, <초현실적 상상력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건축>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떨쳐 버리기 어렵게 한다. 다른 작품으로는 『썩어 가는 마술사L'enchanteur pourrissant』, 『상형시집Calligrammes』, 『학살 당한 시인Le po?te assassin?』, 『앉아 있는 여인La femme assise』, 『우울한 파수병Le Guetteur m?lancolique』, 『추억처럼 부드러운Tendre comme le souvenir』, 『소년 돈주앙의 회고록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이교시조회사L'H?r?siarque et Cie』, 『입체파 화가들Les peintres cubistes』 등이 있다.

안도현(지은이)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등 여러 권의 시집을 펴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지은이)

알렉산드르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 Пушкин, 1799∼1837)푸시킨(1799∼1837)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열두 살 때인 1811년 6년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했다. 그는 리체이 재학 중 120여 편의 시를 썼다. 리체이를 졸업한 후 외무성 관리로서 잠시 근무하던 중 진보적 문학 서클인 ‘녹색 램프(질료나야 람파)’에 가입해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 무렵 진보적인 시 <자유>, <차다예프에게>, <마을>을 발표해 러시아 남부로 유형을 가게 되었다.그는 남러시아의 캅카스에서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바이런풍의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키시뇨프에서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인 ≪캅카스의 포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 ≪도둑 형제≫ 등을 발표했고,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 마을(이 마을에 푸시킨의 집이 있고, 이 마을의 어귀의 스뱌트이 언덕 수도원에 그의 무덤이 있음)에서 ≪예브게니 오네긴≫과 ≪집시들≫을 집필하느라 1825년에 발생한 데카브리스트 난에 참여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는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난을 평정한 후 푸시킨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그의 작품을 직접 검열하고 감독한다. 그는 1830년 가을 볼지노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즉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돌의 손님>, <질병 때의 주연> 등 많은 작품을 쓴다. 1828년 겨울 새해 무렵에 모스크바의 무도회에서 만난 16세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미모에 반한 푸시킨은 이듬해 봄에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에게 거절당하지만, 다시 청혼해서 결국 1831년 2월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해 가을, 푸시킨은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살던 중 1833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하고, 그해 여름에 볼지노 마을(아버지가 80채의 농가, 246명의 남자 농노, 237명의 여자 농노가 사는 이 마을을 물려주어 푸시킨이 젊은 지주가 됨)을 방문해 그곳에서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청동 기사≫ 등을 집필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끈 그의 아내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만을 좋아할 뿐, 남편의 문학적 재능이나 지적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니콜라이 1세와 자신의 아내와의 염문이 떠도는 중 그는 황제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는 굴욕을 겪는다. 그는 1836년 고골의 도움을 받아 문학잡지 <동시대인>을 발행하고, 이 잡지에 ≪대위의 딸≫을 연재한다.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와 황제의 염문에 이어 네덜란드 대사의 양자인 프랑스 청년 장교 단테스와의 염문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국,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1837년 1월 7일 사망한다. 황제 정부는 국민들의 조문 시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밤중에 그의 관을 미하일롭스코예 부근의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으로 옮겨 비밀리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한다.푸시킨은 ‘러시아 문화의 등불’,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국민(민중)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의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러시아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에 있어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지대하다.

폴 엘뤼아르(지은이)

1895년 파리 외곽에 있는 생드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외젠 에밀 폴 그랭델이고, 필명 엘뤼아르는 외할머니의 이름에서 따왔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엘뤼아르는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스위스에 있는 요양원에서 생활했다.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갈라를 만나 1917년 결혼하여 이듬해에 딸 세실을 얻었다. 그러나 훗날 갈라가 살바도르 달리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이혼하고, 1934년 뉘슈와 결혼했다. 갈라와 뉘슈는 엘뤼아르의 시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에 앞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엘뤼아르는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에 평화주의 및 자유주의 사상을 품은 첫 시집 『의무와 불안』(1917)을 발표한다. 그리고 루이 아라공, 앙드레 브르통, 차라 등과 만나면서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하고, 『동물들과 그들의 인간들, 인간들과 그들의 동물들』(1920), 『삶의 필연성과 꿈의 결과』(1921) 등을 통해 다다이즘 성향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1924년에는 약 7개월간 혼자 세계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잠적한 이유에 대해 별다른 해명 없이 초현실주의 운동에 앞장선다. 이후 1936년까지 초현실주의 절정기의 작품을 선보이는데, 그중 걸작으로 꼽히는 시집으로는 『고뇌의 수도』(1926), 『대중의 장미』(1934), 『비옥한 눈』(1936) 등이 있다. 엘뤼아르는 1936년 에스파냐 내전을 목격하고 참여 시인으로 변모한다. 시인이 현실 세계 속에 재통합되기를 바란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전념한다. 1942년 공산당에 재가입하고,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진 『시와 진실 1942』(1942)를 펴낸다. 영국 공군은 이 시집에 실린 시 &lt;자유&gt;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독일군 점령하의 프랑스에 뿌려 희망과 위안을 전했다. 정전 후에 엘뤼아르는 세계 각지에서 강연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대 의식을 고취했으나, 1946년 뉘슈가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하자 깊은 절망과 공허에 빠진다. 그 후 민중의 평화와 자유, 독립을 위해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등지에서 강연하다가 1949년 도미니크를 만나 생의 기쁨을 되찾고 그녀와 세 번째 결혼을 했으나 1952년 폐렴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시집 『끊임없는 시 II』(1953)는 사후에 출간되었다.

