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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 | 1 0 | ▼a 깡통인생 : ▼b 빈 그릇을 채우리라 / ▼d 윤기 |
| 260 | ▼a 서울 : ▼b 답게, ▼c 2019 | |
| 300 | ▼a 257 p. : ▼b 삽화 ; ▼c 22 cm | |
| 945 | ▼a KLPA |
소장정보
|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
| 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897.86 윤기 깡 | 등록번호 111817443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사회사업가인 '윤기'의 출생/성장 배경, 사회사업 여정/업적 및 사화사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자서전적 회고록이다. 정부의 사화복지 분야를 이끌어 가고 있는 사회복지 정책분야 리더나, 사회복지 현장에서 사회복지 업무를 불철주야 실천하고 있는 실무 종사자들을 위한 책이다. 한국 내의 고아들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한 '고향의 집' 건설 및 운영에 관한 실무 스토리를 많이 담고 있다.
이 책은 사회사업가인 ‘윤기’의 출생/성장 배경, 사회사업 여정/업적 및 사회사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자서전적 회고록이다.
정부의 사회복지 분야를 이끌어 가고 있는 사회복지 정책분야 리더나, 사회복지 현장에서 사회복지 업무를 불철주야 실천하고 있는 실무 종사자들을 위한 가치 있는 가이드북이 되리라 믿는다. 더구나 이 책은 한국 내의 고아들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한 ‘고향의 집’ 건설 및 운영에 관한 실무 스토리를 많이 담고 있어 글로벌 사회복지 사업 분야 연구/실행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예상한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아래에 간단히 간추려 적어본다.
저자의 일생(출생/성장 등)
저자 윤기는 1942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운치호는 목포항에서 노방전도를 하면서 다리 밑에서 불을 쬐고 있던 7명의 고아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기숙하기 시작한 일명 ‘거지대장’ 이었다.
어머니는 조선총독부 관리로 목포에 부임한 일본인 외할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와서 공생원에서 음악을 가르치게 된 일본 여성 ‘다우치 치즈코’(훗날 한국명 윤학자)였다.
6 · 25 때 행방불명된 아버지 윤치호를 대신하여 어머니 윤학자가 공생원 원장으로 역임, 운영하였다. 3,000명의 고아를 키워오다가 1968년에 어머니는 57세를 일기로 돌아가시고. 윤기가 26세 되던 해 공생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사회사업을 운영해 왔다.
40세가 된 1982년 일본인 부인(후미에)과 딸 미도리(한국명 녹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 그곳에서 재일코리안을 위한 사회복지 활동을 펼쳤다.
사회복지사업 여정/업적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가 26세에 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공생원의 원생들은 3백여 명으로 보육교사 20명이 한 사람 당 평균 15명의 원생들을 맡아 보고 있었다.
“원장님,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 나라에 가고 싶어요.”라는 어느 원생의 말에 도전을 받아, 고치현 지사의 초청장을 받은 후 ‘수선화 합창단’을 구성하여, 어머니 후원회, 일본항공 및 대한항공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게 되어 사회사업의 한일교류를 시작하였다.
공생원 아이들이 손톱에 붕숭아 물을 들이는 장면과 일제 시대에 부르지 못하게 했던 봉선화 노래라는 의미를 결합하여 ‘봉숭아 언덕’ 이라는 연극을 일본에서 공연하여 한?일간의 연극교류를 시작하였다.
서울에 소년 · 소녀 직업훈련원에 이어 성인들에게도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직업중앙훈련원을 만들어 운영하여 젊은이들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공생원 출신 아이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자신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들에게 생활의 지혜를 가르치고, 자립심을 길러 독립해 나누도록 준비를 한 것이다.
암사동에 ‘정월 초하루의 집’을 마련하여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청소년 200여명이 모여 맥주나 커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며 친교를 하며 위로를 하는 공간을 제공하고, 정월 초하루에는 윤석중 선생님이 만든 ‘설날 노래’를 합창하는 감동을 제공하였다.