오규원(지은이)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에서 출생하였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 『사랑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두두』(2008, 유고시집)가 있다. 이 밖에 시선집 『한 잎의 여자』(1998), 『오규원 시전집』(전 2권, 2002), 『오규원 깊이 읽기』(2002)와 시론집 『현실과 극기』(1976), 『언어와 삶』(1983), 『날이미지와 시』(2005) 그리고 시 창작이론집 『현대시작법』(1990)을 펴낸 바 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7년 2월 2일에 작고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지은이)

아일랜드의 시인 &#8231; 극작가 &#8231; 작가 &#8231; 문학평론가 &#8231;정치가였다. 처음 발표한 것은 2편의 짧은 서정시로 1885년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 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또한 『오이신의 방랑기 외 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1889)에 수록된 초기 시는 탐미주의 작품으로, 아름답지만 난해하며 사소한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한 영혼의 외침이었다. 한편 예이츠는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 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했다. 그런 활동은 더블린에 그 유명한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절정에 다다랐다. 1914년 『책임 Responsibilities』이 나왔고, 192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25년 『비전 A Vision』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탑 The Tower』(1928)은 그가 고트에서 구입한 무너진 노르만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도도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 뒤에 쓴 『나선층계 The Winding Stair』(1929)이다. 그는 아일랜드 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인 것에 쏟았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 자기 친구들이 쓴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Oxford Book of Modern Verse』(1892~1935)편집을 맡았다. 1938년 『헌의 알 The Herne's Egg』을 완성했다. 예이츠는 1939년 1월 28일 프랑스 멘통 근처 로크브룬-카프-마르탱에 있는 호텔 이데알 보세주르에서 73세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로크브륀에 묻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 옮기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좌절되었다. 1948년 그의 시신은 슬라이고로 넘겨져서 드럼클리프에 있는 작은 개신교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시집 Last Poems』(1939)에 수록된 시 &#65378;벤 블벤 아래에서 Under Ben Bulben&#65379;에 명시된 장소로 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윤동주(지은이)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 조치되자,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 외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시를 발표하였으며,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대학 시절 틈틈이 쓴 시 19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신변을 염려한 스승과 벗들의 만류로 뜻을 보류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고향 용정에 묻혔다. 일제의 생체 실험 주사에 따른 희생으로 추정될 뿐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이성선(지은이)

1941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전공했다. 1970년 &lt;문화비평&gt; 에 &lt;詩人의 屛風&gt; 외 4편을 발표하고 1972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1988년 강원문학상, 1990년 제22회 한국시인협회상, 1994년 제6회 정지용문학상, 1996년 제1회 시와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1년 5월 6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lt;詩人의 屛風&gt; &lt;늘 문을 두드리며&gt; &lt;몸은 지상에 묶여도&gt; &lt;밧줄&gt; &lt;시인을 꿈꾸는 아이&gt; &lt;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gt; &lt;별이 비치는 지붕&gt; &lt;별까지 가면 된다&gt; &lt;새벽 꽃향기&gt; &lt;향기나는 밤&gt; &lt;절정의 노래&gt; &lt;벌레시인&gt; &lt;山詩&gt; &lt;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gt; 등이 있다.

이육사(지은이)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이가호와 허길 사이에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의 형제 중 다섯째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월북 이후 1950년대 초 숙청당한 이원조다. 어릴 때 조부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19년에 신학문을 접한 보문의숙을 졸업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대학 상과에 입학해 7개월간 다녔다.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었다. 일본 경찰이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해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되었다. 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 1월 3일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1935년 정인보 댁에서 시인 신석초를 만나 친교를 나눴다. 같은 해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1940년 4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퉁(東廠胡同) 1호에서 옥사했다.

정지용(지은이)

충북 옥천. 아명은 지용(池龍), 본명은 지용(芝溶), 필명은 한글로 '지용'을 사용하였다. 섬세한 감각으로 우리말을 살려낸 시인이자, 1939년에 창간된 『문장』지를 통해 당대 문인들을 발굴, 교류하였고, 윤동주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에 영향을 준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김영랑과는 휘문고보 동문으로 '지용 형(芝溶 兄)'이라는 존경과 애정이 담긴 글을 발표할 정도로 절친한 문우(文友)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이후 행방은 파악되지 않았다.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로 다시금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정채봉(지은이)

1946년 순천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꽃다발〉로 당선의 영예를 안고 등단했다. 그 후 대한민국문학상(1983), 새싹문화상(1986), 한국불교아동문학상(1989), 동국문학상(1991), 세종아동문학상(1992), 소천아동문학상(2000)을 수상했다.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용어를 만들어 냈으며 한국 동화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가 독일에서, 《오세암》은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마해송, 이원수로 이어지는 아동 문학의 전통을 잇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모교인 동국대, 문학아카데미,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 등을 통해 숱한 후학을 길러 온 교육자이기도 했다. 동화 작가,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 교수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던 1998년 말에 간암이 발병했다. 죽음의 길에 섰던 그는 투병 중에도 손에서 글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겪은 고통, 삶에 대한 의지, 자기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을 펴냈고, 환경 문제를 다룬 동화집 《푸른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 첫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펴내며 마지막 문학혼을 불살랐다. 평생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고 맑게 살았던 정채봉은 2001년 1월, 동화처럼 눈 내리는 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정현종(지은이)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경기도 화전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는데, 이때의 자연과의 친숙함이 그의 시의 모태를 이룬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신태양사·동서춘추 · 서울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였다. 그 후 1974년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며, 돌아와서는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나와 지금까지 쉼 없는 창작열과 자신의 시 세계를 갱신하는 열정으로 살아 있는 언어,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왔다.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래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광휘의 속삭임』 『그림자에 불타다』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펴냈다. 또한 시론과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두터운 삶을 향하여』 등을 출간했으며,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네 권과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집 한 권을 번역했다.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경암학술상(예술 부문), 파블로 네루다 메달 등을 수상했다.

정호승(지은이)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으며,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별들은 따뜻하다》 《새벽편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밥값》 《여행》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당신을 찾아서》 《슬픔이 택배로 왔다》 《편의점에서 잠깐》과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 《수선화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동시집 《참새》 《별똥별》을 냈다. 이 시집들은 영한시집 《A Letter Not Sent(부치지 않은 편지)》 《Though flowers fall I have never forgotten you(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외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조지아어, 몽골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와 우화소설 《연인》 《항아리》 《조약돌》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공초문학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구에 정호승문학관이 있다.

조병화(지은이)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송전공립보통학교, 미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43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화학을 수학하다가 일본 패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습니다. 1945년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유로 교단생활을 시작하여 인천중학교 교사, 서울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을 출간하여 시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1959년 서울고등학교를 사직한 뒤 경희대학교 교수(문리과대학장, 교육 대학원원장 역임), 1981년부터 인하대학교 교수(문과대학장, 대학원원장, 부총장 역임)로 재직하고 1986년 정년퇴임했습니다. 이와 같은 교육과 문학의 업적을 인정받아 대만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시는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인 허무와 고독이라는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해 꿈과 사랑의 삶을 형상화한 점에서 큰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작시집 53권이 증명하듯 그의 시작활동은 남달리 성실했고, 또한 폭넓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국내에서 널리 읽혔듯이 25권에 달하는 시집이 세계 여러 나라(일본·중국·독일·프랑스·영국·스페인·스웨덴·이탈리아·네덜란드) 말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시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는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하였고, 국제적으로는 세계시인대회 국제이사, 제4차 세계시인대회(서울, 1979) 대회장을 맡아 시인들의 국제교류에 힘썼습니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1년 제5차 세계시인대회에서는 계관시인(桂冠詩人)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겸하여 초대전을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유화전 8회, 시화전 5회, 시화―유화전 5회 등). 그의 그림은 그의 시 세계와 흡사하여 아늑한 그리움과 꿈을 형상화함으로써 우리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끕니다. 그는 아세아자유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3·1문화상, 대한민국문학대상,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 5·16민족상 그리고 세계시인대회에서 여러 상과 감사패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금과 원고료를 모아 후배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1991년 편운문학상을 제정하였습니다. 2003년 3월 8일 작고하기까지 창작시집 54권,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화집 5권, 수필집 37권 등을 비롯하여 총 16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천양희(지은이)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 『지독히 다행한』,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산문집 『시의 숲을 거닐다』 『직소포에 들다』 『내일을 사는 마음에게』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청마문학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수상했다.

칼릴 지브란(지은이)

1883년 레바논 북부 지방의 작은 마을 베샤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레바논의 대표 작가로 철학가·화가·소설가·시인으로 활동했다. 1895년 세무 관리를 담당했던 아버지의 업무상 실수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전부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89년 고향으로 돌아와 아랍 문학을 공부했다. 1902년 고향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중, 보스턴에 있던 누이동생 술타나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이후 1903년에는 형 부트로스와 어머니가 사망했다. 가족들의 잇단 죽음을 겪은 지브란은 그림 및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1908년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아랍 어로 쓴 《반항하는 영혼》을 출간했다. 1914년 뉴욕 몽트로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어 언론의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으며, 1917년 뉴욕 노들러 갤러리에서 연 전시회를 통해 화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18년 35세에 비로소 영어로 쓴 첫 작품 《광인》을 출간했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923년에 《예언자》를 출간했다. 1930년 그의 생전에 나온 마지막 책 《지상의 신들》을 출간했다. 1931년 4월 10일 뉴욕에서 결핵과 간경화증 악화로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하인리히 하이네(지은이)

괴테, 실러와 더불어 독일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한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낭만주의풍의 시를 쓴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여러 작곡가가 그의 시를 노랫말로 삼아 아름다운 성악곡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서정시인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하이네는 ‘3월 이전’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서 신문과 잡지 기사를 비롯하여 소설, 드라마, 수필, 여행기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당대의 현실을 질타했던 참여 지식인이자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사회 비판, 즉 독일의 정치와 정신세계에서 나타나는 반동적 요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에 직면하게끔 했고, 프랑스 7월 혁명(1830)에 열광했던 그는 결국 1831년 독일을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곧 파리의 살롱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조르주 상드, 외젠 들라크루아, 프레데리크 쇼팽, 프란츠 리스트 등 당시 파리 문화계의 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하이네는 늘 독일을 그리워했고 그리움은 매번 고통으로 남았다. 그의 작품은 독일에서 검열과 압수의 대상이었고, 프로이센 정부는 하이네를 추방할 것을 프랑스 정부에 꾸준히 요구했다. 향수병에 더해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에 시달리던 하이네는 1856년 2월 17일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여행 화첩》, 《노래의 책》, 《로만체로》, 《파우스트 박사. 무용 시》, 《고백록》, 《망명 중의 신들》, 《루트비히 마르쿠스》, 《1853년과 1854년의 시》, 《루테치아》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한용운(지은이)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이다. 속명은 정옥, 법명은 용운, 호는 만해였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한문과 경전을 통달했고, 14세에 조혼했으나 집을 나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 등에서 불교를 공부하며 출가했다. 일본을 방문해 신문물을 접한 뒤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독립선언서 수정과 공약삼장 작성에 기여했고, 이로 인해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20년대에는 『유심』지를 창간하고, 1925년 시집 『님의 침묵』을 집필해 상징적 언어로 독립정신을 노래했다.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참여해 사회운동을 이끌었으며, 불교를 통한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33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1944년 영양실조로 입적했다. 그의 삶은 수행자이자 저항시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이었다.

함형수(지은이)

<해바라기의 비명>

헤르만 헤세(지은이)

1877년 독일 남부 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목사이자 선교사인 아버지와 유서 깊은 신학자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위스 바젤과 칼프에서 성장했다. 열다섯 살 때 재학 중이던 신학교를 그만두며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 헤세는 그해 6월 삶의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신경쇠약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인문계 중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다니다 다시 학업을 중단했고, 시계 공장과 서점 등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며 글쓰기에 전념했다. 1899년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첫 산문집 『자정 너머 한 시간』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정 너머 한 시간』 출간을 결정한 독일 디더리히스 출판사의 대표 오이겐 디더리히스는 “이 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그 문학적 가치를 확신한다”라며 헤세에게 작가로서의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책으로 독일 문학계에 이름을 알린 헤세는 1904년 『페터 카멘친트』로 큰 주목을 받으며 일약 유명 작가로 발돋움했고,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청춘은 아름다워』 등을 발표하며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포로구호’에서 일하며 전쟁포로들과 억류자들을 위한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정치적 논문과 선전문 등을 발표하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규탄했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독일 내에서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전쟁 기간 당시 정신적 어려움을 겪다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심리치료를 받았으며, 종전 뒤인 1919년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데미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젊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작품성 역시 인정받아 베를린시에서 주관하는 폰타네상을 수상했다. 이후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 등 여러 작품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군국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이고 나치를 경계한다는 이유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나치 집권 이후에는 독일 내에서 작품의 제작과 판매가 어려워졌다. 종전 뒤인 1946년부터 독일에서 다시 헤세의 작품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같은 해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수상했다. 1950년 브라운슈바이크시에서 주관하는 빌헬름 라베 상을, 1955년 서독출판협회에서 주관하는 평화상을 수상했다. 1962년 스위스 몬타뇰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폴 베를렌느(지은이)