오사카 한인 부인회의 협력으로 땅을 매입하여, 시민참가형 기부자들의 출연을 통해 건설비를 마련했다. 1989년 10월 31일 오사카에 건설한 “고향의 집“의 준공식을 필두로 그 후 사카이시, 고베시, 교토시와 오사카후, 효고겐, 교토후, 그리고 긴키코세이교쿠에 ‘고향의 집’을 건설, 성공적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일본의 노인복지법과 노인복지 시설 기준에 의해 허가를 받고, 한국어를 사용하고 김치를 먹거나 아리랑을 부르며 한국인답게 사는 것을 그 시설의 운영방침으로 하고 있다.
1995년 나는 어머니를 소재로 차범석 총 프로듀서와 김수용 감독, 길용우 주연으로 목포 사람들의 인정과 시민정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자연을 소개하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것이 ‘사랑의 묵시록’ 이라는 한.일 합작 영화였다. ‘사랑의 묵시록’은 아름다운 목포의 풍경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었다.
일본 텔레비전에서 ”알고 있는 것 같지만”(인물계 다큐멘터리 교양프로그램)이라는 프로그램에 어머니 윤학자 원장의 생전 활동 상황을 소개하여 일본열도가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사회복지사업 철학
기도는 나의 습관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과 대화를 한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나면 내 안의 비굴함이 없어지고 당당해진다. 하나님은 이런 나에게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의 소신과 하고 싶은 말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나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한다.
나는 왜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가? 나의 적성에 맞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내가 사회사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 보다는 내가 좋아서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나 자만일 수 있다. 나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흔히 복지국가, 복지사회를 논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이 신뢰하는 사회가 복지사회라고 후배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신뢰사회는 평안이 있다. 신뢰사회는 안심할 수 있다. 신뢰사회는 여유가 있다.
이렇게 복지활동은 운영하는 사람이나 이용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감독을 맡고 있는 행정기관이 서로 신뢰하는 가운데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운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하겠다. 복지사회는 신뢰사회다.
일본정부가 사회복지 구조개혁을 단행하면서 2000년부터 양로원도 이용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회복지도 서비스 경쟁시대로 돌입한 것입니다. 이와사키 사장(고치 그랜드 호텔)이 말씀하셨던 마에 아지(前味), 혼 아지(本味), 아토 아지(後味)가 나의 사회복지 경영에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나를 키워준 이와사키 사장님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사회사업을 하면서 금융업에 손을 댄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으며,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회사업을 하다보면 귀에 솔깃한 말도 많고 유혹도 많다. “타고난 팔자가 거지대장 아들이 아닌가, 내 분수대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하고 얘기를 끝냈다.
깡통인생 - 빈 그릇을 채우리라 본문 요약
1장 폭풍과 절벽
나는 이제 겨우 ‘일본놈’ 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난 날을 회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점이 퍽이나 디행스럽다.
운명
아버지 윤치호는 1928년 19세에 목포항에서 선교사와 노방전도를 하면서 다리 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고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을 하며 사회복지 공생원의 역사를 시작한 일명 ‘거지대장’ 전도사였다.
6.25때 아이들을 먹여야 할 식량이 바닥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서 굶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광주로 식량을 구하러 떠나셨다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어머니(한국명 ‘윤학자’, 일본명 ‘다우치 치즈코’)는 7세에 조선총독부 목포시 관리로 부임한 외할아버지를 따라와 목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고등학교 은사인 다카오 선생의 추천으로 공생원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게 된 것인데 그 곳에서 운명의 윤치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할 당시에는 주변의 걱정과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말씀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이었다. 유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도 높은 사랑, 겸손한 사랑, 어머니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목포 고향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고치에 ‘사랑의 어머니, 윤학자’의 기념비를 세울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내가 3살이던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되어 일본 여성인 어머니의 안위를 고려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일본 (시코쿠) 고치로 갔다가, 그 곳에서 계속되는 설사와 열로 먹지도 못하는 탈진상태가 되어 불과 2년 만에 다시 목포로 돌아왔다.