1844년 3월 30일 프랑스 로렌 주(州) 메츠에서 공병 장교인 아버지와 부농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너무도 귀하게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어린 베를렌은 버릇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명민한 아이였다. 열한 살이 되자, 보나파르트 고등학교(Lycee Bonaparte)에 진학했는데,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특히 언어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7년 과정의 이 학교에서 베를렌은 처음 3년 동안은 분명 모범생이었지만, 4년째 접어들자 돌연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고 시와 소설에 몰입한 문학 소년이 되었다. 1862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해서 가까스로 법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대학생이 된 그는 또다시 문학에만 몰두할 뿐, 정작 법률 공부는 등한시했다. 아버지의 강요로 잠시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던 베를렌은 이내 대학 공부를 집어치우고, 1864년 파리 시청의 직원 채용 시험에 합격해 등초본 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 덕에 1865년부터 베를렌은 마음 편히 문필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으며, 1869년 친구의 이복여동생인 마틸드 모테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1년의 교제 끝에 혼인했다. 1871년 3월, 파리에 시민 혁명 정부인 코뮌이 수립되자 베를렌은 협력자로서 홍보 관련 일을 맡기도 했는데, 두 달 만에 코뮌이 진압된 후, 그 일로 인해 처벌받을까 두려웠던 그는 외가 친척들 집을 옮겨 다니며 은신하다가 결국 시청으로부터 파면 통보를 받았다. 이 무렵, 안면부지의 열일곱 살 문학청년 랭보가 베를렌 앞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와 함께 자작시 몇 편을 보내왔다. 랭보의 시에 탄복한 베를렌은 이윽고 랭보를 불러 처가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반항적인 랭보는 보름 만에 그 집에서 쫓겨나 베를렌의 친구들 집을 전전했으며, 이때부터 베를렌은 랭보와 아내 마틸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1873년 7월,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지내던 베를렌의 부름을 받고 랭보가 찾아왔다. 격렬한 언쟁이 이어졌고 술에 취한 베를렌은 파리로 떠나겠다는 랭보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탄환 중 한 발이 랭보의 손목에 경상을 입혔고, 베를렌은 벌금형과 함께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곧장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듬해인 1874년 4월, 파리 법원은 마틸드의 청원을 받아들여 베를렌 부부의 법적 별거 선고를 내렸는데, 벨기에 몽스(Mons)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베를렌은 가톨릭에 귀의해 7월에 영성체 의식을 치렀다. 1875년 1월이 되자 마침내 베를렌은 석방되었고, 그 뒤 188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사립학교 몇 군데를 오가며 교사 일을 하는 동시에 꾸준히 시를 써 나갔다. 1882년 7월, 파리 근교의 한 호텔에 거처를 정한 베를렌은 지난 10년간 소원했던 파리의 문인들 곁으로 돌아왔는데, 그간에 완성한 그의 시들이 ≪현대적인 파리≫를 비롯한 여러 문학잡지를 통해 연이어 소개되었다. 나날이 깊어 가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베를렌은 왕성한 필력으로 여러 편의 산문집과 시집, 희곡 작품을 발표했으며, 어느덧 프랑스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892년에 들어서면서 젊은 숭배자들의 초청으로 베를렌은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를 돌며 시학 강연을 이어 갔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장 훌륭한 시인을 뜻하는 ‘시인의 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가 있었다. 빅토르 위고에게서 그 칭호를 계승한 르콩트드릴이 1894년 세상을 떠나자 시인들은 새로운 ‘시인의 왕’을 뽑아야 했는데, 400명 가까운 젊은 문인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당대의 유명 시인들 중에서 베를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시인의 왕’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살아생전의 영광도 잠시뿐. 1896년 1월 8일, 폐울혈 증세를 보이던 베를렌은 급기야 52세를 일기로 그 자신이 표현했던 “저주받은 시인”다운 처량하고 굴곡진 삶을 마감했다. 이틀 뒤 수천 명의 장례 행렬이 애도하며 그의 유해를 파리 북쪽의 바티뇰(Batignolles) 묘지로 운구했으며, 그와 절친했던 여러 문인들이 애절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시인 말라르메는 베를렌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한 기금조성위원회를 발족했고, 그 결실로 마침내 1911년 파리 뤽상부르공원의 양지바른 곳에 그의 흉상을 새긴 추모비가 세워졌다.

로버트 프로스트(지은이)

미국의 시인이다. 시골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미국식 구어체 표현 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프로스트는 20세기 초 뉴잉글랜드의 시골 생활을 배경으로 자주 글을 썼으며, 이를 통해 복잡한 사회적, 철학적 주제를 탐구했다. 생전에 자주 영예를 누렸던 프로스트는 시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시인이다. 그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대중 문학가, 거의 예술 기관” 중 한 명이 되었다. 1958년 미국 계관시인으로 임명되었고, 1960년에는 의회 금메달을, 1961년에는 버몬트주 계관시인으로 임명되었다. 작품으로 『소년의 의지』, 『보스턴 북쪽』, 『산악 구간』,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 『로버트 프로스트 시집』, 『증인의 나무』 등이 있다.

서안나(지은이)

1990년 《문학과 비평》 겨울호 시 등단,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 『애월』, 평론집으로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 『정의홍선집 1ㆍ2』, 『전숙희 수필 선집』, 불교문예 작품상 수상, 대학 출강.

박두진(지은이)

시인.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정지용에 의해 〈향현〉, 〈묘지송〉 등이 《문장》에 추천되며 등단했다. 박목월,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민족적 울분과 해방에 대한 소망을 자연과 신앙에서 구하는 시풍에서 출발하여,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과 영적 성숙을 위한 언어적 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는 시적 편력을 일관되게 보여 주었다. 연세대, 단국대, 추계예술대 등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아세아자유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3·1 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상, 동북아 기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청록집》, 《해》, 《오도》, 《포옹무한》, 《수석열전》, 〈박두진 전집〉(전10권), 〈박두진 산문 전집〉(전7권)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이 있다. 그의 고향 안성에서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되살리는 뜻에서 해마다 10월에 ‘혜산 박두진 문학제’가 열리며, 공모를 통해 ‘혜산 박두진 문학상’을 시상한다.(올해 제13회) 2018년 가을에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296 안성맞춤랜드 내에 박두진문학관이 이전·개관할 예정이다.

이용악(지은이)

1914년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에서 태어났다. 1932년에 도일하였고 1935년 3월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신인문학』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7년 도쿄 산분샤三文社에서 첫 시집 『분수령』을 발표하고 1938년에 두 번째 시집 『낡은 집』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냈다. 1939년에 귀국하여 다수의 잡지, 언론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1943년에 모종의 사건으로 칩거에 들어갔다. 해방 후 1947년 아문각에서 『오랑캐꽃』, 1949년 동지사에서 『이용악집』을 발간했다. 1950년에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과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의 서울 점령에 의해 풀려나 월북한다. 1955년에 민주청년사에서 산문집 『보람찬 청춘』을, 1957년에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리용악 시선집』을 발간했다. 1963년에는 공역으로 『풍요선집』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에서 발표했다. 1971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김기택(지은이)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크리스티나 G. 로세티(지은이)

1830년 12월 5일 영국 런던의 샬럿 가 38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탈리아 중부 지방인 아브루초에서 런던으로 정치 망명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레 로세티였고 모친은 바이런과 셸리의 친구이며 내과 의사이자 작가인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여동생 프랜시스 폴리도리였다. 막내딸인 그녀에게는 두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언니가 있었는데,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는 빅토리아조 후기 예술가들의 문예 운동인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를 결성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이끈 화가이자 시인이었고, 또 다른 오빠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와 언니 마리아 프란체스카 로세티는 작가였다. 주로 낭만적인 시, 종교적인 시, 동시를 쓴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조숙한 감상력을 나타냈으며, 오빠처럼 시인 기질을 타고 났는데, 열두 살인 184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빠 단테는 일찍이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해 시를 발표하도록 권고했는데, 열여덟 살인 1848년에 그녀는 ≪아테나 신전(Athenaeum)≫에 첫 번째 시를 발표했고, 그 후에는 “엘렌 앨런”(Ellen Alleyne)이라는 필명으로 라파엘 전파가 간행하고 오빠 윌리엄이 편집을 맡은 문학잡지 ≪기원(The Germ)≫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서른한 살 때인 1862년에는 그녀의 첫 시집이자 가장 유명한 시집인 ≪고블린 시장과 기타 시들(Goblin Market and Other Poems)≫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많은 비평적 찬사를 받았으며 그녀를 당대 주요 여류 시인으로 확고히 서게 해 주었는데, 1861년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죽고 그 이듬해에 나온 이 시집은 곧바로 그녀를 엘리자베스의 계승자로 열렬한 환호를 받도록 했다. 또한 환상적인 시, 동시, 종교시, 설교문, 논설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그녀에게 홉킨스, 스윈번, 테니슨 등도 찬사를 보냈으며, 후에 암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테니슨의 뒤를 이을 계관시인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1870년대 초부터 그녀는 고통스럽고 보기 흉한 그레이브스병(안구가 돌출되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걸려 고생했다. 그리고 1893년에는 유방암에 걸려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그 이듬해에 재발해 결국 1894년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생전에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 동물을 실험에 이용함으로써 학대하는 것, 미성년자를 창녀로 이용해 노동 착취하는 것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지은이)

20세기 그리스의 시인으로 1863년 4월 29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는 영국에서 생활하며 셰익스피어 등 영국의 시들을 읽고 쓰며 시적인 감성을 형성했다. 가족의 사업 실패 후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는데 1882년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온 영국의 알렉산드리아 침공으로 인해 집이 파괴되자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한다. 188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아 삼십 년 동안 일한다. 1903년 그레고리오스 제노풀로스Gregorios Xenopoulos를 통해 그리스 문학계에 그의 시가 소개되지만 주류 사조와 맞지 않아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당대 알렉산드리아의 지하에 숨어 있던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탐구하고 남성의 아름다움과 쾌락을 찬미했던 카바피의 시는 상속자이자 연인으로 알려진 알렉산더 싱고폴로스Alexander Singopoulos에 의해 사후에야 154편의 시를 엮은 《시poemeata》로 발간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카바피를 만난 E. M. 포스터는 그의 시를 영어권에 처음 알렸으며 카바피의 상징주의적, 낭만주의적 분위기, 관능적인 시들은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데이비드 호크니는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를 읽고 영감을 받아 〈14개의 시를 위한 삽화〉 판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일흔 번째 생일인 1933년 4월 29일에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허영자(지은이)

1938 경남 함양 출생 1962 『현대문학』 등단 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 (1966) 『어여쁨이야 어찌 꽃 뿐이랴』 (1977) 『목마른 꿈으로써』 (1997) 『은의 무게만큼』 (2007) 『투명에 대하여』 (2017) 『마리아 막달라』 (2017) 등 다수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목월문학상, 허난설헌 문학상 등 수상

윤곤강(지은이)