고향서 자라는 동안 나는 내 운명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바다와 산,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가두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갇혀버린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자유인이었다. 지금까지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나는 내 운명에 감사한다.
이름도 셋, 고향도 셋
윤태산(대언공파 32대손), 이 이름은 파평 윤씨 족보에 올라 있는 내 이름이다. 윤기, 이 이름은 아버지가 하나님에게 바치신다며 기독교의 ‘기’자를 따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다우치 모도이, 이것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시면서 어머니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어머니가 무남독녀이기 때문에) 일본 호적에 올린 이름이다. ‘윤’이 다우치가 되었고 국적과 호적이 일본인으로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버지의 교향이자 윤태산이라는 이름을 나에게 준 윤씨 가문들이 모여 살고 있는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가 나의 고향이요, 나를 키워주고 사랑해 준 목포도 나의 고향이다. 또한 언제나 나를 반겨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고치도 나의 고향인 것이다.
2 장 자연이 교실
목포라는 말만 들어도 따스함과 고마움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목포는 나에게 국적보다 인간이 우선한다는 시민정신을 심어주었다.
시작의 땅
목포역은 1914년 개통된 목포-서울간의 종착역이자 시발역이고, 국도 1호인 목포-신의주 간 939km의 시발점이여 기착점이다. 일찍부터 서구문화가 일본을 통해 들어오면서 목포는 신문화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1995년 나는 어머니를 소재로 목포 사람들의 인정과 시민정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자연을 소개하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것이 ‘사랑의 묵시록’ 이라는 한일합작 영화였다. ‘사랑의 묵시록’은 아름다운 목포의 풍경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었다.
어찌 고향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꿈과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곳이며 일본 여성이었던 어머니를 최초의 시민장으로 명복을 빌어준 곳이 목포였다. 목포라는 말만 들어도 따스함과 관심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목포는 나에게 국적보다 인간이 우선한다는 시민정신을 심어주었다.
3 장 아이들의 꿈을 따라간 청춘
새 것이 없는 공생원, 남는 것이 없는 공생원, 부모가 없는 공생원. 하지만 공생원에는 사랑의 나무들이 가득하다.
특히 감사의 나무들이.
아이들의 오케스트라
모든 공생원의 크리스마스는 실로 대단했다. 오케스트라 연주와 합창, 연극과 기악, 성악, 무용 등 모든 예술이 등장하는데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모든 일련의 프로그램들은 아이들끼리 기획하고 연출하며 준비했던,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큰 문화행사였다.
그야말로 공생원은 희로애락이 계속되는 인간사의 축소판이다. 항상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하는 나는 1년이 3개월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는 그들의 진실한 마음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헌신하여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가슴 속 가득 폼고 있는 저들의 꿈들을 어떻게 만져줄 것인가?
새 것이 없는 공생원.
남는 것이 없는 공생원.
부모가 없는 공생원.
하지만 공생원에는 사랑의 나무들이 가득하다, 특히 감사의 나무들이.
그래서 내 마음은 찬 바람 속에서도 더욱 따뜻하다.
4 장 그 날이 오면
사회사업가는 무슨 꿈을 꾸는가가 중요하다.
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인도한다. 꿈은 지금보다 내일에 희망을 준다
재일 코리안의 희망
오사카 ‘고향의 집’ 준공 후, 일본 정부 후생성에서 나를 사회복지형태 검토의 위원으로 위촉하여, 나는 한국복지의 일본실천계획이라는 정책제안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국에 있는 재일 코리안 단체에 교육, 문화전문가 파견 요청
둘째, 외국인 종합서비스센터 운영 요청
셋째, 코리안 공동체에 정부의 복지사업 위탁 요청
복지라고 하는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불편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고 걱정해 주고 문제를 같이 풀어 나가는 것이다. 사회사업가는 무슨 꿈을 꾸는가가 중요하다. 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인도한다. 꿈은 지금보다 내일에 희망을 준다.