1911년 9월 24일에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777번지에서 부친 윤병규(尹炳奎)와 모친 김안수(金安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아호 ‘곤강(崑崗)’은 천자문의 “금생려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崗)”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에 일본 센슈(專修)대학에 입학해 ≪시인춘추(詩人春秋)≫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1월에 종합지인 ≪비판(批判)≫(7호)에 <녯 성터에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이 ≪비판≫을 비롯해서 ≪조선일보≫, ≪우리들≫, ≪중앙≫, ≪조선중앙일보≫ 등에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33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신계단(新階段)≫(8호)에 평론 <반종교문학의 기본적 문제>를 발표해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같이 한다. 1934년 2월 10일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을 해 오던 윤곤강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인 ‘카프(KAPF)’에 가입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7월에 전북 경찰부로 송환되었다가 장수(長水)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2월에 석방된다. 당시 수감 생활의 모습은 그의 시 <향수 1>, <향수 2>, <향수 3>, <창공>, <일기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처음으로 소설 <이순신>을 ≪형상≫(1호)에 발표한다. 이후 그는 충남 당진읍 유곡리로 낙향했다가 1936년에 상경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 1937년에 서울의 사립학교인 화산(華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그의 첫 시집 ≪대지(大地)≫(풍림사)를 발간하게 된다. 이듬해에 제2시집 ≪만가(輓歌)≫(동광당서점)를 펴낸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제3시집 ≪동물 시집≫(한성도서주식회사)을 발간하게 되고, 다음해에 제4시집 ≪빙화(氷華)≫를 출간하는 등 4년에 걸쳐 시집 네 권을 펴내는 왕성한 모습을 보여 준다. 1943년에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 전신)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그는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 시부회(詩部會) 간사로 임명되기도 한다. 1944년 동거하던 김원자와 사별하게 된 그는 충남 당진읍 읍내리 368번지로 낙향한다. 이 시기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면 서기로 근무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상경한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에 가담해 식민지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출하던 작품 세계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모교인 보성고보 교사로 근무하게 되고,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한다. 이 시기 문우들과 함께 해방 기념 시집인 ≪횃불≫을 발간한다. 1947년 그는 성균관대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편주서인 ≪근고조선가요찬주(近古朝鮮歌謠撰註)≫(생활사)를 펴낸다. 1948년에 중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고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 준다. 제5시집 ≪피리≫(정음사)와 제6시집 ≪살어리≫(정음사)를 펴냈으며,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두 번째로 시론집 ≪시와 진실≫(정음사)과 찬주서 ≪고산가집(孤山歌集)≫(정음사)을 발간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 화동 138-113번지에서 작고하게 되고, 충남 당진군 순성면 갈산리에 안장된다. 제주 조각공원과 보성고교, 그리고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과 그의 묘소 입구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오세영(지은이)

1942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전남의 장성과 광주, 전북의 전주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68년 박목월에 의해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시집 『사랑의 저쪽』 『바람의 그림자』 『마른 하늘에서 치는 박수소리』 등 29권, 학술서 및 산문집 『시론』 『한국현대시분석적 읽기』 등 24권이 있다. 만해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소월시문학상, 고산문학상 등과 국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시집 『밤하늘의 바둑판』 영역본은 미국의 문학비평지 Chicago Review of Books에 의해 2016년도 전 미국 최고시집(Best Poetry Books) 12권에 선정되었다.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체코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된 시집들이 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이다.

고석규(지은이)

1932년 9월 7일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6년 3월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58년 3월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4월 19일 심장마비로 인해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학 재학 시 손경하·하연승·김일곤·홍기종·장관진 등과 함께 동인 활동을 활발히 해 ≪신작품(新作品)≫, ≪시조(詩潮)≫, ≪시 연구(詩硏究)≫, ≪부산 문학(釜山文學)≫ 등의 동인지를 펴냈고, 1954년에는 김재섭과 함께 2인 공저 ≪초극(超劇)≫을 간행했으며, 1957년 ≪문학예술(文學藝術)≫에 평론 <시인의 역설>이, 1958년 ≪현대문학≫에 그가 남긴 유고 <시적 상상력>이 연재되기도 했다. 고석규는 1950년대라는 무참한 폐허의 공간과 삶의 한계성에서 비롯된 실존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형상화한 비평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유고 평론집 ≪여백의 존재성≫(지평, 1990)이 출간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1993년 ≪오늘의 문예비평≫ 동인들에 의해서 ≪고석규 유고 전집≫(총 5권)이 간행됨으로써 그의 문학에 대한 온전한 평가와 문학사적 자리매김이 모색되었다. 1950년대 한국 문학사, 특히 비평문학을 정리하는 가운데 결코 지나쳐 버리거나 폄하되어서는 안 될 그의 문학적 면모는, 그가 걸어온 ‘미완의 문학적 행로’만큼이나 구석진 곳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문예비평≫ 동인들의 집중적인 노력과 그를 아끼던 은사, 친우 등의 애정 어린 관심 속에 그가 남긴 문학적 성과는 비로소 전모를 드러내면서 문단 안팎의 적지 않은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는 1950년대 문학 연구에서 그를 제외시켜 버리면 미완의 문학사가 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문학 세계는 1950년대 한국 문학사를 새롭게 쓰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요 근원이 되는 의미심장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황석우(지은이)

1895년 경성부 천연동 16번지 출생 1911년 보성전문학교 입학, 3년 수료 후 보성전문학교 모표 사건으로 퇴학 1914-15년경 도일 1916년 1월 16일 격월간지 &lt;근대사조&gt; 발간 1918년 미키로후(삼목로풍)가 주관한 미래사 동인으로 활동 1919년 2월 홍영우, 유지영, 이병도 등과 함께 동경 유학생 낙우회(樂友會)의 기관지 &lt;삼광(三光)&gt; 창간 1920년 4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 전문부 정치경제학과 입학 1921년 5월 &lt;장미촌&gt; 창간(동인 변영로, 노자영, 박종화, 박영희, 정태신, 이훈, 오상순 등) 1921년 11월 25일 동경에서 원종린, 조용희, 정재달과 함께 문화주의 운동 선전문을 배포하다 검거됨 1922년 7월 &lt;폐허(廢墟)&gt; 창간(창간 동인 김억, 남궁벽, 오상순, 이병도 등과 함께 참 여) 1922년 9월 제적. &lt;삼광&gt; 3월호에 ‘고뇌(苦惱)의 려(旅)’ &lt;창조&gt; 6호에 ‘눈으로 애인아 오너라’, ‘소곡(小曲)’ 등을 발표하며 여러 매체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 1927년 2월 만주 장춘에서 만주이주조선농민보호연구회 부회장으로 취임 1927년 10월 &lt;조선시단&gt; 창간 1945년 대동신문 주필 취임 1945년 12월 건국기금조성회 총무부에 참여 1946년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 가입 1953년 4월 국민대학교 교무처장 취임 1955-58년 동아일보, 현대문학 등 각종 매체에 작품 활동 활발히 함 1959년 4월 지병으로 영면

노자영(지은이)

1919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했으며,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했다. 1925년경 일본으로 넘어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으나 폐질환으로 5년간 병석에 있었다. 1934년 ≪신인문학(新人文學)≫을 간행하였으나 자본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1935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하여 ≪조광(朝光)≫지를 맡아 편집하였다. 1938년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청조사(靑鳥社)를 직접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작품 활동은 1919년 8월 ≪매일신보≫에 '월하(月下)의 몽(夢)'이, 그 해 11월에 '파몽(破夢)'·'낙목(落木)' 등이 시부분에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1921년 ≪장미촌≫, 1922년 ≪백조≫ 창간 동인으로 가담하여 ≪백조≫ 창간호에 시작 '객(客)'·'하늘의 향연(饗宴)'·'이별한 후에'를 발표했고, ≪백조≫ 2호에 '우연애형(牛涎愛兄)에게'라는 수필을 발표했다. 1923년 소설 ≪반항(反抗)≫, 1924년 첫 시집 ≪처녀(處女)의 화환(花環)≫, 1928년 제2시집 ≪내 혼(魂)이 불탈 때≫, 1938년 제3시집 ≪백공작(白孔雀)≫ 등을 간행하였다. 1940년 10월 6일 사망했다.

오일도(지은이)

1901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영양의 천석 거부 오익휴의 차남으로 본명은 희병(熙秉)이었다. 일도는 아명이었는데, 후에 필명으로 사용했다. 한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집안이라 8세부터 14세까지 한학을 공부했다. 이때 공부한 한학의 영향으로 한시를 창작했으며 한시 78수를 남겼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굉장히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17세에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면서 근대 교육 체계 속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습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1922년 18세 때에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유학 중이던 1925년 ≪조선문단≫을 통해 <한가람 백사장에서&gt;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초기 시들은 비극적인 낭만성과 압축미가 있어 높은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 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릿쿄대학(立敎大學)을 졸업하고 1929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 중앙, 휘문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전하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오일도가 집안이 부유해서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3년 ≪현대시학≫에 그의 유고가 발표되면서 함께 실린 김해성(金海星)의 &lt;오일도의 시&gt;에 그가 교편을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유고 시집 ≪저녁놀≫에도 그러한 기록이 실린 것으로 보아 한동안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이 사실로 보인다. 귀국 후 여러 시인들과 교우를 쌓았다. 특히 이하윤과는 절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는 오일도가 시인으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다. 이는 특히 그가 1935년 시 전문 문예지 ≪시원≫을 창간한 것과 관련이 깊다. ≪시원≫은 범시단적 잡지로 출범하면서 여러 시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카프 계열의 시인들 작품을 싣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오일도는 ≪시원≫을 발간하면서 잡지 발행인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지만 안타깝게도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채 1년이 못 되는 기간 동안 총 5호 정도만 발간했지만 ≪시원≫은 1930년대 한국 문단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그 외에 1936년에 ≪을해 명시 선집(乙亥明詩選集)≫과 1938년에 조동진의 유고 시집 ≪세림 시집≫을 발간하는 등 편집자로서의 재능도 발휘했다. 이들 시집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되고 있다. ≪시원≫의 종간은 오일도의 심신에 큰 충격을 남겼다. 그는 이후 폭음 등으로 건강을 상했으며 결국 1942년 고향으로 낙향해 요양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해 서울로 올라가 ≪시원≫을 복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심화되어 ≪시원≫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대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오일도는 귀향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결국 1946년 고향 영양에서 투병 중에 병세가 악화되면서 여의전병원에서 운명했다. 사인은 과도한 폭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추정된다. 오일도 시인의 대표작으로는 &lt;내 소녀&gt;, &lt;도요새&gt;, &lt;지하실(地下室)의 달&gt; 등이 있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오일도 시인은 ≪시원≫을 창간함으로써 1930년대 문단에 다양성을 가져오고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과 함께 문학사적으로 조명받고 있다.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유고 시들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년 뒤엔 1976년 유고 시집 ≪저녁놀≫이 근역서재에서 발간되었다. 이들 유고는 오일도 시인이 생전에 조지훈 선생에게 맡겨 두었던 것인데, 조지훈 선생 사후 조지훈 선생의 고모인 시조 시인 조애영 선생이 묶었다. 이후에 ≪지하실의 달≫이 문화공론사에서 출간되었으며 1988년에는 영양 출신 시인 이병각, 조지훈, 조동진, 오일도 네 사람의 시를 묶어 낸 ≪영양 시선집≫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 경북 영양에는 오일도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 인근에 오일도 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A. E. 하우스먼(지은이)

낭만적 비관주의를 간결한 문체로 노래한 영국의 고전학자이자 시인이다. 순진하고 우울한 청년의 모습을 그린 『슈롭셔의 청년』(1896)으로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1922년에 발표한 『마지막 시』(1922)는 대학 시절 동급생이자 평생 사모했던 모세 잭슨이 캐나다에서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써 온 시들을 모은 책이다.

김승희(지은이)

195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태양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이 있으며,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과 산문집 『33세의 팡세』 『어쩌면 찬란한 우울의 팡세』 등을 썼다. 소월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이다.

이장희(지은이)