‘고향의 집‘의 시작은 일본 안에 보다 많은 고향의 집을 만드는 꿈이어야 하고 재일동포들에게 안심하고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5장 사회사업과 나
내가 사회사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 보다는 내가 좋아서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나 자만일 수 있다. 나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사회사업과 나
나는 왜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가? 나의 적성에 맞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내가 사회사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 보다는 내가 좋아서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나 자만일 수 있다. 나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버지 인생 40년, 어머니 인생 76년이 된다. 아버지보다 36여년을, 어머니보다는 20년을 더 살고 있다. 그래도 부모님이 남기신 업적에 비교하면 나는 아직 멀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대화하면서 당신 같으면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겠냐고 지혜를 구한다.
부모님과의 대화, 이것은 나의 유일한 재산인 것 같다. 아버지가 지니셨던 뜨거운 열정 역시 나의 혈관 속에 고스란히 흐르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나 같은 인생도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윤기 같은 사람도 사회사업을 하는데 하고 용기를 얻어 이 땅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동참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참으로 기쁠 것이다. 아직 부모님 앞에 부끄러운 자식이지만 거지대장 윤치호의 자식으로 태어난 갓을 감사드린다.
6장
다시 오소서
영원한 청년 윤치호
아버지 어머니께서 항상 기도해 주시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와 아내와 딸이, 두 분 기도에 힘입어 아버지 어머니께서 남기신 일을 열심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예수에 대한 믿음과 고아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짧은 생애를 마치고 떠난 사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신앙과 사랑, 공생의 정신은 그의 혼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쉬지 않고 뒤를 잇는 일을 하게 한다.
정보제공 :
저자소개
윤기(지은이)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회장 사회복지법인 윤학자공생재단 회장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창자 제 16회 호암상 사회봉사상 수상 제 19회 자랑스런한국인대상 국위선양부분 수상 자유도시 사카이(堺) 평화공헌 대상 시설 운영과 더불어 한일 합작 영화 “사랑의 묵시록-다우치 치즈코의 생애” 제작이나 한일 마음의 교류 심포지움의 개최,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일본에서의 국제 복지 연수 실시 등. 한일 복지 문화 교류에도 임하고 있다. 자신의 시각으로 어머니의 생애를 담은 “어머니는 바보야”, 한일간의 화해와 희망을 담은 “김치와 우메보시” 등의 저서가 있다.
목차
1장 폭풍과 절벽 운명 어머니 아버지의 약속 이름도 셋, 고향도 셋 2장 자연이 교실 호랑이가 있던 학교 쌍둥이 바위 멀리멀리 갔더니 배고픈 설움 시작의 땅 3장 아이들의 꿈을 따라 간 청춘 총각 원장 수선화 합창단 고아들의 고민 프러포즈 아이들의 오케스트라 봉선화 피는 언덕 바보인생 정거장 · 노래 선물 4장 그 날이 오면 도쿄행 한일합방 문서를 읽어 보았는가 일본 안에 한국 만들기 재일코리안의 희망 서운한 마음 자존심 알고 있는 것 같지만 통역이 필요한 나라 딸 녹이의 원장 취임 5장 사회사업과 나 가나마야 대사 일본인 고아 야마모도 이방자 여사 기부가 버릇이라는 분 호텔 경영 꿈의 여행 어느 여인의 편지 거절하는 용기 호암상 세계의 유행어, 공생 고하도 사회사업과 나 복지는 신뢰를 만드는 일이다 6장 다시 오소서 영원한 청년 윤치호 다시 오소서, 영원한 청년 윤치호 아버지 윤치호가 남긴 혼 1937년 6월 22일 동아일보를 보고 자료 1 1937. 06. 22 동아일보 자료 2 1939. 06. 18 동아일보 자료 3 1939. 06. 20 동아일보 자료 4 윤승혁 대종 회장님 축사 자료 5 옥동마을 윤치호 기념비 제막식 기념사