1900년 11월9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에서 당대 손꼽히는 부호이자 전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과 박금련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박금련은 이병학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이장희의 처음 이름은 양희였으나 그가 20세 되던 해인 1920년 4월에 개명한 호적에는 장희(樟熙)로 고친 바 있고 뒤에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3∼1924년 사이에는 장희(章熙)로 줄곧 썼는데 이것이 필명이 되었다. 아호는 고월(古月. 혹 근자에 ‘孤月’·‘苦月’ 등을 그의 아호의 하나로 보고자 하는 일이 있으나 그는 아호로서 ‘古月’만을 썼을 뿐이다)이다. 아버지 이병학은 장희의 생모 박금련이 1905년 사망한 이래 박강자, 조명희 등을 맞아들여 슬하에 12남 9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 유아 때 사망한 7남매(3남 4녀)를 제외하면 모두 9남 5녀의 14남매가 된다. 이장희는 아호 고월 이외에 어렸을 적에 ‘꿀돼지’, ‘꿀봉’, ‘박쥐’와 같은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1905년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박금련이 사망한 후 들어온 계모 박강자는 1923년 8월 사망하기까지 이병학과의 사이에 11남매를 두었다. 1906년 이장희는 6세로 대구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3년 13세로 일본에 건너가 경도중학교에 입학한다(하나 근자 조사해 확인한 결과 이장희가 경도중학에 입학 내지 졸업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1918년 18세로 귀국했는데 일설에는 일본 청산학원을 지망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 1924년 24세 때 5월 문예 동인지 ≪금성≫ 3호에 이장희라는 필명으로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머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가운데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시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잡지에 톨스토이의 소설 <장구한 귀양>을 번역해 실었다. 12월 여성 전문지 ≪신여성≫(2권 12호)에 시 <동경>을 발표했는데 혹 일설에는 이 작품의 모티프는 이장희가 일본 경도에 체류했을 때 알고 지냈던 소녀 에이코에게서 찾은 것이라고 한다. 1925년 25세가 된 그는 ≪신여성≫(3권 2호, 1월호)에 시 <석양구>를 ,종합 문예지 ≪생장≫(5호, 5월호)에 <고양이의 꿈>, <가을밤>을 발표하고 시사 종합지인 ≪여명≫(1호, 6월호)에 <청천의 유방>과 <비 오는 날>을, ≪신민≫(5호, 9월)에 <사상(沙上)>, <비인 집>을 발표한다. 계속해서 ≪신민≫(6호, 10월호)에 <달밤 모래 우에서>와 <연> 등을 발표한다. 1926년 26세로 ≪신민≫(9호, 1월호)에 시 <겨울의 모경>을, ≪여명≫(7호, 6월호)에 <봄 하눌에 눈물이 돌다>와 ≪신민≫(16호, 8월호)에 <하일 소경>을, ≪신민≫(19호,11월호)에 <들에서>와 <눈>을 발표한다. 1927년에는 ≪조선문단≫ 20호, 4월호)에 시 <가을ㅅ밤>을, ≪신민≫(26호, 6월)에 <눈은 나리네>, <봄철의 바다>를, ≪신민≫(28호, 8월)에 <저녁>을 발표했으며, 이듬해에는 ≪여시≫(45호, 6월호)에 시 <저녁>, <녀름ㅅ밤 공원에서>를 발표한다. 1929년에는 ≪신민≫(45호, 1월호)에 <버레 우는 소리>, <귓드람이>를, ≪문예공론≫ (1호, 5월호)에 <적은 노래>, <봉선화>, <눈 나리는 날>을, ≪중외일보≫(11월 14일)에 <어느 밤>을 발표한다. 그리고 발표연대 및 게재지 미상의 <여름밤>, <쓸쓸한 시절>을 남겼다. 11월 3일 오후 3시경, 이장희는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 본가의 머슴이 거처하던 작은 방에서 극약을 복용하고 유서 한 장,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해 항상 일본인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과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 오상순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트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가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해서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 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장지는 선산인 대구부 신암정으로 정해져 유해가 안치되었으나 지금 현재 그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오스카 해머스타인(지은이)

배정애()

우리나라 최고의 감성 캘리그라퍼이자 다수의 베스트셀러 작가. 그러나 그전에 그녀는 god의 오랜 팬이다. 인생 첫 콘서트가 god인 건 물론, 해운대에서 열린 ‘게릴라 콘서트’를 보기 위해 제주에서 부산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god에 얽힌 추억은 밤을 새워도 다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과거 ‘god 커뮤니티 지기’로 활동하며 만난 팬들과도 여전히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그녀에게 god란 단순히 좋아하는 가수가 아닌,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처음 알려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번 책 『지금처럼 영원히 함께해』는 그녀가 지금 가장 사랑하고 잘하는 일인 ‘손글씨’로 자신에게 사랑을 보여준 god와 그 팬들에게 전하는 답가이다. 저서로는 『나도 캘리애처럼 손글씨 잘 쓰고 싶어』, 『나도 캘리애처럼 손글씨 잘 쓰고 싶어 워크북』 그리고 캘리그라피를 다양하게 써서 활용해볼 수 있는 『캘리愛 빠지다』, 『캘리愛처럼 쓰다』, 『수채 캘리愛 빠지다』 등이 있다. 인스타그램 @jeju_callilove 블로그 blog.naver.com/kkomataku 유튜브 캘리애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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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일러두기
다시, 시를 잊은 나와 그대에게

PART 1. 모든 사랑이 시다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사는 법 - 나태주
서시 - 나희덕
저녁 - 이장희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가을, 그리고 겨울 - 송찬호
비망록 - 문정희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 앨프리드 E. 하우스먼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 하인리히 하이네
수련 - 정호승
그리고 미소를 - 폴 엘뤼아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정현종
사랑은 - 오스카 해머스타인
그리운 꽃편지 5 - 김용택

PART 2. 쓸쓸함과 그리움이 시다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고독 - 김기림
겨울 바다 - 김남조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 크리스티나 G. 로세티
고독하다는 것은 - 조병화
설야 - 노자영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나를 생각하세요 - 구스타포 A. 베케르
바람의 말 - 마종기
가난한 사랑노래 - 신경림
그릇 - 오세영
밤에 익숙해지며 - 로버트 프로스트
여승 - 백석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봄비 - 노천명
그리움 - 이용악
나비 - 윤곤강
빈집 - 기형도

PART 3. 청춘의 눈부심이 시다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이타카 -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
밥 - 천양희
인생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눈 오는 지도 - 윤동주
달빛 - 폴 베를렌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방랑하며 - 헤르만 헤세
스무 살 - 곽재구
함께 있되 거리를 두어라 - 칼릴 지브란
꽃에 물 주는 뜻은 - 오일도
15도 각도로 기울어진 - 서안나

PART 4. 매 순간이 시다
담쟁이 - 도종환
못 자는 밤 - 윤동주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 김기택
달밤 - 김수영
제도 - 김승희
묵화 - 김종삼
우산을 잃어버리다 - 김기택
건강한 잠 - 김소월
봄비 - 고석규
연못 - 이용악
어머니 1 - 김초혜
길 - 윤동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행복 - 허영자
너에게 쓴다 - 천양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어느 뉴펀들랜드 개의 묘비명 - 조지 고든 바이런

PART 5. 찬란한 모든 것이 시다
하늘 - 박두진
절정 - 이육사
산유화 - 김소월
장미 - 노천명
허공을 메꾸는 계획 - 황석우
이니스프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길 - 윤동주
청포도 - 이육사
별똥 - 정지용
오월의 바람 - 박인환
꽃가루 속에 - 이용악
바람에 나부끼는 - 김영랑
꿈 깨고서 - 한용운

시인 이름으로 찾아보기 (가나다순)
이 책에 실린 시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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